[피해사례 17]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 국회 앞 1인시위
햇볕이 쨍쨍 내리쬐던 26일 낮 12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정문 앞.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국회의사당 정문을 빠져나오는 사람들 앞에 한 부부가 섰다.
14개월 아이를 품에 안은 박현서(34·천안) 씨와 그의 남편 김기두(31·천안) 씨. ‘사람 죽이는 생활용품 가습기살균제’라는 글씨가 크게 적힌 피켓을 든 부부,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세상을 떠난 큰 딸 하은이를 생각하며 난생 처음 1인 시위에 나선 것이다.
칭얼대는 셋째 아이를 번갈아 안으며 1인 시위를 진행한 부부는 이번 시위를 벌이기 위해 천안에서 올라왔다. 둘째 아이는 어린이집에 맡기고, 남편은 휴가를 냈다.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떠나보내야 했던 큰 딸의 억울한 사연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아이 감기 관리에 도움이 되라고 안전하단 문구만 보고 사용했는데···. 살인무기인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내 딸을 보낸 거잖아요. 너무 억울하잖아요. 피해에 대한 기업과 정부의 사과도 받고 싶고 이 원통함을 호소하고 싶습니다.”
28개월이던 하은이는 갑자기 마른기침을 하고 밤새 끙끙 앓으며 호흡 곤란을 호소했다. 서울아산병원에 아이를 입원시킨 다음 날, 박 씨는 같은 병원에서 둘째 아이를 출산했다. 출산 후 산후조리는 물론, 둘째 아이를 돌볼 겨를도 없이 박 씨는 하은이의 곁을 지켰다. 아이가 언제 잘못될지 모른다는 소식에 남편도 휴직을 내고 함께 했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위험하다고···. 계속 하은이 옆에서 지켜줬어요.”
부부의 간절함을 뒤로 한 채 딸은 끝내 입원 두 달 만인 2011년 6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아이의 건강을 위해 가습기에 손수 넣었던 가습기살균제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이 아이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박 씨는 “딸애가 감기가 있어서 가습기를 자주 틀어줬는데 저는 방이 답답해서 아이를 재우고 거실에 나와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결국 우리 아이만 피해를 입었어요”라고 자책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김기두(왼쪽, 31) 박현서(34) 부부가 26일 정오께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대책 및 해결을 촉구하는 릴레이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천안에서 올라온 부부는 지난 2011년 6월 11일 생후 28개월 된 첫 딸 하은이를 잃었다. 이기태 기자 likitae@ibabynews.com ⓒ베이비뉴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김기두(왼쪽, 31) 씨의 부인 박현서(34) 씨가 26일 정오께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대책 및 해결을 촉구하는 1인시위를 한 후 남편으로부터 셋째자녀를 건네 안고 있다. 남편 김 씨는 아내에 이어 1인 시위를 계속 이어갔다. 천안에서 올라온 부부는 지난 2011년 6월 11일 생후 28개월 된 첫 딸 하은이를 잃었다. 이기태 기자 likitae@ibabynews.com ⓒ베이비뉴스
가습기살균제의 주성분이 폐질환 등을 일으키는 독성물질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이미 2011년의 일이다. 박 씨 부부를 포함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가습기살균제 제조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런 진전은 없다.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을 만들었던 옥시레킷벤키저는 대형 로펌을 앞세워 피해자들과 장기전에 들어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소송에 피해자들은 피가 마른다.
화학물질에 대한 관리 등을 제대로 하지 않고 국민의 안위를 지키지 못한 정부는 책임 회피만 할 뿐이다. 윤성규 환경부 장관은 지난 18일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 대책 책임에 대해 “법원 결정을 지켜보는 방법이 있다”며 “(피해자를) 국민세금으로 도와야 하느냐는 측면에서 그렇지 않은 측면도 있다. 제조업체가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피해자들이 6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되길 희망했던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법안들은 끝내 심의조차 되지 못했다. 지난 26일 오전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법안들에 대한 공청회 일정만 잡았을 뿐이다. 피해자들 입장에선 국회의 법안 심의 과정이 느리고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또 다른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 이재남(34·충주) 씨도 1인 시위를 하기 위해 충주에서 올라왔다. “모르는 사람들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라고 하면 보상 받은 거 아니었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우리의 아픔을 사람들에게 몇 번을 말해도 피해자가 아닌 이상 아무도 모른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의 가족이 가습기살균제를 써서 이런 피해를 당했다면 가만히 있었겠느냐. 대통령이 이 사건을 알긴 하는지도 궁금할 뿐이다.”
이 씨의 남편은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폐와 심장 이식을 했다. 세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집안의 가장이지만 일을 할 수도, 아이와 놀아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약값만 한 달에 200만 원 이상이 들고, 이식 수술에만 1억 원을 썼다. “모든 게 빚”이라고 하소연하는 이 씨는 “경제적인 지원이 우선적으로 돼야 한다. 조금이라도 된다면 저희에겐 정말 큰 희망”이라고 말했다.
이 씨가 가장 마음 아픈 건 가습기살균제가 가져다준 질병 때문에 남편과 아이의 관계가 멀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남편은 체력이 약해져서 아이들과 놀아주지 못하는데, 5살 둘째 아이가 ‘아빠는 가습기살균제를 만든 아저씨들 때문에 아파서 우리랑 못 놀아 준다’고 말한다. 그 작은 아이가 그런 말을 할 땐 마음이 아프다”는 게 이 씨의 심경이다.
가습기살균제로 4살 된 딸을 보내고 1년 뒤 아내의 폐이식 수술을 지켜봐야 했던 장동만(48·대전) 씨는 마스크를 쓴 채 1인 시위에 참가했다. 폐 이식으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진 아내에게 혹여나 감기라도 옮길까 하는 걱정에서 항상 마스크를 착용하는 그다.
장 씨는 “가습기살균제 문제는 없어질 문제가 아닌데, 이를 놓고 머뭇거리는 정부는 정부가 아니다. 원칙대로 한다고 했고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으면 우리를 봐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첫 딸을 떠나보낸 후 그리운 마음에 다시 딸을 가진 장 씨의 아내는 출산하자마자 호흡곤란으로 쓰러졌다. 새하얗게 변한 폐, 원인은 딸아이와 같은 가습기살균제였다. 폐 이식을 한 아내는 비싼 약값이 부담되는 듯 늘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산다고 한다. 장 씨는 “우리 탓이 아닌데, 써도 된다고 해서 썼을 뿐인데 내 아내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 우리가 그럴 필요 없지 않느냐”며 “내 상식선에선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법안이든 뭐든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왜 달라지지 않느냐”고 울분을 토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현황을 보면 2002년 6월 최초의 사망사례가 나온 이후 현재(5월 13일) 피해신고 사망 127건을 포함해 총 401건의 피해신고사례가 접수됐다. 장 씨는 “죽은 사람만 국회의원 절반에 가깝다. 국회의원들이 이렇게 죽었다면 이러고 있을 것이냐”며 “내 생명을 걸어서라도 꼭 해결됐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소망은 단 하나,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다. 잘못한 기업이 사과하고 보상하며, 정부가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위해 피해자 구제에 나서는 것, 그것뿐이다. 이들은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법안 등이 통과될 때까지 1인 시위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것 말고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해보겠다는 마음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장동만(왼쪽, 48) 씨, 이재남(34) 씨가 26일 정오께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대책 및 해결을 촉구하는 릴레이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장동만 씨는 딸을 잃었고, 부인은 폐 이식을 한 상황이다. 이재남 씨는 남편이 폐 이식 수술을 받은 상황이다. 이기태 기자 likitae@ibabynews.com ⓒ베이비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