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사례 26] 산소통이 '절친'인 사람들, 죽음보다 더한 고통

가습기살균제 참사기록관

[피해사례 26] 산소통이 '절친'인 사람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최예용 0 8196 0 0

산소통이 '절친'인 이들, 죽음보다 더한 고통

[끝나지 않은 고통, 가습기 살균제 비극] 폐이식을 기다리는 사람들

안종주 환경보건시민센터 운영위원.보건학 박사
 
프레시안  2013-12-17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꼭 맞는 것은 아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운데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사람들이 있다. 중증 피해자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이들 곁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주위에 늘 어른거린다. 집에서 꼼짝을 할 수 없어 외출은 거의 포기한다. 혹 어쩔 수 없이 외출해야 할 경우에는 이들의 곁에는 폐에 산소를 공급해주는 산소통이 '절친'처럼 늘 함께한다. 질긴 생명 때문에, 사랑하는 아이와 남편, 아내 때문에 힘든 삶이지만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다른 사람의 건강한 폐이다. 한번 망가진 폐는 결코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폐 이식은 쉽지 않다. 억대가 넘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뇌사자의 폐를 이식 받아야 하기 때문에 돈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건강도 뒷받침돼야 한다. 대수술이기 때문에 이를 견뎌낼 수 있는 몸 상태가 되어야 한다.

 

물론 폐 이식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이 곧 영원히 건강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폐 이식 수술 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은 경우도 왕왕 있다. 폐 이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일반인들보다 오래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독한 살균제 화학 성분 때문에 폐가 70~80%가 망가진 사람에게 희망은 기적의 치료제도, 줄기세포도, 유전자 치료도 아니다. 오직 폐 이식 수술만이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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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3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대회에서 신지숙 씨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폐 손상 후, 60kg이던 몸무게가 40kg 아래로

올해 35세인 가정주부 신지숙 씨도 폐 이식이 꼭 필요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다. 그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가습기 살균제 피해 문제 해결에 힘 쏟는 환경운동 활동가들 사이에서 스타다. 일상 활동이 불가능해 거의 외출을 하지 않는 그녀지만 가습기 살균제 문제를 세상에 알리고 피해자를 위한 일이라면 힘든 것도 마다않고 늘 현장에 나오기 때문이다.

2012년 6월 25일 한여름. 그녀는 휠체어를 타고 산소통을 지닌 채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기업의 보상 등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주최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증언에도 참석했다. 23년 만에 다시 공휴일이 된 올해 10월 9일 한글날 국회 정문 앞에서 일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녀는 환경보건시민센터가 주최한 2012년 12월 환경피해시민대회에서 가습기 살균제 문제 해결에 열성을 다한 몇몇 피해자들과 함께 제2회 환경보건시민상을 받았다.

필자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정부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공식 환경조사가 거의 끝날 무렵인 지난 8월 27일이었다. 만나기 전에 전화로 들려오는 음성을 듣고 중증 환자임을 단박에 알았다. 전화 도중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자주 숨을 모은 뒤 다시 말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동안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잘 알려진 피해자인 줄, 그리고 그렇게 열성을 다해 살균제 문제 해결에 앞장서온 투사인 줄 그때는 몰랐다.

서울 구로의 한 다세대주택을 찾아갔다. 산소를 공급하는, 산소통과 연결된 콧줄을 끼고 호흡하고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연민과 함께 가슴 한곳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누가 그녀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머리에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도 그런 감정을 애써 감추어야만 했다. 몸은 야윌 대로 야위어져 있었다. 두 살배기 딸은 엄마의 건강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사면담 내내 천방지축으로 방안을 뛰어다녔다. 몸무게를 물어보니 40킬로그램이 채 못 된다고 한다. 아기를 가지기 전에는 65킬로그램이었단다. 임신 당시에는 72킬로그램까지 나갔었다는 말을 들으니 옛날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신 씨는 임신 8개월이던 2011년 5월, 호흡곤란 증세를 겪었다. 처음에는 임신 후기에 있을 수 있는 증상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감기에 걸리면 감기가 잘 낫지 않았다. 기침을 한번 시작하면 멈추질 않아 헐떡거리기 일쑤였다. 호흡기내과를 찾아 엑스레이를 찍었지만 큰 이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숨을 못 쉬고 쓰러졌다.

대학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아기를 꺼내겠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그 날 밤, 제왕절개 수술 끝에 딸이 태어났다. 이때는 원인미상 폐 질환의 용의 선상에 가습기 살균제가 이미 올라와 있던 시기였다. 결혼 후 라섹 수술을 한 뒤 눈이 건조해져 가습기를 사용하면서, 여기에 가습기 살균제를 넣었던 게 화근이었다.

그녀에게 물었다. 폐 이식은 시도 안 해보셨습니까? 우문(愚問)이었다.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생각해보니. 그녀도 당연히 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워낙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한다.

신 씨는 출산 후 폐 이식을 당장 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형편이 넉넉지 못했던(지금은 더욱 그렇다) 탓에 돈 걱정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폐 이식 수술 비용만 7000만 원이나 들어가고 한 달 약값만 300만 원이라는 병원 쪽의 말에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수술 뒤 합병증도 있을 수 있다는 말도 여기에 한몫했다. 이제 어떤 식으로든지, 정부가 됐든 가해자인 가습기 살균제 회사가 됐든 충분한 보상비용이 나오면 몸을 추슬러 폐 이식 수술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신 씨를 만난 지 나흘 뒤 이번에는 국회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했다. 가습기 살균제가 어린아이와 산모 등의 목숨을 앗아간 원흉이라는 정부 공식 발표일인 8월 31일(2011년)에 맞춰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소강당에서 처음으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추모 대회가 열렸다. 그녀는 여기에 왔다. 그리고 추모대회 마지막 행사로 기획된 선언문 낭독 때 피해자와 그 가족을 대표해 단상에 올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읽어내려 갔다.

"정부와 가해 기업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공식 사과하라!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해 책임을 규명하라! 국회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 구제법을 제정하고, 정부는 이에 적극 협력하라!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와 지원을 위해 상설 기구를 설치하라!"

그녀의 피맺힌 절규가 통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표적인 가해 기업인 옥시레킷벤키저 대표가 지난 11월 국회 환경노동위의 환경부 국정감사 마지막 날에 도의적인 차원에서 50억 원의 피해자 지원 기금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직 많은 것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막내아들, 의대 가서 엄마 치료해주겠다며 3수

박순영(가명) 씨도 폐 이식이 필요한 50대 주부다. 함께 e-러닝프로그래밍 일을 하던 박 씨 부부는 가습기 살균제 중증 피해로 모두 생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지금은 남편이 차량으로 화물택배 일을 하면서 병원비와 생활비를 힘들게 대며 생계를 겨우 꾸려가고 있다. 어려서부터 기관지 확장증으로 고생하던 그녀는 환절기만 되면 숨을 쌕쌕거리며 힘들어했다. 그래서 가습기를 사용했고 남편이 마트에서 우연히 살균제를 보고 사온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성가대원이었던 그녀는 2008년 7월 27일 일요일, 호흡곤란으로 갑자기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급히 동네 중소병원으로 가 엑스레이를 찍었다. 이 폐로는 어디 병원을 가든 죽을 것이라는 끔찍한 말을 들었다. 놀라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옮겼다. 가족들을 모두 불러 모으라고 의료진이 말했다. 임종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청천벽력이었다. 한때 숨이 멈추기도 했다. 전기 충격기를 사용해 겨우 소생했다. 다행히 중환자실에 병상이 하나 비어 있어 집중치료를 받아 목숨을 건졌다. 49킬로그램이었던 그녀의 몸무게는 35킬로그램이 됐다. 사람의 몸이라고 믿기 어려운 상태가 돼버렸다.

박 씨도 산소호흡기로 숨을 쉰다. 가스레인지 앞에 가면 화기 때문에 숨 쉬기가 어렵다. 그래서 가족들은 그녀가 있을 때는 가스레인지를 켜지 않는다. 청소나 세탁기를 돌리는 것도 모두 이제는 20대가 된 아이들의 몫이다. 막내아들은 엄마가 겪는 고통을 보고 어떻게 해서라도 의대에 가겠다며 삼수를 했다. 가습기 살균제는 이렇게 박 씨와 박 씨 가정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그리고 그 고통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른다.

 

폐 이식을 받을 수 있을지,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끝날지도. 설혹 모든 것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동안 겪었던 고통은 누가 보상을 해줄 것인가. 또 고통의 기억은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니지 않은가.

이 글을 맺으면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고 아직도 겪고 있는 많은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꼭 말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필자의 말이 아니다. 미국의 유명 여류작가 수잔 손탁의 말이다.

그녀는 1939년 다섯 살에 결핵으로 아버지를 여의었다. 1976년 유방암 말기인 4기 진단을 받고 프랑스 파리로 가 유방 절제 수술과 화학 요법으로 이를 이겨냈다. 투병의 성찰을 담은 <은유로서의 질병>을 1978년 세상에 내놓았다. 1986년에는 폐암으로 어머니마저 잃었다. 그리고 많은 친구들을 에이즈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리고 1988년 <에이즈와 그 은유>를 발표했다. 그녀는 1998년 이번에는 자궁암으로 또 한 번 고통을 겪게 된다. 자궁을 덜어내는 아픔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자신에게 닥친 질병에 굴하지 않았다. 오랜 투병 생활 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사형선고를 받고 나면 당신은 태양도 죽음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 차지요. 그러나 당신의 마음속에는 끊임없이 강해지고 깊어지는 뭔가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생명이라고 부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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