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5일. 보팔 기념 병원과 빔베티카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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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팔에서의 편지 5> 2017년 2월 5일. 보팔 기념 병원과 빔베티카 방문

최예용 0 4430

 

<보팔에서의 편지 5> 2017 2 5. 보팔 기념 병원과 빔베티카 방문


삼바브나 클리닉을 찾아온 각국의 자원봉사자 친구들은인디안 타임(Indian Time)’ 이야기한다. 인도인들은 약속시간보다 한참이 지나서야 등장한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인도 여행기나 가이드북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도인의 태평한 쁘라블럼(No problem)!” 같은 맥락이다. 국민성이라는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또한 모순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한번 생긴 고정관념이 계속 강화되는 것에 불과한 같으면서도, 번의 경험을 거치다 보면 고정관념이 아예 터무니 없는 같지는 않다. 사람들의 평균을 수는 있지만 막상 평균적인 사람을 찾기란 힘들다. ‘인디안 타임 마찬가지다. 오늘도 친구들과의 약속은 11 반에서 12 반으로, 1시로 미뤄졌다. 사실 11 반으로 약속시간을 잡았을 때부터 친구들이 그때 나타나리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인디안 타임으로 프레이밍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께 만났던 카샤마(Kashama), 소날(Sonal), 프레이야(Praiya), 그리고 니틴(Nitin) 만나 먼저 향했던 곳은 보팔 기념 병원 연구 센터(Bhopal Memorial Hospital and Research Center, BHMRC)였다. 이곳은 그저께 우리가 보팔에서 보팔 쪽으로 가는 길에 지나가며 보았던 곳이다. 나는 병원이 상당히 크다고 생각했지만, 로컬 친구들은 보팔에서 그렇게 병원은 아니라고 했다. BHMRC에서는 주로 가스 참사의 피해자들을 진료하고(가스 참사 피해자가 아닌 경우 매우 비싼 진료비를 내야 한다), 이들의 증상을 연구한다.


BHMRC 정부 부속 기관인 인도 의학 연구회(Indian Council of Medical Research, ICMR) 지부다. 삼바브나 클리닉의 스태프들은 ICMR 조사가 연구윤리에 어긋나고, 결과 또한 종종 왜곡된다고 지적했다. 오늘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병원은 열려 있었지만 연구 센터는 닫혀 있었고,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 관계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 나눠볼 수는 없었다. 병원 옆에는 연구 센터 뿐만 아니라 간호대학 또한 위치해 있었다. 가스 참사의 피해자들이 묻힌 병원의 정원에는 이들에 대한 경의와 희망(이는 BHMRC 모토이다) 상징하는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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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Homage & Hope" 쓰여진 동판과 조형물 아래에는 수많은 가스 참사 피해자들이 잠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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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BHMRC 내부 모습

 

아쉬움을 뒤로 , 우리는 점심을 먹고 보팔의 유명한 유적지 하나인 빔베티카(Bhim Betka) 향했다. 빔베티카는 아마도 내가 보팔에 있는 동안 방문한(방문할) 곳들 유일하게 가스 참사와 관련되지 않은 곳이다. 보팔 시내에서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구석기 시대의 주거 흔적과 동굴 벽화가 남아있다. 보팔에는 인도에서 가장 모스크도 있고, 로컬 친구들이 강력 추천했던 아름다운 힌두 사원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빔베티카는 다른 곳을 모두 제치고 1순위로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트립어드바이저(trip advisor) 빔베티카 투어 상품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도 이러한 투어를 이용하거나 현지인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찾아오기 힘들 수도 있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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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빔베티카의 벽화

 

보팔 시내와 빔베티카를 왕복하는 길에 나는 최소 4 이상의 결혼식을 목격했다. 자연스럽게 친구들과도 결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Why everyone’s getting married?”라고 물어보자 소날은 웃으면서, 요즈음이 인도에서는 결혼하기 적합한 시기로 여겨진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한국에도결혼 시즌 있다. 인도에서는 부모님이 정해준 사람과 결혼해야 하기 때문에, 이전에 사귀는 사람과의 관계는 이미 이별이 전제된다. 한국에서도 십년 전에는 그랬던 같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내가 차를 타고 지나가며 스치듯 인도의 결혼식은 아주 흥겨웠다. 길가 바로 옆에 세워진 트럭에서 DJ 알록달록한 조명을 쏘며 디제잉을 하고 하객들은 춤을 춘다. 일종의 간이 클럽이 만들어진다. 아마도 본식은 ‘Wedding Garden’에서 이루어지는 같은데, 인도의 길가에 뜬금없이 벽으로 둘러싸인 서양식의 하얀 저택이 나타나면 그게 바로 ‘Wedding Garden’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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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소날네 가족과 (강아지도) 함께

 

돌아오는 길에는 소날의 외삼촌네 잠시 들렀다. 소날의 외할아버지께서 보팔 참사를 실제로 경험하셨다고 해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날의 어린 남동생이 통역을 도와주었다. 소날의 외할아버지의 성함은 P.R. Cokhande이며, 보팔 참사가 일어났던 1984 당시 35세이셨다. 그는 원래 보팔(알고 보니 보팔은 참사 이전부터 존재했던 신시가지였다) 살고 있었지만, 참사 당일 밤에는 아들이 입원해 있던 BHEL Kasturba 병원에 가족들과 모두 함께 있었다. 그는 그날 병원으로 사람들이 끊임 없이 몰려오는 광경을 목격했다. 가스로 고통스러워 하던 사람들은 병원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그가 살고 있던 Beful M.P.마을은 가스의 영향을 직접 받지는 않았지만, 그날 밤의 공포는 그를 포함한 많은 주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터전을 당장 떠나게 만큼 강력했다. 콕한데씨는 가족들과 함께 다음날 바로 원래 그의 고향으로 떠났고, 15 후에야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도 집을 떠났다가 2주에서 사이에 돌아왔다


가스 참사 이후 동안 도시는 완전히 정지되었고, 사람들은 가스가 몰려올까봐 두려움에 떨면서 지냈다. 그는 경미한 증상 외에 심각한 질환을 앓지는 않았다. 내가 그에게 참사가 당신의 삶이나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라고 묻자 그는 자신은 몸이 아프지 않다고 대답했고, 공장이 문을 닫고, 새로운 병원들이 생겨났으며, 사건의 교훈으로 고빈프라와 만디딥 새로운 공장지대는 주거지역(시내) 밖에 지어졌다고 언급했다.


삼바브나 클리닉 부근의, 보팔 가스 참사 심각한 영향을 받은 지역에 비해 소날의 가족은 매우 부유했다. 소날의 외할아버지는 자신은 물론 주변 이웃 중에서도 심각한 가스 참사 피해자는 없다고 했다. 소날의 외할아버지와, 인터뷰 내내 말을 거들어주던 어르신들, 아이들은 모두 가스 참사에 대해서는 알지만, 유니언카바이드의 화학폐기물 매립과 그로 인한 식수오염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했다. 내가 문제에 대해서 아느냐고 묻자 계속해서가스는 공기로만 전달되었다 대답을 반복했다. 여러 면에서 가족들에게 보팔 가스 참사와 유니언카바이드의 횡포는 어쨌거나종료된 사건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김지원 (서울대 인류학과 대학원생, 가습기살균제 참사문제를 보팔참사와 비교연구하기 위해 보팔 방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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