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3일. 리테쉬 인터뷰, 그리고 로컬 친구들과 함께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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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팔에서의 편지 3> 2017년 2월 3일. 리테쉬 인터뷰, 그리고 로컬 친구들과 함께한 하루

최예용 0 4156

<보팔에서의 편지 3> 201723. 리테쉬 인터뷰, 그리고 로컬 친구들과 함께한 하루

 

삼바브나 트러스트 클리닉은 오늘도 평화로운 아침을 맞았다. 나는 어젯밤에 웬일인지 잠도 잘 오지 않고 새벽녘에 여러 번 깼다. 어쨌든 나도 아침이 오는 것이 반가웠다. 원래 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삼바브나 클리닉의 하루 주기에 맞추어 생활하는 것은 왠지 편안했다. 바깥 세상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몸과 마음을 가벼이 한 채로, 허브 농장에 둘러싸여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주어진 일을 하며 그게 끝나면 쉬는 것.

 

아침 식사 후, 내가 오전 동안 무슨 일을 해야할지 물어보려 데빈을 찾았다. 하지만 새벽 5시에 잠이 든 데빈에게 아침 9시란 여전히 한밤중과 같았다. 좀 더 자고 일어나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 사서 샤네즈가 어제 인터뷰에서 소개해준 스태프를 인터뷰하고 싶었는데 마침 자유시간이 생겨서 기뻤다. 리테쉬(Ritesh)는 삼바브나 클리닉의 도서관 바로 옆에 위치한 커뮤니티 연구실(community research unit)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샤네즈와 마찬가지로 보팔 가스 참사를 직접 경험한 피해자이다. 내가 내 자신과 조사의 목적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었는데, 그가 영어로 원활한 소통은 어렵다고 하여 샤네즈의 도움을 받았다. 인터뷰는 리테쉬의 동료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 가운데 연구실 그의 자리에서 이뤄졌다. 커뮤니티 조사는 간단히 말해 보팔의 지역 커뮤니티를 찾아가 주민들이 가스나 오염된 물로 인해 어떤 증상을 앓고 있는지 관찰하고 스크리닝하여, 더 많은 증상과 피해자들을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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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커뮤니티 조사팀의 리테쉬씨

 

보팔 참사 당시 7살이었던 그는 1984123일 참사가 일어난 그날 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리테쉬는 엄마, 아빠, 그리고 두 명의 여동생과 함께 보팔에 살고 있었고, 가스로 인한 증상을 처음으로 호소한 것은 그의 막내 여동생이었다. 여동생은 눈이 아프다고 호소했지만, 가족들은 막내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쓸데없이 떼를 쓰는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머지않아 가족들 모두가 똑같이 눈이 아프기 시작했고, 일단 모두 집에 있던 물로 눈을 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니언카바이드에서 일하는 이웃들이 찾아와 유니언카바이드 공장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다며 빨리 떠나라고 전해주어, 리테쉬 가족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도 모른 채 가스를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혼비백산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본 경찰과 실랑이를 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무사히 안전한 할머니댁에 도착했다. 리테쉬는,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 그 급박한 상황에 신났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리테쉬와 가족들은 보팔에서 수천명이 죽고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리테쉬와 마찬가지로, 그날 밤 사람들은 가스 누출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기 때문에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었고, 그 중에는 가스 쪽으로 달려간 이들도 있었다. 그날 밤 보팔 주민들의 운명은 어느 방향으로 도망갔는지에 따라 달라졌다. 리테쉬 가족은 운이 좋게도, 안전한 지역으로 빨리 대피한 경우였지만 잠시의 가스 누출은 평생의, 그리고 몇 대에 이은 상처로 남았다. 리테쉬의 어머니는 혈액 생산이 원활하지 않아 30년이 지난 지금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고, 리테쉬 본인은 심각한 질환이 없지만 아들과 조카는 리코리아(likoria)와 탈리세미아(thalassemia) 증후군을 앓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고 이후 보팔 참사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가족들의 질환과 가스 누출을 크게 연관지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리테쉬는 1999년에 별다른 생각 없이 삼바브나 클리닉의 연구실에 지원했다가 합격해서 일하게 되었고, 삼바브나를 통해 보팔 참사의 심각성에 대해 인지하게 되었다. 리테쉬는 자신 뿐만 아니라 보팔의 많은 사람들이 가스 누출과 식수 오염으로 인한 피해가 엄청난 규모이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고 했다. 특히 보팔에 신시가지가 조성되고 그곳에 입주한 사람들은 과거에 보팔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모른다. 그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보팔 참사의 피해자들도 다국적 대기업이라는 적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정부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그것이 배신당했을 때의 분노를 비슷하게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러 단체들이 함께 협력하고, 정부에게 완전히 의존하지 않고 부분적인 지원을 받으며 정부에게 압박을 주는 것이 조금씩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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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허브 핸드북을 만들고 있는 양

 

리테쉬와 인터뷰를 마치고, 오전 중에는 중국에서 온 양을 도와서 삼바브나 클리닉의 농장에 있는 허브의 핸드북을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한국에 있는 친구를 통해 소개 받은 보팔 로컬 친구들과 함께 보팔 시내의 은행에서 미국 달러를 인도 루피로 환전하고, 보팔 참사 기념관(Remember Bhopal Museum)을 방문했다. 친구들은 삼바브나 클리닉 주변이 가난한 무슬림이 많은 슬럼가이자 구 보팔(old Bhopal)이라며, 자신들은 깨끗하고 번화한 신 보팔(new Bhopal)에 산다고 했다. 확실히 친구들을 따라가서 본 신 보팔 지역은 길도 비교적 잘 포장되어 있었고 세련된 쇼핑몰도 있었다. 쇼핑몰을 들어갈 때 검색대를 통과해야 하고, 쇼핑몰 안의 가게를 들어갔다 나올 때도 가방과 영수증을 확인 받아야 하는 것을 볼 때, 빈부격차가 꽤나 심각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며칠 동안 평화로운 삼바브나 클리닉 안에서만 지내다가 밖으로 나오니 비로소 소위 말하는 인도 같은인도에 온 것 같았다. 매연과 먼지에 눈과 목이 따끔거렸고, 쉴 새 없이 울리는 자동차 경적과 목숨을 건 무단횡단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을 것만 같았으며, 마침내 차에서 크게 틀어 놓은 인도 대중가요에 이 모든 시끄럽고 복잡한 광경들이 묻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자 비로소 내가 인도에 온 것 같았다. 보팔 참사 기념관까지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는데, 이 친구들이 내가 알려준 박물관의 이름과 지도를 무시하고 완전히 다른 박물관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아무래도 순진한 외국인이 무언가 착각했으리라 짐작하고 베푼 호의였겠지만, 기념관 폐장을 한 시간 남겨두고 그렇게 길을 헤매는 바람에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속으로 마음을 졸였다. (결국 어쩌다 보니 보팔 참사 기념관은 다음날 다시 방문하게 되어서, 기념관에 대한 설명은 다음 일지에 적도록 하겠다.) 하지만 내가 나의 피곤한 몸 상태와 불편한 심기를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는지, 친구들은 자꾸 “Are you happy with us?”, “Smile!”이라 했고 그때마다 나는 웃는 것조차 피곤한 동시에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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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보팔 현지의 친구들과 함께 (사진 오른쪽이 필자)

 

나는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친구들에게 기름값을 건네고, 저녁식사를 샀다. 너무 피곤한 데다가 배까지 부르니, 전쟁 같은 교통상황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는 잠들기까지 했다. 며칠 후에 이 친구들을 다시 만날 때는 더 많이 웃으리라 다짐하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삼바브나 클리닉 안 숙소로 돌아왔다.

 

김지원 (서울대 인류학과 대학원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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