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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아픈 노동자들의 변호사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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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노동자들의 변호사로 살다

산업재해 당한 아시아 노동자 돕고 기업 감시하는 변호사 테드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 통해 문제 널리 알릴 것”
등록 2011-12-08 06:01 수정 2020-05-02 19:26

아픈 노동자들의 변호사로 살다

산업재해 당한 아시아 노동자 돕고 기업 감시하는 변호사 테드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 통해 문제 널리 알릴 것”


한겨레21. 2011년11월8일 

인터뷰 날, 테드는 귀여운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한국에 와서 받은 옷이라고 했다. 티셔츠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1%에 맞선 99% 저항하라.’ 이 저항성 짙은 문구가 담긴 옷이 귀엽게 보인 것은 그의 체형 때문이었다. 그는 살집이 두둑하고 부풀어 오른 배를 하고 있었고, 우연히도 배가 있는 위치에 ‘99%’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불룩하게 나온 배로 인해, ‘99%’라는 단어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가 육십 평생 가져온 가치관이 자신의 배로 인해 강조되고 있었다.

지난 11월12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반도체·전자산업 노동자 건강권과 환경정의’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테드 스미스가 강연하고 있다. ‘반올림’ 제공

지난 11월12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반도체·전자산업 노동자 건강권과 환경정의’ 국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테드 스미스가 강연하고 있다. ‘반올림’ 제공

1%에 맞선 삶 사는 할아버지 변호사 

테드는 1%에 맞선 삶을 살고 있다. 그의 눈과 귀는 99%를 차지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 그러나 직업만 보자면, 그의 사회적 지위는 1%에 더 가까웠다. 그는 변호사다. 

하지만 그는 대형 로펌에 속해 있지 않다. 전세계를 떠돌아다닌다. 그의 일은 대기업과 꾸준히 연관돼 있다. 다만 기업 쪽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서 일한다. 그는 대기업들이 자국과 개발도상국에 만들어놓은 환경오염, 부당노동행위, 산업재해 문제를 뒤쫓는다.

미국 캘리포니아 새너제이가 고향인 그를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이유도, 삼성이라는 기업 덕분이었다. 삼성반도체가 자사 노동자가 병에 걸릴 만한 위험 물질을 쓴다는 의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나흘을 머문 그는 다음날 인도로 떠난다고 했다. 인도에서 열리는 ‘아시아 산업재해 피해자 권리 네트워크’(ANROEV) 연례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전자산업 공장이 밀집된 아시아 지역이 테드의 주 무대였다(국제노동기구(ILO)에 따르면, 업무상 사고와 직업성 질환으로 매년 죽어가는 230만 명 중 절반이 아시아 노동자다). 타국 사람들과 접촉이 많은 그의 생활은 말투에서부터 묻어났다. 그는 말을 굉장히 천천히 했다. 원래 그런가 싶었는데, 통역을 두고 인터뷰를 시작하자 말이 3배속으로 빨라졌다. 느린 말투는 영어가 자국어가 아닌 사람들과 소통하려는 그의 애씀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한 뒤 나는 테드에게 당신은 보기 드문 사람이라고 했다. 한국으로 치면 그는 1945년생 닭띠였다. 당신 나이에, 당신 직업이면 보통 책상 앞에 앉아 있기 마련이라고 했다. 테드는 다리가 욱신거린다며 웃었다. 앉아 있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한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테드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말했다. 이 직업군 중 많은 이가 근사한 회사를 구해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것은 훈련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변호사들은 그렇게 하도록 훈련받아왔다. 특히 기업을 대변하는 일을 하도록 말이다.”

그가 이 훈련에 길들지 않은 까닭은 대학 졸업 뒤 2년간 해온 자원활동에 있었다. 그는 미국 할렘가에서 저소득층 자녀들을 상담하고 무상으로 돌보는 일을 했다. 2년 동안의 할렘가 생활은 그에게 진로에 대한 새로운 고민을 하게 했다. 그는 그곳에서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현실을 보았다.

직업병 노동자들 돕던 아내 만나

게다가 1960년대였다.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반전운동과 히피문화가 들끓던 시대였다. 한편으로 이런 움직임을 잠재우려는 기성 정치권력의 탄압도 컸다. 탄압은 시민들의 저항을 크게 만들었다. 1968년 인종차별에 맞선 마틴 루서 킹과 케네디 대통령의 동생 밥 케네디의 암살이 있자, 시민들은 워싱턴DC로 몰려들었다. 시민들은 분노했고 항의했다. 마침 테드는 워싱턴DC에 있었다. 20대 초반 나이의 그는 시위에 참여했다. 그때부터 ‘저항하라’가 그의 삶의 가치가 되었다. 

그는 자원활동을 마치고,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변호사 자격증을 발급받자 친구들과 작은 사무실 하나를 열었다. 다른 동료들은 대형 로펌을 찾아 떠났지만, 그와 친구들은 자신들이 차린 사무실에서 손님을 맞았다. 손님 대부분은 노동자였다. 가진 것 없고 힘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당한 대우를 해결했다. 주로 기업이 저지른 환경오염이나 부당해고 같은 사건 소송을 맡았다

테드는 자신이 맡았던 사건 하나를 말해주었다. 한 날은 트럭 운전사의 딸이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가 회사 사장과 싸웠다며 변호를 맡아달라고 했다. 싸움은 그녀의 아버지가 노동조합 간부라는 사실로 인해 불거졌다. 회사는 노동조합 가입을 이유로 그녀의 아버지에게 불합리한 대우와 탄압을 해왔다. 그는 사건을 맡아 해결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테드는 트럭 운전사의 딸을 다시 보게 된다. 운전사의 딸은 국회의원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지금도 진보적인 정치 성향의 의원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테드는 10년 전쯤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ICRT) 단체를 설립했다. 그는 ICRT를 각국 산업의 환경오염과 산업재해 문제를 국제적 공동 과제로 인식하고 풀어나가고자 만든 단체라고 소개했다. 그는 변호사보다, 코디네이터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국제 운동을 연결하고 조화시키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 했다.

전자산업의 환경오염과 직업병 문제의 위험성은 20대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법률사무소를 개업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한 병든 여자가 그를 찾아왔다. 그녀는 회사 때문에 몸이 망가졌다고 했다. 치료와 보상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전자산업체에 쓰이는 화학물질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아주 아팠고, 그것 때문에 마음마저 병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녀가 노출된 화학물질에 대해 많이 배웠고, 그녀가 입을 열어 자신의 피해를 이야기하도록 도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환경과 인체에 해를 가할 수 있는 물질을 사용하는 기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윤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동자와 지역 주민들이 놓여 있었다. 이런 인식은 그가 아내를 만나며 더욱 커졌다. 그의 아내는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는 변호사였다. 핫라인(직접통화 창구)을 만들어 직업병 제보를 받는 활동을 해온 아내는, 지금도 그와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며 직업병 문제를 알리고 있다.

지난 11월13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한 테드 스미스. 반도체 공장을 상징하는 방진복을 입은 대만과 한국의 안전보건 분야 활동가들과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를 알리는 선전전을 함께했다. ‘반올림’ 제공

지난 11월13일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한 테드 스미스. 반도체 공장을 상징하는 방진복을 입은 대만과 한국의 안전보건 분야 활동가들과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문제를 알리는 선전전을 함께했다. ‘반올림’ 제공

삼성반도체 문제 국제 서명 이끌어

미국에서 법률적인 문제를 해결하던 그는 기업의 끊임없는 이동에 주목했다. 기업들은 전세계에 공장을 만들었다. 노동자를 암에 걸리게 한 IBM 기업의 공정과 약품은 대만으로 이동했다. 대만에서 20년간 공단지역을 발암물질로 오염시킨 RCA 공장은 타이와 중국으로 이전했다. 한국이 일본에서 넘겨받은 원진레이온 인조섬유 기계는 이황화탄소 중독증으로 1천여 명의 환자를 만들어낸 뒤, 중국으로 옮아갔다. 

문제가 국제적이라면, 해결 또한 전세계에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테드는 ICRT 국제운동단체를 만들었다. 각국 노동자들의 피해 사실을 공유하고, 이것이 단지 국내 문제만이 아님을 알리는 자리를 마련하는 게 그의 일이었다. 이 활동을 통해 그는 한국이란 나라와도 인연을 맺었다.

3년 전 국제회의에 참가한 그는 한국 활동가들을 보게 된다. 한국 활동가들은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를 알리려고 홍콩까지 갔다. 반도체 산업에 종사한 노동자들이 화학물질과 방사선으로 인해 암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미국 전자산업의 중심지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해온 테드는 한국인들이 말하는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 이후 테드는 삼성반도체 직업병 문제에 대한 국제 서명을 이끄는 등 한국 활동가들과 교류를 계속해오고 있다.

“10년 전 새너제이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전세계 사람들이 왔다. 그때 우리는 한국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국제대회에 참석한 한국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의 상황을 안다. 우리는 아주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알아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그에게 40년간 활동을 해왔는데 지치지는 않는지 물었다. 그는 갈수록 더 많은 부당함을 보게 되고, 더 많이 분노하게 되고, 그래서 활동의 에너지가 커진다고 했다. 

마침 테드가 한국에 머문 날은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41번째 기일이었다. 기일에 맞추어 노동자들이 연 행사에 참여한 그는 들떠 있었다. ‘1%에 맞선 99%’ 문구가 적힌 옷을 입고, 반도체·전자산업 직업병 피해자들을 위한 선전전을 함께했다. 그는 김진숙의 한진중공업 크레인 고공농성으로 시작된 ‘희망버스’도 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한국 사람들의 역동적인 정치 참여는 놀랍다고.

특히 그는 한국에 사회문제에 관심 있는 젊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젊은이들의 열기가 자신을 고무시킨다고 했다. 나는 오히려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청년처럼 뛰어다니는 당신의 모습에 나를 비롯한 한국 사람들이 고무된다고 했다. 그는 좋아하면서도 젊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되받았다. 전자제품의 주 소비층이 젊은이들이기 때문이다.

국제 연계망 계속 만들 것

“젊은이들이 새 휴대전화, MP3, 텔레비전을 살 때 회사가 이 제품을 만들며 무슨 짓을 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다. 회사가 노동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그 회사 제품을 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중요하다, 부럽다를 연거푸 말하는 테드는 할아버지다. 심지어 보다 보면 왠지 유명 패스트푸드 가게 할아버지 캐릭터가 떠오른다. 잘 웃고 무엇이든 고개부터 끄덕여주는 그는 친근하다. 차분한 말투와 눈빛이 그를 나이대보다 젊어 보이게 했다. 그의 말에서 묻어나는 열의와 활기는 또래를 만난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는 젊었다. 

그에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물었다. 역시나 그는 하고 싶고 해야 할 것이 무궁한 20대 젊은이처럼 답했다.

“전세계 사회문제와 활동가들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국제적 연계망을 만드는 작업이다. 2주 전에 베이징 회의에 참가했다. 그곳 사람들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중국 기업들의 환경문제를 들었다. 그 정보를 한국에 와서 한국 활동가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10년 전보다 더 많은 국가가 참가하고 연결돼 있다. 더 많은 성과를 얻고 있음을 확신한다.”

희정 제2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자

*통역 이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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