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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용 | 조회 수 :29,119 | 댓글 :0 | 13-07-01 09:08

내동생 송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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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굉장히 착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속도 안 썪이고. 우리 집이 4남 2녀였는데, 아들로는 3째였다. 잠도 아버지와 잘 정도로 아버지 사랑을 제일 많이 받았다. 시골에서 진학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다 그쪽으로 선택을 했던 게 잘못된 거다. 가정 형편이 넉넉지 못했다. 형제들이 많다보니, 송면이까지 고등학교에 보낼 여력이 안됐다. 원래 인천 선원학교를 희망했는데, 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공고 쪽을 선택을 했다.

 

Q. 협성계공에 와서는?

A. 송면이는 기숙사에 있었다. 송면이가 또래에 비해 키도 컸고, 굉장히 건강했다. 우리가 농사를 지으니까 일도 제일 많이 잘 할 정도로 굉장히 건강했다. 크면서 아픈 것도 별로 없었고.

 

Q. 송면이가 아프다…

A. 12월 5일에 들어갔는데, 1월경부터 몸살기가 있다고 했다. 2월13일에 구로동에서 한의원에 가서 침 맞고 약을 3첩을 해서 먹였다. 회사를 결근하면서. 그런데 차도가 없었다. 그때 2월부터 시발이 되었다. 계속 몸이 안 좋다고, 감기기운처럼 쑤신다고 해 2월8일에 휴직계를 냈다. 2월10일에 중학교 졸업식이 있어 혼자 보냈다. 졸업식 하고 올라왔는데, 2월13일에 동네 한약방을 가고, 몸이 계속 안 좋아졌다. 구정이 2월 16일인가 17일이었는데, 명절 쇠러 누나와 송면이와 함께 시골에 갔다. 그때도 시골집에 가서도 누워있으면서 “저리고 아프다”고 했다. 구정 전날 갑자기 아침에 눈이 뒤집어지고 경기를 했다. 태안에 읍내에 있는 이외과에 갔다. 명절에 연휴라 동네의원이라, 큰 검사나 진단명 없이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연휴라 못 옮기고, 2월19일에 고대 구로병원에 갔다. 이외과에서도 경기하고, 저리고 쑤신다고 했다. 그때 나도 경기라는 걸 처음 봤다. 고대병원에서 검사하는데, 정확한 병명을 못 잡아내더라. 혈압이 190까지 올라가서 중환자실로 갔다가 혈압이 떨어져 안정되면 일반병실로 가고. 차도가 없어 3월5일에 퇴원했다.

(주위에서) 귀신이 씌었다고… 점집을 갔더니 조상이 잘 못됐다고 굿을 해야 한다고 해 그런 쪽도 해봤다. 더 차도가 없어서 3월9일에 더 악화되는 느낌이 있어 더 큰 데, 서울대병원에 가보자 해서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Q. 직업병이란 사실을 알기까지는?

A. 서울대병원에 입원해서 이런저런 검사를 하고 얘기를 하면서 담당 주치의였던 박희순 선생님과 면담을 하다, 15살 소아과로 들어갔는데, 진단을 못 내리니까, 공장에서 일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박희순 선생님이 의심을 갖게 되었다. 그분이 혈액과 모발을 여의도 카톨릭의대연구소, 내가 직업 혈액과 모발을 직접 갖다 주었다. 내가 몇 번 갔다 왔다 했다. 3월14일, 15일경에 수은과 구리 검출이 확인되었다. 수은은 직업병은 300 정도가 나와야 한다, 수은은 70, 구리가 정상인이 100인데 구리가 500정도 나왔다. 수은, 구리검출이 확인되었다.

 

Q. 병명을 알고 나서는?

A. 박희순 선생이 검사 결과를 보고, 직업병 쪽으로 의심을 해야 한다면서 구로의원 상담실을 소개시켜주었다. 4월에 처음으로 김은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산업재해신청을 하자고 했다. 산재신청서를 노동부 남부사무소가서 해보면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김은혜 선생님이 옆에서 도움을 주셨다.

 

Q. 문송면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A. 산재신청 서류를 노동부에서 자꾸 반려했다. 변호사를 선임할 능력이 안 돼 무료로 법률 도움을 받는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무료법률 도움을 신청했다. 무슨 날짜가 잡히면 회사 측에서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오고 자꾸 연기했다. 회사를 찾아가면, 그런 일은 전혀 없는 일이라며 콧방귀를 뀌면서 대응을 안 해줬다. 호소를 해도 결과가 없었다. 


김은혜 선배가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에 계셨던 박석운 소장을 소개해, 이 문제를 먼저 기사화를 먼저 시키자고 해 동아일보 임채춘 기자를 만났다. 동아일보에서 기사가 5월에 나왔다. 그때만 해도 박석운 소장님이나, 김은혜 선생님 정도였다. 4월부터 많이 악화됐다. 4월21일에는 서울대병원에 있던 박희순 선생님이 서울시립병원으로 전출을 가셨다. 다른 분이 담당했는데, 환청 들리고 헛소리를 하니까 정신과 병동으로 옮겼다. 4월에 생 이빨을 3개를 뽑았더라.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고 있었다. 일은 해결 안 되고.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언론화가 되면서 그때부터 주변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서서히 조금씩 알려졌다. 


Q. 무엇이 제일 힘들었나?

A. 이런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직업병이라는 자체를 몰랐으니까. 송면이는 송면이대로 고통스러워했고. 송면이 상태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빨리 직업병으로 치료를 받기 원했는데, 서울대병원은 지정병원이 아니라니까 빨리 처리되어서 직업병 전문병원으로 옮겼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게 안 되고 차일피일 미뤄지고, 회사는 회사대로 나를 박대하고. 그렇다고 남부사무소나 법률기관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업무적으로만 처리해서, 회사에서 ‘아니다’라고 하면 그게 시간이 자꾸 지연되었다. 어떤 진행이 없었다. 그러다 관심 있는 분들이 직업병으로 얘기하니까 그때 회사가 수긍을 조금 했을 뿐이다. 모든 게 계란으로 바위치기 식이었다. 나도 하나씩 알아가면서 싸워야했다. 모든 것에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경제적으로나 마음적으로나 힘들었다. 


Q. 사망하고 나서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A. 간신히 산재 인정을 받아서 6월29일인가에 카톨릭의대병원으로 이송을 했다. 그때 송면이 상태가 굉장히 안 좋았다. 보호자가 면회만 할 수 있고 같이 있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치료를 제대로 받았으면 했는데. 서지도 못할 정도로 몸이 약해져 있었다. 6월 말일 경에 호흡이 약해지고 응급상황이 자꾸 왔다. 그때그때마다 병원에서 전화 오면 내가 갔다. 7월2일, 밤에 또 위급한 상황이라고 전화가 왔다. 밤 12시경에 병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슴에 관을 꽂았더라. 호흡이 안 된다고 심장에 직접 관을 꽃았다. 그때도 말 한마디 못했다. 괜찮아지려니 하고 주물러주고 있었다. 새벽1시가 넘어가는데 내가 깜박 잠이 들었다. 송면이 침대에 팔 얹고. 2시 조금 넘었나? 간호사들이 “송면이가 숨을 멈췄다”고 얘기하더라. 나는 그 순간을 못 봤다. 


시골로 어머니랑 형제들한테 전화를 하고, 김은혜 선생님한테 전화를 했다. 깜짝 놀라셨다. 김은혜 선생님이 박석운 소장님 등 연결을 해서 영안실로 사람이 하나둘씩 모였다. 그러면서 이슈화되었다. 사망 당시에는 사회에서 관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송면이가 사망하고 나서, 한분한분 모이고, 언론화 하고 공론화 하면서 하나둘씩 관심을 가져주었다. 4월에 평민당도 가보고, 김종필 총재가 하던 공화당 가서도 도움을 요청해봤지만 그다지 큰 문제로 생각 안했다. 사무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상담해주는 정도였지 관심이 없었다. 송면이가 막상 사망을 하고 사회 이슈가 되면서 관심을 가져주었다. 그 전에는 김은혜 선생님이나 박석운 선생님 등 몇 분만 도움을 주였다. 


Q. 장례기간 중 일화가 있다면?

A. 장례위원회를 결성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일단,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서 장례를 못 치렀다. 영안실에 15일을 있었다. 그때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도 양길승 원장님 병원에 성수의원에 계셨다. 그 당시 아버지도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송면이 충격으로 아버지도 사경을 헤매셨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회사 측 사과가 있어야 했는데, 쉽게 해결이 안 돼 오랜 시간 영안실에 있었다. 매일 부딪히고, 회사로 노동부로 항의가고.... 해결점을 찾으려 했던 기간이 길어졌다. 해결이 안 되니까 참여가 더 늘어났다. 노무현 국회의원 통일민주당도 참여하고, 김근태 의원이 여의도성모병원에 고문후유증으로 입원해 있으면서 내려와서 용기를 주었다. 그때 의원이었던 노무현 의원도 관심 가져주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면서 회사 측과 해결되고 사과받기로 하면서 장례를 치렀다. 장례 이후에는 회사와 만난 적은 없었다.

 

Q. 합동추모제 처음과 지금의 모습, 어떤 변화가 있다고 느끼나?

A. 1주기 때는 장례에 참석했던 단체라든가 장례위원회에 소속했던 분들이 많이 참여해주었다. 잊지 않으려고 말씀도 많이 해주셨다. 해마다 가면서 한분, 한분 안보이기 시작했다. 자기가 속한 단체 활동도 해야 하고 바쁘시니까. 그런데 새로운 단체라든가, 그때 대학생들이 성장해서 보건의료인이 되거나 단체 활동을 하게 되면서 오고. 해마다 보고 싶은 얼굴은 많이 있다. 송면이를 마음속에서는 다 기억하겠지만, 보고는 싶다. 그때 워낙 15일이란 기간을 같이 밥 먹고, 같이 투쟁하고, 같이 얼굴을 맞대고…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때 함께 했던 분들, 보고는 싶다. 고인이 되신 노무현 대통령도 기억에 남는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발인할 때 오고, 영안실에도 왔다. 지금은 시장인 박원순 변호사도. 어제 서류를 보니까 89년 크리스마스 때 몇몇 분들한테 연하장을 보냈더라. 그때 연하장 답장이 왔던 분이 몇 분 있다. 박원순 시장이 “카드 보내줘서 고맙고, 네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고 말씀을 적었더라. 20년 이상이 흘러서 다들 많이 변했을 것 같다. 


Q. 1988년, 그때 요즘 같은 세상이었다면… 하는 점이 있다면?

A. 송면이 이전에 직업병 때문에 사망하거나 자살한 분들도 많이 계시다. 그 분들은 권리를 보장받지 못 했다. 송면이 일로 관심을 가지면서 이슈도 되고, 지금 세상은 노동자 권리를 많이 찾는다고는 한다. 그런데 아직도 대기업이라는 삼성에서 직업병이 나오는데도, 그 복지 좋다는 삼성이라는 대기업에서조차도 산재인정을 쉽게 안 해주고, 암으로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데도, 뒤늦게 해 나가는 거 보면, 아직도 있는 자와 없는 자, 노동자들이 기업에 기여를 하면서 자기 건강을 못 지키는데도, 기업주는 이익추구만 하는데 아직 급급하다. 세월이 변했어도 어디에선가는 직업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다치고 있고. 세월이 흘렀지만 100% 변하지 않았다. 가장 좋은 본보기가 삼성이다. 삼성은 최고 대기업인데, 그걸 인정 안 해주고. 가족들이 받는 고통, 노동자들의 고통과 사망, 그런 거를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낀다. 


Q. 문송면을 기억하는 분들에게 한 마디

A. 항상 보면 가족처럼 그리운 얼굴이다. 가족처럼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보면 반갑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게 항상 존경스럽다. 나는 죽음을 겪은 유가족이지만, 그분들은 유가족이 아닌데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점이 위대하고, 존경스럽다. 옆에서 같이했던 분들 한 분 한 분 다 소중하다.

7월, 이맘때만 생각나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도 같은데, 직접 겪은 가족과 나는 마음에 상처가 되어있다. 그게 울화병이라고 해야 할까? 욱 하는 화가 몸 안에 있다. 항상 그 일만 기억하며 살지는 않지만, 7월에 항상 그해가 되어서 송면이 산소에서 송면이를 같이 기억하기 위해서 오시는 분들 고맙다. 그 분들 죽을 때까지 존경하면서 위대한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들, 존경하면서, 위대한 영웅, 사명감을 갖고 그런 일을 하는 분들을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문송면, 원진노동자 산재사망 25주년 추모제 자료집에 실린 문송면군의 형 문근면씨와의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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