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시] 아직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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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시] 아직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에게

최예용 0 32852

아직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에게

- 문송면 열사 25주기에 바쳐 -

 

송경동 시인

어제는 아이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5년전인 1987년 지금 너와 같은 나이인 열 다섯 소년이 있었단다

충남 서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야간고등학교를 보내준다는 말을 믿고

영등포 수은주 만드는 공장엘 들어갔었지

두 달만에 손발이 마비되고 어지러워 일을 할 수 없었지

네 군데 병원을 찾았지만 병명도 알 수 없었어

마지막 찾아간 서울대병원에서 수은 중독이 밝혀졌지

하지만 산재 판정을 받기까지 또 몇 개월을 기다려야 했어

간신히 산재 판정을 받고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긴 지 삼일만에 운명했어

당시 보건의료운동을 하던 사람들과

양심이라는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소년을 지키려고 했지

송면이 죽고 얼마 후 구리시에 있던 원진레이온에서도 직업병 환자들이 나왔어

그곳은 이황화탄소였지

그 싸움은 길었어. 10년이 걸렸는데

직업병으로 판명 받은 사람만 1000여명이나 되었데

그 싸움의 결과로 생겨난 산재전문병원이 아빠와 기륭전자

콜트콜텍 삼성반도체 쌍용자동차 노동자 등이 입원해 있던 녹색병원이야

그러고보니 아빠도 문송면 열사 덕을 본 사람이네

그 투쟁 이후에야 수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산재 혜택을 받을 수 있었어

한 소년의 죽음이 한 일이었지

거기에서 추모시를 낭송하기로 했어

같이 가지 않을래

 

아이에게 차마 넌 행복한 줄 알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이 또래의 많은 친구들이 공장으로 팔려가기도 전에

자신의 삶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리는 시대

피아노를 좋아해 예술고를 가고 싶다는 아이에게

차마 꼭 너는 동료들을 이기고 합격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마침 여름 샌달을 사야한다는 아이를 데리고

W몰 건너편에 새로 오픈한 쇼핑몰을 갔는데

생각하니 그곳이 구로동맹파업의 근원지였던 대우어패럴 자리여서

그 이야기도 해주었다

1985년 이곳에 대우어패럴이라는 섬유공장이 있었어

대각선으로 있는 마리오아울렛 저 자리는 효성물산이었지

그 공장에 다니던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해방 이후 첫 노동자동맹파업을 일으켰었지

50명이 구속되고 2000명의 여성노동자들이 해고됐었어

그러고 보니 관호 너가 자주 다니는 하늘도서관 자리는

그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다니던 산업체특별학급 은일여상이 있던 자리야

이젠 모두 자본의 그늘 아래 지워져버린 자리들

아이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조마조마해 하며

가진 전 재산을 털어 여름 샌달과

예쁜 지갑 하나를 사주고 나오는 길

하필이면 뒷문으로 나왔는데

공교롭게 거기에 또 한 곳의 추억의 장소가 있었다

, 관호야 저기 건물 3층 보이지

저곳이 아빠와 엄마가 만난 곳이야

구로노동자문학회가 있던 곳이지

저기에서 아빠와 엄마가 젊은 시절 십수년을 살았어

 

잠시 뭉클하기도 하고

잠시 서늘해지기도 하는 길

아이와 돌아오며 내내 당신 생각을 했다

내일 당신에게 가서 무어라고 말해야 하나

희망이 많이 넓어졌다고 허세를 떨어야 하나

당신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안전해졌다고 공치사를 해야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강변해야 하나

수은처럼 싸늘하게 식어버린

내 젊은 날의 열정에 대해 고백해야 하나

이제 더는 변혁을 이야기하지 않고

일상의 안락에 중독되어 버린 우리의 가난함을 질타해야 하나

사실은 내 마음 속에도 뿌옇게 드리워져 버린

이 역사적 패배감을 드러내야 하나

이젠 이 복잡한 세상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조금만 고민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고

회로가 엉크러져 미쳐 버릴 것만 같다고

그렇게 죽어가는 나의 이성에 대해 실토해야 하나

산재가 그것뿐이겠냐고

이젠 인간과 자연이 사는 모든 시간과 공간과 관계가

저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 아니냐고

애써 얘기해야 하나

 

무어라고 얘기해야 하나

당신에게, 아직도 참혹한 이 세계를 무어라고 얘기해야 하나

경쟁이라는 중금속을 매일 스스로 내 몸에 주입하며

소비라는 환각제를 매일 흡입하며

실업이라는 수은을 빨아마시고

비정규직이라는 이황화탄소를 들이마시고

구조조정 정리해고라는 유기용제를 마시고

치솟는 집값 전세값 등록금이라는 독극물을 마시다

탈출구 없는 이곳에서

환기구 없는 이곳에서

날파리처럼 부대기다가

알아서 연탄불을 지피기도 하고

목을 매기도 하고 떨어져 죽기도 하며

자살이라는 최후의 안락을 마셔야 하는

이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적 죽음의 시대를

그런 비참한 인간 가족들 위에서

오늘도 끊임없이 무한증식해 가는

저 이윤이라는 자본이라는 권력이라는

저 거대한 욕망의 덩어리를

무어라고 얘기해야 하나

 

말 없는 당신에게가 아니라

아직은 말을 할 수 있는 나에게

이미 모든 생을 우리에게 주고 가버린 당신에게가 아니라

아직은 살 날이 많은 저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어라고 얘기해야 하나

어떻게 살겠다고 얘기해야 하나

여름 샌달과 지갑을 머리맡에 놓고

무슨 좋은 꿈을 꾸는지

잊을만하면 키득키득 웃으며 잠꼬대를 하는

아이 방을 몇 번이고 드나드며

세월이 흘러도 양철북처럼 키가 자라지 않는 당신께

참 쓸 수 없는 시 한 편을 쓴다

* 문송면, 원진노동자 산재사망 25주기 추모제 자료집에 실린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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