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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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면아!

최예용 0 32610

25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너의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 지곤 한다.

 

아버지가 아파 누운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지.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산업체특별학급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려고 서울로 올라 왔었지. 역사적인 6월민주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던 바로 그해 12, 중학교 졸업식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친구들과 함께 교감선생님 따라 와서 양평동 협성계공에 취업했었지.

온도계와 압력계 만드는 그 공장, 기계에서 칙-- 소리내며 새어 나오는 수은 증기와 유기용제에 중독되어 2달도 지나지 않아 어린 너의 몸이 그렇게 망가졌었지. 원인도 미처 알지 못한 채 병든 몸으로 고향집에 돌아갔지만, 몸은 점점 악화되어 갔었지. 자다가 갑자기 발작이 일어나서 동네병원에 가 봐도 그 원인을 알 수 없었고, 큰 병원과 대학병원까지 전전해 가 봤지만 무슨 병인지 밝혀내지 못했고, 당연히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었지.

 

시름시름 꺼져 가던 너의 생명과 너의 초롱한 눈망울을 보다 못한 집안에서 송아지를 팔아 만든 치료비를 들고 서울대병원 소아병동에 입원하게 되었지. 마침 소아병동에서 수련의 과정에 있던 젊은 의사 선생을 만나 비로소 "수은중독, 유기용제 중독"의 진단을 받게 되었지. 당시 20살 밖에 안 된 너의 큰형과 갓 군대 제대한 너의 친척 형들이 회사다 노동부다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산재처리를 호소하였지만, 노동부는 회사의 날인이 없다는 이유로 산재신청서 접수도 받지 않고 반려해 버리고 말았지. 또 법률구조공단 상담실로 변호사도 찾아가 봤지만 별 도리가 없었지. 도리어 회사측은 직업병을 진단한 그 의사선생을 찾아가 항의하고, 젊은 여성이었던 그 선생께 돌팔이라며 마구 행패를 부렸었지.

 

너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그 의사선생이 구로의원 산업보건상담실의 김은혜 선생께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해 와서 비로소 우리와 연결되었지. 당시 너의 큰형이 상담하러 와서는 서러워서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던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구나. 당시 신문기자로 일하던 학교후배에게 연락해 취재를 부탁했고, 우여곡절 끝에 동아일보에 너의 직업병 사례와 문제점을 폭로하는 기사가 조그맣게라도 실리게 되었지. 비로소 너의 직업병 피해 사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지. 그때서야 노동부는 역학조사를 시작했고, 40일 가까이 걸린 역학조사 결과 비로소 직업병으로 인정받게 되었지.

 

우리는 그때 "참 다행이다. 이제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게 되겠구나며 기뻐했었지. 그러나 그 안도의 한숨도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릴 줄은 그 때는 짐작도 못했었지. 당시 "국립" 서울대병원은 산재보험 지정 의료기관이 아니어서, 가난한 노동자의 산재보험 치료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 하는 수 없이 산재보험 치료가 가능한 '가톨릭의대 여의도성모병원'으로 전원할 수밖에 없었지.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너는 병원을 옮긴지 사흘만에 사망하고 말았지. 만일에 종전부터 치료받던 병원에서 계속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면 너의 죽음도 없었을 것이라며 울부짖어 봐도 너는 영영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버리고 만 뒤였지. 198872일 그날 새벽, 구로의원 상담실에서 철야작업을 하다가 너의 죽음 소식을 연락받은 김은혜 선생이 펑펑 울면서 내게 전화를 해 왔는데, 그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지. 차마 믿어지지 않고 도저히 실감나지 않는 소식이었지.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는 충격과 분노의 거대한 흐름이 그 새벽부터 시작되었지. "너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다시는 너와 같은 억울한 죽음은 없어야 한다"는 보건의료계, 노동계, 재야 각계의 정성이 모아지고 거대한 항의행동들이 진행되어, 16일만에 비로소 너의 장례식을 치를 수 있게 되었지. 

미처 피어나지 못한 채 저 세상으로 가게 된 너의 절절한 사연은 "산재 직업병 없는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세상"을 만드는 출발점이 되었지.

당시 송면이의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고, 제도 언론에도 적극 보도되었습니다. 군사독재 시절에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에 기반한 고도성장정책을 쓴 결과, 그때까지 산재직업병 사례 보도는 축소 은폐되기 일쑤였던 상황에서, 저녁 9TV뉴스에 직업병 사례가 보도된 것이 거의 처음이다시피 하였습니다. TV뉴스를 보고 원진레이온의 직업병 피해 노동자들이 "여기, 직업병 환자들이 또 있다."며 투쟁에 나섰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거동이 불편한 '중증 직업병 환자'들 본인이 직접 나서지 못하고 부인과 동생, 아들, 딸 등 그 가족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섰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피해자 조직 이름이 '원진직업병 피해자 및 가족 협의회(원가협)'으로 되었습니다. 그 여름,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 아래 직업병 환자들과 가족, 그리고 보건의료인, 노동자, 청년, 학생 및 각계 각층이 연대하여 투쟁한 결과 19889월 의미있는 첫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 때의 투쟁을 '1차 원진직업병투쟁'이라고 부릅니다. 1991137일간에 걸친 고 김봉환 동지 직업병 인정을 위한 장례투쟁이라는 '2차 원진직업병투쟁'1993년 원진레이온 폐업반대와 고용문제 해결을 위한 '3차 원진직업병투쟁'을 거치면서, 원진직업병 투쟁은 직업병으로 인정된 분이 총 943, 그중 사망한 분이 총165명이나 되는, 한국 산재직업병 피해와 투쟁의 상징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문송면 군의 죽음과 장례투쟁, 원진직업병 투쟁을 거치면서 우리나라 산재추방운동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25년이 지나는 동안 수많은 성과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산재직업병 상황은 참혹합니다. 여전히 OECD 국가중 산재사망율 1위라는 불명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하청노동자,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산재 직업병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더욱이 삼성반도체, 한국타이어 직업병 사례에서 보듯이 25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직업병 인정이 거부당하는 사례가 많은 실정입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우리들로 하여금 25년 전의 문송면, 원진직업병 사망의 추모를 넘어서 산재직업병 추방의 새로운 투쟁에 나서도록 추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를 계기로 이 땅의 산재직업병 추방을 위한 새로운 도약지점이 만들어 지기를 간절히 기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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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운 글, (당시 장례위원,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상임이사)

이 글은 2013년 6월30일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열린 문송면, 원진노동자 산재사망 25주기 합동추모제 자료집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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