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 규제완화 움직임..'국민안전' 공약도 후퇴?
최예용
0
9495
2013.09.28 15:07
박 대통령 "기업에 부담되지
않도록"... '자기부정' 비판
오마이뉴스 2013 9 27
| |
▲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대선 후보였던 지난해 9월 28일 전날 불산 누출사고가 일어난 경북 구미시 국가산업단지 휴브글로벌 공장을 찾아 현황을 듣고 있다. | |
ⓒ 조정훈 |
# 장면 1
1년 전인 지난해 9월 27일 경북 구미국가산업단지의 한 공장에서 불산 누출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5명이 숨졌다. 이튿날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전격 사고 현장을 방문해, 희생자 유가족들을 만나 눈시울을 붉혔다. 당선 이후 국민 안전을 주요 국정과제로 정하고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바꿨다. 박 대통령은 화학물질 사고에 대한 근본적인 예방 대책 수립을 강조했고, 환경부는 7월 종합 대책을 내놓았다.
# 장면 2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5일 제3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화학물질 등록·평가법'(화평법), '유해화학물질 관리법'(화관법)을 비판했다. 그는 윤성규 환경부 장관에게 "규제를 강화하는 기본취지는 이해하나, 민관협의체 등을 통하여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여 과도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면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있다, 좋은 취지가 시행과정에서 기업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달라"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초 국민 안전을 국정과제로 선정하면서 화학물질 안전관리를 강조했지만, 기업들의 거센 반발에 정책 후퇴를 선언했다. 복지·경제민주화 분야의 공약 뒤집기에 이어 국민안전·환경 분야에서도 정책 후퇴가 가시화됨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의 '자기 부정'에 대한 비판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 대통령이 화학물질 사고에 대한 국민 우려가 큰 상황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된 법안에 대해 '악마'라는 단어를 거론한 것에 대한 비판도 크다. 화학물질 사고를 막기 위한 두 법안은 지난 4~5월 압도적인 찬성률로 국회를 통과했고, 현재 환경부가 시행령을 마련하고 있다.
화평법 대표발의자인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를 포기하고 복지정책을 후퇴시키더니, 안전국가를 천명했던 사실을 잊고 국민의 안전을 뒷전으로 미룬 채 '재벌의 천사'가 됐다"고 비판했다.
잇단 사고에 화학물질 관리법 통과했지만...
지난해 9월 경북 구미에서 불산 누출사고가 일어난 데 이어 올해 삼성전자 화성공장 등지에서 여러 차례 화학물질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또한 가습기 살균제로 127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공론화되면서, 화학물질 사고에 대한 국민 불안이 확산됐다. 국회에서는 화학물질 관리를 위한 법 제정에 나섰다.
심상정 원내대표는 4월 화평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기존 환경부가 의견수렴을 통해 마련한 법안과 묶여 여야 합의로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법제사법위원회 새누리당 의원들이 기업 부담을 줄이는 쪽으로 법안을 수정했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 등 화학물질 사용업체의 화학물질 사용 보고 의무가 삭제됐다. 심상정 의원실 관계자는 "'누더기법'이 됐지만, 법 통과를 위해 양보했다"고 밝혔다.
결국 화평법은 4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재석 의원 201명 중에서 197명이 찬성했다. 이 법에 반대한 의원은 없었고, 4명만 기권했다. 야당 의원들이 제출한 화관법 역시 법사위 새누리당 의원들에 의해 누더기가 된 채 5월 7일 국회에서 통과됐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김상민 새누리당 의원은 "과연 국가와 기업이 국민의 안전과 생명보호를 제일 가치로 여기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두 법이 당초보다 후퇴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화학물질 사고를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화평법은 화학물질을 제조·수입·판매하는 회사가 신규화학물질이나 연간 1톤 이상 사용되는 기존화학물질을 환경부 장관에게 매년 보고하고, 그 화학물질의 유해성·위해성 정보를 등록하도록 했다. 화관법은 화학물질 사고 시 매출액의 최대 5%까지 과징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5년 시행되는 두 법에 서명한 뒤 공포했다. 환경부는 7월 5일 화학물질 안전관리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화학물질 사고가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 재계 반발에 '법 흔들기'
| |
▲ 지난 1월 28일 1명이 숨지고 4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경기도 화성 삼성전자 화성사업사업장 불산 유출 사고 현장. | |
ⓒ 연합뉴스 |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최근 '화평법·화관법 흔들기'에 나섰다. 박 대통령이 25일 특정법을 겨냥해 '악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박 대통령은 "환경규제는 입지규제 다음으로 기업 투자에서 많은 애로를 호소하는 분야다, 국민안전과 환경보전을 위해 규제가 불가피하다 해도 그것이 가져올 파급효과 분석은 치밀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또한 "규제의 설계 단계는 물론이고 시행 이후에도 산업계 의견을 꾸준하게 충분히 수렴해 기업부담을 줄이면서도 입법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누리당과 환경부도 24일 당정협의를 갖고, 화평법·화관법 시행령에서 규제를 완화하기로 합의했다. 화관법의 5% 과징금 규정은 고의적·반복적인 사고를 낸 곳에만 적용하기로 했다. 또한 일부 신규화학물질 보고·등록 규정을 완화하기로 했다.
국정목표인 국민안전이 우선 순위에서 기업 부담 줄이기에 밀린 셈이다. 이는 기업들의 큰 반발 때문이다. 지난달 12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단은 화평법과 통상임금 범위 확대 등을 언급하며 "기업 현실에 맞지 않고 투자나 일자리 창출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앞서 전경련 등 경제5단체는 2일 국회와 정부에 제출한 건의문에서 화평법·화관법의 완화를 요구한 바 있다.
심상정 대표는 화평법·화관법 완화 움직임에 대해 "화평법은 법안심의과정에서 환경부·지경부 등 관련 부처와 수차례 협의조정을 거쳐 본회의에서 국회의원 98% 찬성으로 통과된 법"이라며 "특히 화평법은 지난해와 올해에 거쳐 지속적으로 발생된 화학사고로 인해 많은 인명이 희생된 데 대해 국민안전을 위해 그동안 정부가 방치해 놓은 화학물질 안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계와 산업계는 국제적 기준에도 못 미치는 미흡한 제도임에도 화평법을 기업을 죽이는 법안이라고 흔들어 왔다"면서 "국민의 생명을 존중하는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라는 기업윤리를 요구한 법을 박근혜 대통령은 악법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보다 기업 이윤의 손을 들어준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