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시마에서 온 유리카 이야기
“안녕하세요. 아베 유리카입니다.” 3월 9일 환경연합에서 만난 열두 살 소녀는 수줍어했지만 또박또박 한국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아이 손을 꼭 잡은 아베 사유리 씨도 서툴지만 한국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유리카는 유치원 때부터 지역 내 NPO를 통해 한국어를 배웠다. 일 년에 한 번은 한국을 찾아 한국 친구들과 만나기도 한 터라 이들 모녀에게 한국은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번 방문은 이전 방문들과는 다르다. “한국은 가까운 나라입니다. 내가 겪고 느낀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아 오게 됐습니다.” 아이 손을 꼭 잡은 아베 사유리 씨는 담담하게 지난 일년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들려주었다.
“살기 위해 떠나야 했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유리카와 함께 슈퍼에서 장을 보고 있던 아베 사유리 씨의 몸이 흔들렸다. 이내 땅이 심하게 흔들리고 선반에 있던 물건들이 떨어졌다. 지진이 난 것이다. 지진이 잠잠해진 틈을 타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지진으로 가스도 전기도 물도 모두 끊긴 상태였다. 텔레비전을 볼 수 없으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피해는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단순한 지진이라고 생각하고 하루를 보냈다.
3월 12일 라디오를 듣던 남편의 표정이 굳어졌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1호기가 폭발했다. 위험하니 언제든 피난을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싸두라.’는 것이었다. 당장 아이에게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씌우고 밖에 나가지 말라고 일렀다. 하지만 당장 마실 물과 먹을거리, 가스를 구해야 했다. 이미 슈퍼 밖으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3~4시간을 기다린 끝에야 물과 먹을거리를 구할 수 있었다.
이틀 후 전기가 들어왔다. 텔레비전을 보고서야 그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됐다. 쓰나미와 핵발전소 1호기의 폭발. 공포심과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14일, 3호기마저 폭발했다. 3호기는 플루토늄이 들어있는 핵발전소였다. 심장이 멎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녀가 살던 곳은 사고가 난 발전소와 60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강제피난지역은 아니었지만 가족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결심했다.
하지만 당장 피난을 떠날 수 없었다. 차로 이동을 해야 하는데 당장 석유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몇 시간씩 줄을 서고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석유를 구해야 했다. 3월 16일,겨우 10리터의 석유를 구한 끝에, 드디어 피난을 시작했다.
가급적 핵발전소 사고가 난 지역과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떠나야 했다. 정보에 따르면 도쿄는 위험 하다고 했다. 일단은 야마가타로 이동을 했다. 남편이 다니는 회사 본사가 있고 남편 직장동료의 고향이라 머물 곳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틀 후 후카이도로 이동했다. 하지만 남편은 다시 후쿠시마로 돌아가야 했다. 살던 곳이 강제피난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편은 일터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모녀의 피난은 계속됐다. 최대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 지인의 집을 전전했다. 무엇보다 살기 위해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게 중요했다. 5월 10일 키타카타시, 7월 26일 오키니와, 8월 25일 교토시로 이동해 현재까지 교토시에 머물고 있다. 교토시에서 강제 피난민뿐만 아니라 자발적 피난민에게도 시립임대아파트를 무료로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곳엔 이들 모녀와 같은 피난민 50여 가구가 입주해있다.
핵발전소 사고 피해는 이제 시작
피난을 하는 동안 유리카도 학교를 세 번이나 옮겼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친구가 생길까, 이지매를 당하지 않을까, 새로운 학교에 대한 불안감이 가장 컸어요.”라는 유리카. 그래도 아이는 부모님 걱정하실까 싫은 내색 없이 씩씩하게 학교를 잘 다녀줬다.
사고 후 1년이 지났지만 예전 같은 생활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남편과는 한 달에 한 번 만날 뿐이다. 아베 사유리 씨는 수시로 방사능 수치를 확인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자발적 피난이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처지라 경제적인 부담도 크다. 교토시에서 아파트를 무료로 제공받고 있지만 관리비와 생활비는 본인 부담이다. 방사능오염 때문에 일본산 식재료는 피해야 하고 중국산은 농약 걱정 때문에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식재료는 평소에 2~3배 비싼 가격을 치러야 한다. 현재 교토에 머물고 있지만 임대 계약기간(2년)이 끝나면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한동안은 후쿠시마로는 돌아갈 수 없다. 무엇보다 아이 건강이 가장 걱정이다. “사고 첫날 물건을 사기 위해 밖에서 한참을 기다렸잖아요. 그땐 아무 것도몰랐지만 그 사이 피폭된 것을 나중에야 알았어요.”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을 버리고 갔다는 죄책감과 피난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미안함도 있다. “60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라고 해도 방사선량이 높아요. 방사능이 0.5마이크로시버트 넘으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어요. 예전에 살았던 곳이 0.7~0.9마이크로시버트가 측정되고 있어요. 명백하게 위험한 지역임에도 정부와 회사는 괜찮다는 말만 해요.” 그녀는 더 이상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벌써부터 코피가 멈추지 않고 재채기 멈추지 않는 등 건강상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고 해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좋지 않죠.” 남아있는 이웃들, 남편 걱정에 눈물이 흐른다.
“솔직히 전에는 핵발전소에 관심이 없었어요. 왜? 정부가 핵발전소는 안전하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사고 후 시민들은 180도로 바뀌었어요. 핵발전소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 알아요.
유리카 “어른들에게 묻습니다”
후쿠시마 1년, 아직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고 유리카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날 이후 전세계는 일본의 참상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며 탈핵을 선언하거나 핵발전소 계획을 유보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나라, 한국은 핵발전소를 더 짓겠다며 신규 부지를 선정해 발표했다. 이 같은 소식에 아베 사유리 씨는 그 누구보다 분노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지금도 비참하게 사고가 계속되고 있는데 우리가 겪은 일을 왜 한국도 반복하려고 하나요? 고향도 버리고 친구를 떠나서, 가족이 다 뿔뿔이 흩어지고 생명의 위기를 느끼고 사는
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믿을 수가 없어요. 절대 반대합니다. 부디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세요.”
3월 10일 다시 만난 유리카는 시청광장 무대에 섰다. 그리고 또박또박 한국말로 어른들에게 물었다. “저는 원전사고 때문에 방사능을 뒤집어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는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요? 제가 결혼할 수 있을까요? 제가 건강한 아가를 낳을 수 있을까요?”
출처; 월간 함께사는길 2012년 4월호, 글쓴이 박은수 기자 ecoactions@kfem.or.kr
<사진, 2012년3월10일 서울시청앞에서 열린 행사에서 한국시민들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아베 유리카, 함께사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