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밀양엔 외부세력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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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밀양엔 외부세력이 절실하다

최예용 0 5660

엄기호 | 덕성여대 강사·문화인류학

서울은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남쪽에는 순전히 서울 관점에서뿐인 이 장마가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분들도 있다. 밀양의 주민들이다. 조환익 한국전력 사장이 “7월 장마철에는 공사 재개가 없다”고 말했다지만, 이 말을 8월이 되면 공사를 재개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주민들은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공사가 재개되면 송전탑을 반대하는 주민들은 다시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이 폭염에 산을 올라야 한다. 현장에 있는 활동가들은 공사가 재개되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가장 겁난다고 한다. 이미 작년 6월 폭염에 공사를 반대하던 60이 넘은 어르신 세 분이 실신해서 병원에 이송됐고 올해 5월에도 30여명의 주민들이 병원에 이송됐다. 이계삼 송전탑대책위 사무국장은 나와 주고받은 e메일에서 자신이 이 싸움을 하는 이유를 “그저, 우리가 빠지면 쌍용차처럼 어르신들이 계속 집단우울에 빠져 세상을 버릴 것 같다는 공포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계삼 선생의 메일을 받고 마을 주민분들이 쓴 탄원서를 읽어보았다. “송전탑이 들어서면 조상님에게 죄가 되는 짓 같아 아주 죽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요대로만 살고 싶습니다” “온 식구 배 곯아가며 손바닥만 한 땅 평생 일궈 영감 할멈 이제 맘 편히 살아보려 했는데… 지금 남편은 병이 들어 어디로 가서 살 데도 없습니다”…. 마을 주민들의 탄원서에 하나같이 등장하는 말이 있다. ‘옛날처럼 이대로만 살고 싶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말이 그것이다. 한 할머니는 심지어 송전탑 문제가 해결되면 “농사도 안 지으면서 조용히 살고 싶다”고까지 했다. ‘여기’가 없다면 자기들도 없다는 절박한 호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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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렐프가 쓴 <장소와 장소상실>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나치 독일에 의해 파괴된 체코의 한 마을의 여성 이야기다. 이 여성은 전쟁 때문에 남편이 죽고 아이들과도 이별했지만 자신에게 가장 큰 충격은 언덕에 올라가서 보게 된 폐허조차 남지 않은 마을 풍경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장소의 파괴는 곧 존재의 말살이다. 렐프의 말을 따른다면 송전탑은 마을 주민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경험이 발생하는 곳”인 ‘여기’를 앗아간다. 평생을 ‘여기’에서 살아왔는데 ‘여기’를 버리고 다른 데로 가라는 것은 주민들의 ‘평생’을 말살하는 일이다. 내가 평생을 산 ‘여기’를 잃고서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가.

아마도 이 고통은 말로 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닐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 자체라기보다는 그 고통을 함께 겪거나 공유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라고 한다. 주민들의 탄원서를 보더라도 말할 수 없다는 고통과 몸부림이 느껴진다. 누구도 내 고통에 귀기울이지 않고, 누구에게도 내 고통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죽는다고 했다. 고립과 외로움이란 곧 세계의 파괴이며 그 결과는 죽음이다. 이미 이것은 현재 진행형이다. 보건의료단체의 조사 결과는 주민의 40% 이상이 이미 심각한 수준의 불안·공포·우울을 경험하고 있으며 자칫하면 파국적 감정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렇기에 이계삼 선생은 지금 밀양에 필요한 것은 ‘외부세력’이 부단히 마을 주민들을 만나고 호소를 들으며 고립감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몸부림을 쳐도 뜻이 전달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은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단지 그들 곁에 서 있음으로써 침묵이라는 말 이전의 말로 그 고통을 공유하는 것이 주민들과 새로운 ‘여기’를 만드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다행인 것은 이 ‘여기’를 지키고 만드는 일에 나서는 ‘외부세력’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영남지역 건설노동자 100여명이 지난 25일 한전 밀양지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송전탑 공사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밀양시장은 외부세력의 개입을 경고했지만, 고립을 넘기 위해서는 ‘외부’가 필요하다. 생명을 잇는 그 외부세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경향신문 2013년7월30일자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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