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주의 세상탐사] 치에코 할머니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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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주의 세상탐사] 치에코 할머니와의 만남

최예용 0 5253

치에코 할머니는 올해 예순다섯이다. 지난 3일 부산석면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부산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 석면피해자 워크숍에서 처음 만났다. 워크숍에서 발언하거나 발표하는 사람들의 말을 열심히 받아 적는 필자와 달리 그는 붓을 들고 스케치북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워크숍이 끝난 뒤 스케치북에는 그가 2~3분 만에 뚝딱 그린, 하지만 발표자들의 특징을 잘 잡은 캐리커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마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나중에 그로부터 캐리커처 선물을 받았던 것 같다. 그날 저녁 뒤풀이 때 나의 발표 모습이 담긴 자그마한 손부채를 받았다. 기자 출신인 나는 호기심이 발동해 그를 인터뷰했다.

그는 일본 센난시 석면방직
공장 피해자 일행과 함께 한국에 왔다. 한살 연하인 남편 나카무라 노부오씨도 함께 왔다. 이날 노부오씨는 소개 때 하시모토 일본 유신회 대표 겸 오사카시장의 위안부 관련 망언을 한국 쪽 참석자들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는 하시모토의 발언에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지난 5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고문방지위원회를 찾아가서도 하시모토를 규탄했다고 한다.

치에코 할머니는 그림을 통해 인권옹호 활동을 펴왔다. 국민구원회 임원인 남편과 함께 재판방청 등을 하며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재판정에서 그림을 그려왔다. 10년 전에는 '그림엽서의 건배'라는 책도 펴냈다. 2009년 석면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 요즘에는 그들과 함께한다고 했다. 그래서 '국가배상소송을 승리로 이끄는 모임'의 간사도 맡았다.

그의 활동과 개인
전시회는 일본의 텔레비전방송과 아사히신문에도 소개된 바 있다. 지금까지 무려 4000명이 넘는 인물을 그려왔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인물의 순간 움직임 등을 포착해 3분이면 손바닥만한 크기로 그려내는, 솜씨 좋은 그림편지 작가가 됐다.

사진 찍을 수 없는 재판정에서 그림을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고령
사회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를 떠올렸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고령사회인 일본을 재빠르게 뒤쫓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노인들은 대부분 그저 경로당에서 화투를 치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아니면 인근 공원에 가 무료하게 시간을 때운다. 몸이라도 건강한 사람은 등산을 하거나 돈이 들지 않는 전철을 타고 바람을 쐬곤 한다. 치에코 할머니처럼 그런 활동을 하는 노인들은 보기 드물다.

치에코 할머니와의
만남을 통해 내가 걸어야 할 미래의 삶, 그리고 우리나라 노인들이 당장 실천해야 할 삶의 모습을 보았다. 물론 그들 부부처럼 일 년에 몇 차례씩 외국을 다니려면 재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그런 활동을 하는 데는 돈이 큰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치에코 할머니는
취미생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지금은 미술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도 한다고 했다. 모든 인간에게는 재능이 있다. 프로 가수나 운동선수처럼 뛰어난 재능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치에코 할머니도 뛰어난 화가는 아니지 않은가.

작가나 기자와 같은 글 솜씨를 꼭 지녀야 할 필요는 없다.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자격증이 꼭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작은 돌이나 큰 돌, 모난 돌이나 둥근 돌 모두 쓸모가 있듯이 모든 인간은 세상에 쓸모가 있다. 29만원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온갖 호사를 다 누리는 어느 전직 대통령보다 보통 노인들이 더 소중하다.

우리 곁에 치에코 할머니와 같은 노인들이 많아질수록 건강한 고령사회, 나아가 초고령사회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각 노인들의 깨어남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런 노인들이 많이 나오도록 노인복지를 강화하고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와 사회적 분위기도 중요하다.

노인들 재능 발굴해 사회적 활용을
최근 돈이 있고 여유도 있는 노인들은 1년에 몇백만원씩 받고
대학들이 앞다퉈 운영하고 있는 평생교육원이나 최고위과정에 등록해 미래의 삶을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될 지식을 쌓고 친교를 나눈다. 보통 노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정부와 지자체, 국민
건강보험공단, 국민연금관리공단, 노인인력개발원 같은 준정부기관들이 나서서 우리 노인들이 가진 재능을 끄집어내고 이를 키워야 하지 않을까. 다양한 재능을 지닌 노인들이 엔지오단체나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보기 좋은 그림을 그려본다. 우리 사회에서도 치에코 할머니와 같은 노인들이 많아져야 한다.

내일신문 안종주 정기칼럼, 2013년 6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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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나카무라 치에코 선생이 일본 오사카 센난지역의 석면피해자와 그들의 활동상을 그린 엽서그림들입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산업보건운동가 스즈키 아키라 선생의 도움으로 저자에게 요청하여 스캔받은 그림을 소개합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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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사진들은 부산에서 열린 한일석면피해자워크숍에서 찍은 것들이다.

치에코할머니가 즉석에서 그린 그림이 회의장 전면에 붙어있고, 쉬는 시간 회의장 밖에서 치에코 할머니가 한국 석면피해자를 그림으로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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