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피해' 옥시 출연금 50억원 낮잠
2019-02-20 한국일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대상으로 옥시레킷밴키저가 출연한 기부금 50억원이 5년 가까이 정부의 통장에 남아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옥시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인도적 기부금’ 형태로 출연했는데, 피해자들이 수령을 거부한 이후 지금까지 기부금의 운용을 결정할 운영위원회가 흐지부지됐기 때문이다.
19일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 2014년 3월 옥시가 가습기살균제로 폐손상을 입은 피해자들 위해 출연한 기금 50억원은 환경부 산하기관인 한국환경보전협회 통장에 정기예금형태로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 옥시는 환경부, 환경보전협회와 협약을 맺고 보전협회에 원인 미상의 간질성 폐질환 환자들과 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부하며 운영위원회를 만들어 피해지원대상을 정하고 기금을 배분하기로 했다. 협약서에 기금은 법률적 문제와 법적 책임과는 무관하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옥시가 공식적으로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자칫 합의를 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판단에 기금 수령을 거부하면서 기금 배분은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2014년 7월 정부의 구제급여와 2017년 8월 가습기살균제를 생산한 기업들의 자금에 정부자금이 더해진 1,350억원의 특별구제계정을 통해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보상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정부와 피해자단체들의 관심이 구제급여와 특별구제에 쏠리면서 옥시가 출연한 기금 사용 방안 논의는 후순위로 밀리면서 지금까지 협회 통장에 남아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기부금을 운영할 운영위원회를 이제 와서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또 피해자 간에도 피해 인정 범위와 배분 방식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는 점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정부도 집행하지 못한 50억원을 파악했다”면서도 “전문가와 피해자로부터 특별구제 기금 1,350억원 중 집행한 게 224억원에 불과한 상황에서 특별구제계정부터 빠르게 지원하는 게 우선이라는 지적을 받은데다 마땅한 방법도 없어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는 피해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기금을 방치해서는 안된다고 보고 있다. 다만 피해자가 계속해서 발생하고 증가하는 만큼 피해자 범위를 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보고 생활용품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을 위한 재단을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김기태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공동운영위원장은 “협약서에 잔여기금은 폐질환 환자에 대한 고충상담 치유프로그램이나 의학 연구 등에 사용된다고 되어있는 만큼 관련 단체를 만드는데 사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당사자(폐질환 4급)인 조순미(50)씨도 “분명히 피해자들을 위해 쓰여지긴 해야 하는데 어떤 방향으로 써야할지 입장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 있을 것”이라면서도 “더 이상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와 재발방지를 위해 사용됐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