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주원료 10년 전부터 ‘흡입 독성’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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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주원료 10년 전부터 ‘흡입 독성’ 경고

최예용 0 6291

경향신문 2013년 7월13일자

 

ㆍSK, 물질안전보건자료 명시… 제조사, 원료 구입때 인지 정황
ㆍ환경부 “당시
과학 기술로 알 수 없었다”는 면책 주장도 틀려

“제조업자가 당시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결함을 알 수 없었을 경우, 책임이 면책되는 조항이 있다. 현대 과학기술로도 알 수 없는데 그걸 어떻게 막느냐.”

윤성규 환경부 장관이 지난달 18일 기자들과 만나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 사태에 대해 한 말이다.

윤 장관은 그러면서 “신상품 출시 당시 과학기술로 안전문제 발생 여부 등을 알 수 있다면 출시 못하도록 막는 게 맞지만, 그렇지 않은데 책임지라고 하면 인류문명이 발전을 못한다. 그걸 가지고 정부부처가 판단할 수 있었는데 안 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억울한 듯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를 구제하는 데 정부가 나서는 것이 곤란하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둘러싼 실제 상황은 “당시 과학기술로 알 수 없었다”는 가정과 완전히 다른 것으로 12일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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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가습기 살균제 제품인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 뉴 가습기 당번’의 제조업체인 한빛화학이 이 제품의 주원료인 PHMG의 독성 자료를 갖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온 것이다. 국내 화학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이 업체에서 가습기 살균제 공정을 살펴보면서 PHMG의 자료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라고 불리는 이 자료에는 분명히 ‘먹거나 흡연하지 마시오’라는 경고 문구가 있었다.

그렇다면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들은 언제부터 제품 원료를 흡입해선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이 의문점은 12일 진보정의당 심상정 의원실이 일부 공개한
호주 정부기관의 보고서로 풀 수 있다.

보고서를 보면 PHMG를 국내에서 생산한 SK 측은 이 원료(제품명 스카이바이오 1125)를 호주에 수출하기 위해 호주 법에 따라 제품의 독성정보를 호주의 정부기관에 제공했다. 호주 정부기관인 ‘국가산업화학물질 신고평가기관(NICNAS)’은 2003년 SK 측의 자료를 토대로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에는 PHMG는 흡입독성이 있으며 상온에서 분말 형태로 존재하는 PHMG가 비산돼 호흡기로 흡입될 경우를 대비해 노동자는 보호장비를 갖추고 작업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SK케미칼도 “과거 PHMG를 생산, 공급하면서 흡입을 경고하는 내용이 포함된 MSDS를 제공했다”고 설명했다. 2003년 전후로는 SK 측도 이 원료의 독성을 알고 있었으며 이 사실을 MSDS에 표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소한 2003년 이후에 SK케미칼에서 제조한 PHMG를 사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었다면, 흡입독성 경고문이 들어간 MSDS도 확인했다고 봐야 하는 셈이다.

윤 장관의 ‘과학적으로 알 수 없었을 수 있다’는 논리가 틀렸다는 사실은 공정거래위원회가 옥시레킷벤키저에 내린 과징금 심판례를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공정위는 지난해 “옥시레킷벤키저는 자신이 판매하는 가습기 살균제에 대해 객관적 근거 없이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하여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사실과 다르게 허위·과장 표시를 했다”면서 과징금을 물었다. 당시 심판례를 보면, 공정위는 ‘허위 과장성 여부’ 항목에서 이 제품에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 이미 오래전에 드러났음을 보여주는 근거를 나열했다.

공정위는 심판례에서 “이 사건 제품의 원료공급자인 (주)SK케미칼이 작성하여 피심인 회사(옥시레킷벤키저) 등에 제공된 물질안전보건자료에 이 사건 제품의 주성분을 포함하고 있는 SKYBIO 1125(PHMG)를 유해물질로 분류하여 이 제품을 먹거나 마시거나 흡연하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고 적시한 것이다. 공정위는 이어 “호주 보건부의 2003년 공고에서도 SKYBIO 1125의 구성원료인 PHMG phosphate에 대하여 ‘분진 형태의 당해 물질의 흡입위험은 상당하다’고 보고돼 있다”고 적었다.

결국 가습기 살균제가 대량으로 팔려나가기 시작한 2000년대 초반부터 제조업체는 독성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여러 자료를 통해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는 동안 공산품 안전관리를 맡고 있는 산업통상자원부 기술표준원은 자신들이 관리하는 공산품 목록에 ‘세정제’만 있을 뿐 ‘가습기 살균제’는 없다는 이유로 안전성 등을 확인하지 않았고, 가습기 살균제는 아무런 정부기관의 ‘거름장치’ 없이 팔려나갔다. 일부 제품은 스스로 ‘세정제’로 품목 허가를 내줬으나 가습기 살균제로 팔려나가고 있었는데도 이를 점검하지 않았다. 호주가 해당 원료를
수입하면서 안전성을 확인해 공개한 것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는 사실은 남아 있다. 옥시 측이 과연 흡입독성 내용이 들어 있는 PHMG의 자료를 확인하지 않았느냐는 점이다. 옥시는 공정위 측에 자신들은 위해성 정보를 담은 이 안전자료의 내용을 몰랐다고 주장했으나 공정위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과징금을 매겼다.

아울러 SK케미칼이 PHMG 제품을 “물티슈나
부직포 등의 살균제 용도로만 판매했고 가습기 살균제 제조와 관련된 업체에 판매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의아한 점이다. 공정위 심판례에는 옥시의 가습기 살균제 주원료가 SK케미칼 것임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SK 측은 “직접 가습기 살균제 업체에 판 적은 없지만 (화학제품) 판매대리점에 판 사실은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빛화학 등 제조업체들이 판매대리점을 통해 PHMG를 사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제품을 주문제작한 옥시 등 제조·판매사들의 책임은 진상이 규명될 필요성이 더 커졌다. 2011년 질병관리본부가 PHMG를 유해물질로 ‘지각 지정’할 때까지 입을 닫았던 정부와 제조사들이 말을 해야 할 상황이고, 어느 경우든 직간접적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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