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믿고 가습기살균제 쓰다가, 1억빚지고 가정박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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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믿고 가습기살균제 쓰다가, 1억빚지고 가정박살나”

최예용 0 6716

24일 오후 1시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10명이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로 들어섰다.

“항의서한마저 전달하지 못한 채 여기저기서 쫓겨나기 일쑤”였던 과거와는 달랐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참석 중이던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과 면담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는 진 장관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피해자들은 바로 원인도 모른 채 가족을 잃거나 폐를 이식하며 삭여왔던 고통을 토해냈다. 직장을 잃고 빚에 눌려 살거나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살아야 했던 얘기도 쏟아졌다. 진 장관은 일일이 받아 적으며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장관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범정부 차원의 요구에는 난감한 표정을 짓거나 “국무총리실을 통해 다른 부처와 논의하겠다”는 원론적 답변을 반복했다. 부처 간 조율로 정부 차원의 종합대책을 짜기 전에는 피해조사나 보상이 쉽지 않을 것임을 이날 만남에서도 보여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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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2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영 보건복지부 장관과 만나 피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책상에는 피해자들이 먹고 있는 약들이 놓여 있다. | 김영민 기자

 

가습기 살균제로 폐가 망가져 이식을 한 김성태씨(40)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제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면서 테이블 위에 쌓아놓은 약들을 가리키며 “이것이 모두 제가 먹는 약들”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수술과 약값으로) 1억원 정도 빚졌고 가정도 박살나게 생겼다”면서 “정부가 믿고 쓰라고 한 것을 쓰다가 이렇게 된 것”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11살 된 아들 임성준군을 휠체어에 태우고 온 권미애씨는 “아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았다. 작년까지는 목에 산소호흡기를 꼈고 지금은 코에 낀 상태”라고 진 장관에게 설명했다. 권씨는 14개월 된 아들의 폐에 문제가 생겨 원인도 모른 채 치료받다가 2011년 정부의 발표를 보고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손상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임군은 학교도 다니지 못한다고 했다.

30개월 된 딸을 원인미상 간질성
폐렴으로 잃은 장동만씨(48)는 “우리의 고통을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아이를 잃은 뒤 아내마저 같은 질병으로 2011년 아산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시킨 그는 그곳에서 똑같은 증상의 환자들을 만났고 이들과 함께 질병관리본부에 조사를 의뢰해 역학조사 대상이 됐다고 했다. 그는 “아이를 보내고 아내까지 아프면서 직장도 그만둔 상태에서 2억원이 넘는 돈을 써야 했다”고 털어놨다.

피해자들은 얘기 도중 ‘아이에게 사용해도 안전하다’고 적힌 한 가습기 살균제를 들어 보였고, 장관은 이를 건네받아 제품에 쓰인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기도 했다.

피해자들은 우선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중증환자들과 유가족들부터 긴급 의료지원과 생활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1년간 피해자 신고를 받은 뒤 출범했다가 정부로부터 추가조사를 거부당해 중단된 민관합동 폐손상조사위의 조사를 재개해줄 것을 희구했고, 범정부 차원의 피해자 대책과 문제의 제품을 만든 기업에 대한 책임 규명과 처벌도 요구했다.

진 장관은 이 자리에서 폐손상조사위 재가동 계획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범정부 차원의 피해 대책 등에 대해서는 “국무총리실에 교통정리를 해달라고 여러 차례 건의했다”며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다만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소관부처별
법률이 없다”면서 심상정·장하나 의원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 결의안과 법안에 적극 협조할 뜻을 밝혔다.

면담이 끝난 뒤 복지부 관계자는 “오늘 자리를 정부 대책 마련의 시발점으로 봐달라”고 설명했다.

진 장관을 만난 피해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아들이
폐질환을 앓고 있는 권미애씨는 “장관이 환자 한분 한분의 상황을 물어봐주고 적어 갔다”면서 “지난해 국감장에서 만난 전 정부의 장관은 ‘최선을 다하겠다, 믿고 기다려달라’는 얘기만 했었는데 이번에는 적극성이 느껴졌다. 한번 더 믿어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손상으로 며느리가 사망한 뒤 병원비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는 이영복씨(67)는 “그래도 전에는 책임자조차 만날 수 없었는데 장관이 만나주지 않았느냐”면서 “이번에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반면 “결국 보여주기용이었다”고 실망감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손상으로 큰딸을 잃었다는 임종찬씨(36)는 “관리에 책임을 다하지 않은 정부가 공식 사과해줄 수는 없는지, 기업들의 도의적 책임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한마디 해줄 수 없는지 물었는데 난감하다는 태도를 보였다”면서 “솔직히 실망했다”고 말했다. 김성태씨도 “무엇보다 부채로 인한 고통이 큰 제게는 정부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한데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부처와 논의해보겠다’가 전부이고 오늘은 확실한 대답을 들은 게 없었다”면서 “괜히 왔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말했다.

이날 피해자들의 국회 방문에 동행한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장관급 책임자를 만났다는 점에 의미를 둘 수 있었지만 여기까지 만 2년의 시간이 걸렸다”면서 “피해 대책에 책임이 있는 환경부 장관 면담도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2013년 4월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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