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10대가 40%... 1994년 시작된 악몽, 여든 할머니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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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0대가 40%... 1994년 시작된 악몽, 여든 할머니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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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참사 13주기 환경보건시민센터, 서울환경운동연합, 환경운동연합, 환경보건전국네트워크,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유족 등이 지난해 8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13주기환경보건시민센터, 서울환경운동연합, 환경운동연합, 환경보건전국네트워크,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유족 등이 지난해 8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계속된다, 13주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망자와 피해자들이 사용하던 제품이 놓여져 있다. ⓒ 이정민 관련사진보기


인천에 거주하는 임재이씨는 올해로 여든을 앞두고 있다. 그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 분류된 두 명의 손자와 함께 살아가며, 10년 넘게 이어진 고통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오고 있다. 그녀가 새로 선출된 대통령 앞으로 보내는 편지에는 그동안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 겪어야 했던 슬픔, 분노, 좌절, 그리고 마지막 남은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아이들이 뭘 잘못했습니까?"

임씨의 손자, 현O씨와 윤O씨는 모두 어린 시절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됐다.


"광고를 보고 좋다고 해서 샀을 뿐인데, 그 결과가 죽음 같은 고통이라면… 이게 정말 소비자의 책임입니까?"

임씨는 울분을 토한다.

첫째 손자 현O는 유아기 때 심장이 멎었고, 심폐소생술 끝에 간신히 살아났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갈비뼈가 휘는 부상을 입었고, 지금도 가슴뼈 변형으로 인한 만성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로 인해 학업에도 큰 지장을 겪었고, 고등학교를 가까스로 졸업한 후 현재는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 중이다.

둘째 손자 윤O는 공군에서 복무 중 담석증이 악화되어 원주세브란스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았다. 현재 쓸개를 제거한 상태이며, 건강은 물론 정신적인 충격도 상당한 상태다. 윤O씨는 '등급 외' 판정을 받았고, 현재 재심을 신청한 상태다.

임씨는 '어른들 잘못으로 아이들이 평생을 병든 몸으로 살아야 하는 게 정의인가? 대통령께선 아픈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며 손자들의 미래를 빼앗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국가를 원망했다.

피해자의 현재는 제도 밖... "살아있다는 이유로 보상에서 제외"

임재이 씨가 직접 작성한
임재이 씨가 직접 작성한 '대통령에게 드리는 호소문'. ⓒ 변상철 관련사진보기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중 상당수는 2000년대 초반 태어난 아동이다. 그들은 지금 청년이 되었지만, 제도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2021년 메디컬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피해자 사망률이 가장 높으며, 2022년 KBS 보도('공기 살인' 피해자 10명 중 4명은 '아이들')에 따르면, 피해자로 인정된 4350명 중 10대 이하(영유아 및 청소년)가 205명으로 사망자 중에서도 5명 중 1명꼴로 많다고 한다. 생존 피해자 중에서도 10대가 차지하는 피해자 비율은 전체의 40% 가까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EBS 보도에 따르면, 2023년 11월까지 정부가 공식 인정한 피해자 중 10대(24%)가 가장 많았다. 해당 방송은 "생존자로 좁혀 봐도 10대가 128명으로 가장 많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이들은 '앞으로 더 긴 시간 고통을 짊어지고 갈 아이들'이라고 표현되었다. 이 10대는 당시(2011년 기준) 초등학생~중학생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현재 20대 초반이 되었을 수 있다.

성인이 된 피해자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은 병역, 결혼, 출산 등 인생의 전환점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점이다. 가습기살균제피해 청년 중에는 현역 군복무를 할 수 없는 경우가 있고, 오히려 반대로 현역으로 입대 후 병이 악화되어 복무 중단 또는 불명예 전역을 겪은 사례도 있다. 하지만 가습기살균제 피해와의 연관성을 제대로 밝혀 입증받기란 쉽지 않다. 병역 복무 중 건강이상을 감지했다 하더라도 병역심사 재조정 요구가 받아들여지기란 사실상 어렵다.

가임기 여성이 된 피해자들 역시 결혼과 출산에 대한 불확실한 미래가 걱정되기는 마찬가지다. 면역질환, 호흡기 장애, 생식계 이상 등은 산부인과적인 측면에서 난임의 원인이 되며, 유전 문제로 오인되어 사회적 낙인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과 전문가들은 현재의 가습기살균제 피해보상체계가 '사건' 중심, '진단' 중심의 구시대적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가습기살균제피해자 소송을 담당하는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 / 파이팅챈스)는 "아동청소년기에 가습기살균제로 피해를 입은 이들이 사회에 진출했을 때 병역, 결혼, 출산, 구직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어려움은 단순 건강문제가 아닌 사회적 차별, 배제의 문제이다"라며 "단순한 피해보상이 아닌 피해 청년들의 생애 전체를 돌볼 수 있는 건강, 사회, 경제적 보호 체계가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14년의 기다림, 그리고 사무실 하나 없는 현실"

가습기살균제 참사 13주기 환경보건시민센터, 서울환경운동연합, 환경운동연합, 환경보건전국네트워크,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유족 등이 지난해 8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13주기환경보건시민센터, 서울환경운동연합, 환경운동연합, 환경보건전국네트워크,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유족 등이 지난해 8월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계속된다, 13주기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이정민 관련사진보기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제품 시판(1994년) 이후 17년이 지난 2011년에야 그 유해성이 드러났다. 하지만 2025년 현재까지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피해자 인정 기준은 여전히 엄격하고, 보상은 턱없이 부족하다.

"'구제급여'라는 용어부터 잘못됐어요. 우리는 시혜를 바라는 게 아니라, 국가와 기업이 책임을 져야 하는 정당한 피해자입니다."

임씨는 특히 피해자 단체조차 '사무실 하나 없이' 운영되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다른 사건 피해자들은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 공간이라도 마련해줬는데, 우리는 늘 후순위입니다. 모임 한 번 하려면 커피숍에서 만나야 하고, 서류 하나 정리하려면 내 집 식탁이 사무실입니다."

이는 단순한 행정 편의의 문제가 아니다. 피해자 간의 연대와 심리적 회복, 실질적 권리행사를 위한 조직적 기반이 부재하다는 것은 국가가 재난 피해자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다.

"특별법,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피해자 가족들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은 특별법 재정비다. 임씨는 기존의 가습기살균제 피해 구제법이 "피해자를 우롱하는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특별법은 가해 기업의 법적 책임을 명확히 묻지 못하고 있으며, 피해 인정 기준 역시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등급 외' 판정을 받은 피해자들은 실질적인 구제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임씨는 보건복지부가 사건을 직접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도 편지에서 강조했다.

"지금껏 환경부에서 이 사건을 맡아왔지만, 본질은 '환경'이 아니라 '건강' 문제입니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이 가진 2002년 이후의 건강 빅데이터를 통해 피해 판정을 해야 실질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임씨는 특히 가해 기업과 책임자들에 대한 단죄가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비판했다.

"불법을 알고도 덮은 자들은 엄벌을 받아야 합니다. 국제적으로 반인권범죄에는 공소시효가 없습니다. 이 사건도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가습기살균제 제조 및 유통 과정에서 기업들은 인체 유해 가능성을 알고도 제품을 시판했고, 정부 부처의 늑장 대응은 수많은 생명을 잃게 한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실질적인 처벌은 극히 제한적이다.

"이제 시간도, 생명도 많지 않습니다"

임재이 씨가 직접 작성한
임재이 씨가 직접 작성한 '대통령에게 보내는 호소문' ⓒ 변상철 관련사진보기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피해자들은 매일 병원과 싸우고, 가정은 파탄 나고, 생계는 무너졌습니다. 그 고통 속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임씨는 편지를 맺으며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대통령이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이 아이들처럼 피해받은 국민이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대통령의 책무"라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환경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집단합의 대표선임에 대한 우려도 나타냈다. 피해자 중 청년의 비중이 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참여가 극히 저조하고, 청년들이 이 합의 대표단 안에 들어가는 것이 사실상 어려워 보이기 때문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구조적인 재난 중 하나다. '생활 속에서 벌어진 대량 살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피해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현재형이다.

임재이씨의 호소문은 단순한 탄원이 아니라, 이 사회가 피해자들을 어떻게 외면해왔는지를 되짚는 통렬한 고발장이기도 하다. "선진국"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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