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223 빼앗긴 숨...지옥같은 고통만 남았다

가습기살균제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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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피해

20180223 빼앗긴 숨...지옥같은 고통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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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75, 1302, 4673, 397, 2686.”

 

5975명이 건강피해를 호소했다(2018년 1월 기준). 1302명은 이미 숨졌고, 4673명이 살아남았다. 국가는 397명을 피해자로 인정했다. 2686명은 구제받지 못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이야기다. 환경부는 살균제 사용과 폐 손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따져 피해 신청자들을 네 단계로 규정했다. 정부 지원대상은 1단계(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가능성 거의 확실)와 2단계(가능성 높음) 판정자로 한정된다. 대다수 3단계(가능성 낮음), 4단계(가능성 거의 없음) 판정자는 공식적으로 피해자가 아닌 셈이다. 숫자 뒤에 가려진 ‘비공식’ 피해자들의 일상을 따라가 보았다.
 

강은 피해자가 지난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사건의 대법원 상고심 선고가 내려진 지난 25일 강은 피해자가 서울 대법원 앞에서 존 리 전 옥시 대표의 무죄 선고 등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에 참가해 피켓을 들고 있다.

 

강은 피해자가 지난달 8일 서울 여의도 옥시 본사 앞에서 항의행동에 참가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4단계 판정자 강은(49)씨는 걸음이 느리다. “뛸 수 없어 바로 눈앞에서 버스를 놓칠 때도 있어요. 함께 걷는 가족에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그는 1999년 1월부터 3년 가까이 옥시에서 출시한 가습기 살균제 ‘옥시싹싹 가습기 당번’을 사용했다. 출산 기간과 산후조리 중에 집중적으로 가습기를 틀었다. 2001년 딸아이와 함께 천식을 앓기 시작했다. 강씨는 잦은 천식 발작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워졌다. 찾아가는 병원마다 ‘원인 불명’이란 답만 돌아왔다. 합병증으로 비염과 축농증이 오면서 2006년엔 미각, 후각을 모두 상실했다. 지난해 천식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 질환으로 인정되면서 강씨 또한 기대를 걸었지만 까다로운 기준 앞에 좌절했다. 18년째 중증 천식으로 고통받는 그는 자신의 피해를 입증할 방법을 찾아 다시 거리로 나섰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뒤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향하는 조순미 피해자.
조순미 피해자가 복용하는 약. 30종이 넘는다.
조순미 피해자와 그의 어머니.
조순미 피해자가 서울아산병원을 찾아 면역주사를 맞고 있다.
조순미 피해자가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특조위의 상임위원 추천 관련 기자회견을 마친 뒤 국민의당 관계자와 대화를 나누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조순미 피해자가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특조위의 상임위원 추천 관련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을 준비하고 있다.

“‘설마 그것도 못하겠어?’라고 생각했던 걸 실제로 못하게 됐다.”

4단계 판정자 조순미(50)씨는 사업체 두 개를 이끌어가는 대표였다. 가습기 살균제 사용 이후 중증 천식과 저감마글로불린혈증, 쿠싱병, 근무력증 등 각종 난치성 질환이 발병하면서 하나둘 내려놓았다. 현재는 산소호흡기의 도움 없이는 숨쉬기조차 어렵다. 그는 애경, 이마트, 옥시 제품을 한꺼번에 사용했다. 심각한 수면장애에 시달리는 조씨는 “밤이 긴 게 고통스럽다”며 “한꺼번에 약(수면제)을 다 먹어버릴까” 하는 충동이 자주 든다고 토로했다. 그는 “아직 우리는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그럴수록 한목소리를 내야 그 소리가 책임자들의 양심에 가닿을 수 있다”고 말했다.
 

폐 기능 저하로 입원한 안은주 피해자.
안은주 피해자 뒤로 보이는 가족사진. 2015년 폐 이식 수술을 받기 전 “이별을 준비하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촬영했다.
안은주씨(왼쪽)가 입원한 병실에 찾아온 조순미씨.
집근처 배구장을 찾은 안은주 피해자. 그는 배구 국가대표 출신이다.

“건강했던 시절의 기억이 나를 가장 힘들게 했다.”

3단계 판정자 안은주(51)씨는 두 번째 폐 이식을 준비하고 있다. 안씨는 2008년부터 3년간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뒤 원인 미상의 폐렴을 앓았다.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고, 2010년 봄 그는 도민체전이 열린 배구장에 주저앉았다. 전직 배구 국가대표였던 안씨가 마지막으로 밟은 코트였다. 2015년 10월 첫 번째 폐 이식을 받았다. 2년쯤 지났을까. 이식받은 폐는 건강했지만, 안씨의 몸이 거부했다. 갖은 약을 다 써봤지만 소용없었다. 폐 기능이 계속 떨어지며 다시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오랜 투병생활로 부채가 억대로 불어났다. 안씨는 “우린 항상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안은주 피해자가 자택에 남아 있는 가습기 살균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조순미 피해자가 지난 20일 서울아산병원에서 CT촬영을 하고 있다.
조순미 피해자가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특조위의 상임위원 추천 관련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을 준비하고 있다.
조순미 피해자 자택에 설치된 인공호흡기.
퇴원하고 밀양 집으로 돌아가는 안은주 피해자.

“원진레이온이나 고엽제의 경우 피해가 단순하게 한 가지 질병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해 8월 문재인 대통령이 피해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했던 말이다. 문 대통령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며 피해구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은경 환경부 장관은 피해인정의 단계를 없애고 피해 인정범위를 확대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정부의 피해인정은 피해자들이 가해 기업에 책임을 묻기 위한 최소한의 근거이자 출발점이 된다”고 말했다.

글·사진 하상윤 기자 jonyyu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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