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인체독성 ‘알 수 없어’ 팔았다? 모르면 안 팔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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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인체독성 ‘알 수 없어’ 팔았다? 모르면 안 팔았어야

관리자 0 1067

인체독성 ‘알 수 없어’ 팔았다? 모르면 안 팔았어야


경향 2023.12.30 
가습기 살균제 참사로 인해 숨진 고 박영숙씨의 남편 김태종씨가 지난해 8월 31일 서울역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 12주기를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생전에 박씨가 쓰던 산소호흡기를 들고 있다. 권도현 기자

가습기 살균제 참사로 인해 숨진 고 박영숙씨의 남편 김태종씨가 지난해 8월 31일 서울역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 12주기를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생전에 박씨가 쓰던 산소호흡기를 들고 있다. 권도현 기자

“검사는 이런 가능성도 있다는 연구만을 제시할 뿐 실제로 어떤 사실을 증명한 바는 없다.”(애경 측 변호인)

“현재에도 이런데 20여 년 전 피고인들이 제품을 생산할 당시에 안전성 실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폐 손상 등의 결과를 도출하지 못했을 것.”(SK 측 변호인)

지난해 10월 26일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SK·애경·이마트의 항소심 결심공판이 열렸다. 선고 전 마지막 공판 날까지 재판의 주요 논점은 ‘과학의 한계’였다. 지금도 SK·애경이 제조·판매한 가습기 살균제 ‘가습기 메이트’의 건강피해를 100% 증명하지 못했으니, 과거에는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논리가 노리는 건 과학의 한계였다. 기업 변호인단은 1심에서 가습기 메이트 건강피해 관련 연구 23건을과학의 한계를 들어 하나하나 격파해 2021년 무죄 판단을 이끌어냈다. 1심은 피해자들의 실사용 환경과는 다르게 설계된 이들 실험이 가습기 메이트와 인체 독성 사이의 인과관계를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봤다.

결심공판에서 나온 두 회사 변호인의 주장이 연구의 불완전성을 지적한 같은 말처럼 보여도, 용례가 다르다. 애경 변호인이 1심 때처럼 과학의 한계를 방패처럼 들고 있었다면, SK 변호인은 방패를 창처럼 휘둘렀다. 이 형사재판의 가려진 쟁점 중 하나는 ‘가습기 메이트를 제조한 SK가 상품을 개발해 판매를 시작한 1994년 원료 물질의 유해성을 알고 있었는지, 혹은 알기 위한 노력을 다했는지’다. SK 측은 제조사로서 책임을 다했느냐는 질문에 답하기보다 “지금도 과학의 한계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을, 당시에 알 수 있었겠느냐”고 되물었다.

1심은 이 쟁점을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의 특징인 폐 섬유화가 가습기 메이트를 사용했을 때 나타난다고 볼 수 없으니, 최초 출시 단계까지 따져볼 필요가 없다는 취지다. 안전성을 확인하지 않고 제품을 출시한 기업의 책임마저 과학의 한계 앞에 왜소해졌다. 1심 판결 이후 가습기 메이트와 건강피해의 관계를 연구했던 학자들은 “재판 대상이 ‘피고인의 잘못’이었어야 했는데 과학의 한계로 바뀌었다”고 했다.

문제는 그러나 학자들이 지적했듯이 과학의 한계나 ‘과학의 언어’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공업용 살균제(보존제)로 사용되던 원료(CMIT·MIT)로 가습기 살균제라는 세상에 없던 제품을 출시하면서 과학의 한계와 과학의 언어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CMIT·MIT를 최초로 개발한 글로벌 기업의 전직 임원은 ‘이 물질의 위험성을 알았기 때문에 가습기 살균제로 상품화하지 않은 것이냐’고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위험성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몰랐기 때문에 판매할 수 없었다. (가습기 살균제로 사용할 때) 안전성에 대한 실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른다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던 SK와 애경이 말하는 과학의 한계는 어떤 의미일까.

‘과학적 한계’의 취사선택

지난해 10월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 가해 기업 유죄 선고를 호소하는 피해자ㆍ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이 열렸다. |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2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 가해 기업 유죄 선고를 호소하는 피해자ㆍ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이 열렸다. | 연합뉴스

기업 측 변호인: (증인의) ‘기도에서는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어서 폐로 갈 거다’ 이런 식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한 것 아닌가요?

전종호 경북대 응용화학공학부 교수: 혈관이 있는데, 혈관이 있다고 해서 다 (혈관으로) 흡수가 되나요? 그런 디스크립션(서술)이 있으면 보여주세요.

변호인: 약을 보면 기도를 통해 (혈관으로) 흡수하는 게 있는데.

전 교수: 이비인후과에서 주는 에어로졸 약을 말하는 건가요?

변호인단은 검찰 측이 항소심 재판에서 새로운 증거로 제시한 전종호 교수의 연구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전 교수는 방사성추적자를 이용, CMIT·MIT가 호흡기를 통해 폐로 전달돼 폐 손상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A4용지 9장 분량의 연구를 변호인단은 하루 12시간씩, 이틀에 걸쳐 다뤘다. ‘실험용 쥐의 기도에 노출한 것이지 쥐가 호흡해서 노출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는 예의 노출 방식에 대한 질문부터 ‘쥐가 마취돼 자가 호흡으로 얼마나 흡입했는지 알 수 없는 게 아니냐’는 질문까지 나왔다. 압권은 챗GPT까지 등장했던 ‘혈관 논쟁’이었다. 변호인들은 “해당 물질이 비강이나 기도를 통해 폐까지 간 게 아니라 혈관을 통해 폐로 이동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아가 ‘혈관으로 흡수된 걸 빼고 폐에 도달한 양을 계산해야 하는데 이 계산이 가능한지’도 물었다. 물질이 폐에 도달했어도 호흡기 이외의 다른 경로로 이동했거나 경로 별로 이동한 양을 계산할 수 없다면, 또다시 연구의 불완전성이 공격받는 빌미가 될 수 있었다. 증인 신문이 길어지자 재판장도 개입했다.

재판장: 증인 답을 좀 해주세요. 흡수되는 것 아니냐고 했는데.

전 교수: 제가 검색해서 찾아봤어요. 챗GPT를 활용해서. ‘기도 내부의 물질이 혈액으로 흡수되는 일은 일반적으로 없습니다. (중략) 기도와 순환계는 서로 독립된 시스템입니다’

지리한 공방에 드문드문 하품이 나오던 좌중에서도, 질문을 이어가던 변호인들 사이에서도 웃음이 터졌다. 변호인들이 연구 자체에 대한 의문뿐 아니라 학계의 상식에 해당하는 부분까지 의문을 제기했기에 나온 진풍경이다.

‘과학의 한계’를 파고든 변호인들은 10월 26일 결심공판에서 논리를 한 단계 확장했다. 제품 출시 및 판매 과정에서도 제품 안전성 검증을 했지만, 당대 과학의 한계로 인해 인체 영향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주장이었다. 애경 측 변호인은 이날 “당시의 과학기술로는 (사용 농도의) 100배, 200배로 실험을 했다 하더라도 제품의 결함을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고, SK 측 변호인은 “당시 과학기술 수준에 비춰 안전성 검증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된 개별 연구의 증거능력을 부정할 때는 과학의 한계를 집요하게 파고들더니, 제품 출시 단계의 검증 책임은 과학의 한계를 방패막이 삼았다. 그때그때 입맛대로 과학의 한계를 활용한 셈이다.

과학의 한계는 안전성을 충분히 담보하지 않은 채 제품을 판매한 기업에 주는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연구와 실험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제품 안전성을 담보하기 위해 기업은 오히려 더 최선을 다했어야 했다. 기술의 한계나 비용 부담으로 인해 안전성을 확보하기 어려웠다면 제품 생산 계획을 철회했어야 한다.

글로벌 화학기업 롬앤하스는 가습기 메이트의 원료 물질인 CMIT·MIT를 1960년대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애초 농약에 쓰기 위해 개발했지만, 1980년대 공업용으로 전환하면서 주로 냉각수 보존제 등으로 판매했다. 용도를 확장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대부분 안전성 우려 때문이었다. 롬앤하스코리아 대표를 지낸 A씨는 지난해 12월 27일 주간경향에 “1990년대 중반에 사내에서 새우양식장에 이 물질을 판매하는 방안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새우가 양식장에서 집단 폐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 물질을 사용하면 박테리아 제거에 효과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회사 워크숍에서 본사 고위직의 답변은 팔지 말라는 것이었다. 판매를 하려면 우리에게 자료가 다 있어야 하는데, 새우양식장에서 사용했을 때 그 새우를 먹은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다고 했다. 인체 영향에 대한 실험을 하려면 수백만달러가 들어가는데 새우양식장에 팔아서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는 판단도 있었다”고 했다. 이는 당시 기술의 한계보다 비용의 한계가 제품 출시에 더 큰 장애물이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 무렵 A씨에게 ‘CMIT·MIT를 가습기에 넣어도 되느냐’는 거래처 문의가 오기도 했다. 그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이 물질은 공업용이고, 사람한테 쓰는 게 아니었다. 가습기에 넣어 사용했을 때 인체 영향에 대한 자료도 없다”고 했다. 위험성을 알아서가 아니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물질을 판매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롬앤하스 측은 물질 자체의 독성도 파악하고 있었다. 1984년 롬앤하스는 2년간의 연구 끝에 흡입독성시험에서 이 물질이 폐에 영향을 미치고 비염을 유발한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SK가 가습기 메이트를 출시하기 10년 전이다.

기업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환경보건시민센터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지난해 8월 28일 가습기 살균제 참사 12주기를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가해 기업 책임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환경보건시민센터 등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지난해 8월 28일 가습기 살균제 참사 12주기를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가해 기업 책임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SK와 애경은 제품 판매 전 안전성을 충분히 확인했을까. 형사재판에서처럼 엄격하고도 면밀히 당대 과학의 한계를 되짚었을까. 그렇지 않다. SK는 안전성에 대한 확인도 없이 제품을 출시했다. 과학의 한계를 인지하고 ‘모른다는 것’을 경계하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검찰수사와 사회적참사조사위원회(사참위) 조사로 확인된 사실관계를 보면, SK는 흡입독성시험 결과가 나오기 전인 1994년 11월 제품을 출시했다. SK가 이영순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에게 1994년 말 맡긴 실험 결과는 1995년 7월에야 나왔다. 검찰은 가습기 이용자가 많은 겨울철 출시를 위해 SK가 실험 결과 확인을 하지 않고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고 본다. 이윤이 안전성 검증보다 우선한 것이다.

실험 결과 역시 가습기 살균제를 출시하지 말았어야 하는 근거에 가까웠다. 1995년 이영순 서울대 교수의 보고서에는 ‘추가 실험이 필요하다’, ‘더 알아봐야 한다’는 결론이 담겼다. 실험용 쥐를 대상으로 한 흡입독성시험에서 백혈구 수치가 감소하고 세포독성이 나타났다. 실험 결과에도 불구하고 SK는 가습기 메이트에 ‘인체에는 전혀 해가 없다’고 표기했다.

최초 가습기 살균제를 출시했던 1994년 이후 안전성 검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재판에서 공개된 2003년 SK의 내부자료를 보면, 마케팅팀은 희망사항으로 ‘안전한 물질로 대체, 가습기 메이트 원체 개선’을 회사에 요구했다. SK 내부적으로는 가습기 메이트 원료 물질이 안전하지 않다고 파악하고 있었던 구체적 정황 중 하나다. SK 측은 가습기 메이트 원료물질을 대체하려 애경에 옥시 가습기 살균제 성분(PHMG)을 추천하기도 했다.

그러나 추가 안전성 검증이 이뤄진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참위 조사 내역을 보면 SK는 2000년 이후 가습기 메이트에 관한 실험을 최소 9차례 진행했다. 이들 실험은 향 첨가 시 안정성 테스트, 불순물 원인 분석, 살균력 테스트, 변색 원인 확인, 성분 검사 등에 그쳤다. 정작 필요했던 인체 영향 평가나 안전성 검증과는 거리가 먼 실험들이다.

인체독성 ‘알 수 없어’ 팔았다? 모르면 안 팔았어야

애초에 안전성 검증을 소홀히 한 이유도 당대 과학과 기술의 한계보다는, 비용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1990년대에 이미 국내가 아니더라도 미국, 일본 등에선 흡입독성시험을 할 여건이 충분히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사참위 종합보고서에는 “1990년대 중반 해외에는 흡입독성시험 연구기관이 있었고, 관련 연구물도 국제학술지에 다양하게 발표됐다”고 쓰여 있다. 애초 롬앤하스의 CMIT·MIT 흡입독성시험결과가 나온 것도 1984년이다. 한 생활용품 제조사 관계자는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해외에서 흡입독성시험의 기술은 어느 정도 발전돼 있었다. 비용이 그만큼 더 들 뿐이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수면 위로 올라온 2011년, 애경 내부의 대응 자료에도 “시간과 비용에 대한 투자에 대한 의지가 그 당시로서는 매우 힘들었음”이라는 문구가 담겼다. 과학의 한계는 형사재판에서 책임을 줄이기 위한 핑계일 뿐, 실제로는 안전성 검증에 비용을 지출할 의지가 없었다는 얘기다.

2002년부터 SK로부터 원료를 제공받아 가습기 메이트를 판매한 애경 또한 내부적으로는 가습기 메이트의 안전성에 줄곧 의심을 품었다. 2002년 출시 당시 가습기 메이트 라벨에는 “영국 헌팅던 라이프 사이언스(흡입독성 시험 전문기관)에서 저독성을 인정받은 항균제를 사용해 인체에 해가 없는 안전한 제품”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 문구는 2003년 빠진다. 수사·재판 기록 등을 종합하면, 이 문구는 안전성 검증자료가 없다는 내부 논의에 따라 삭제됐다. 그 무렵 애경의 내부 회의자료에는 안전성 검증기관을 ‘헌팅던 라이프 사이언스’에서 ‘서울대’로 바꾸는 걸 검토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SK로부터 이영순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의 시험 결과를 살펴보고는 그 문구 자체를 삭제했다. 서울대의 실험도 제품이 안전하다는 근거가 되기엔 부족하다고 판단한 셈이다.

애경은 당시 흡입독성시험을 수행하는 기관과 수반되는 비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2001년 자사 제품에 소비자 민원이 들어오자 충북대에 흡입독성시험을 맡겼다. 2005년에는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산하기관에 흡입독성시험을 맡기면 3개월, 1년 단위로 기간별 용역 비용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다만 비용을 들여 가습기 메이트의 흡입독성시험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애경은 가습기 살균제의 흡입독성이 논란이 된 2011년, 1995년의 서울대 보고서를 다시 들여다봤다. 당시 작성된 내부문건에는 “SK는 흡입독성시험 거쳐서 본 물질 안전하다고 주장하지만, 시험 검토 결과 안전하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는 매우 희박함. 본 시험 결과는 현재 SK케미칼에서 미처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결과에 의하여 못찾았다고 할 수 있다고 보여짐”이라고 기재됐다.

변호인단은 과학의 한계를 끌어와 가습기 메이트 제조 당시 ‘최선을 다했음에도 위험을 예견할 수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위험을 방지할 의무를 소홀히 한 ‘과실’이 있더라도, 이 과실이 참사로 이어질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안전성을 검증하지 않았다면 기업에 법적 책임을 부과할 수 있다. 대법원은 2013년 고엽제 손해배상 사건에서 “제조업자는 그 시점에서의 최고의 기술 수준으로 그 제조물의 안전성을 철저히 검증하고 조사·연구를 통해 발생 가능성 있는 위험을 제거·최소화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병문안용’ 추천할 때는 언제고

1994년 SK(당시 유공)는 가습기 살균제를 최초로 출시하고 제품 광고를 시작했다. 광고 문안 하단에 ‘어린아기 방문, 병원 병문안 시 선물용으로 좋습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독자 제공

1994년 SK(당시 유공)는 가습기 살균제를 최초로 출시하고 제품 광고를 시작했다. 광고 문안 하단에 ‘어린아기 방문, 병원 병문안 시 선물용으로 좋습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독자 제공

“OOO은 가습기 살균제 노출 전부터 호흡기 질환이 있었다.”(SK 측 변호인)

변호인단은 독성시험을 각개격파한 것처럼 각각의 피해자들의 기저질환을 공략했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기 전 피해자들의 건강 상태를 앞세워 피해자들의 질병이 가습기 살균제 때문이라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위함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제품을 사용하기 전에도 이미 건강이 좋지 못했다’는 변호인단의 주장이 설혹 사실이더라도, 이는 기업이 의도했다고 봐야 한다. SK는 제품의 최초 판매 시점인 1994년 면역체계가 덜 갖춰진 어린아이들, 건강이 좋지 않은 이들을 제품의 주된 고객층으로 설정했다. 주간경향이 입수한 가습기 메이트 출시 당시 광고를 보면, “어린아기 방문, 병원 방문안 시 선물용으로 좋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살균이 위생보건에 좋다’는 당시의 통념에 기대, 살균제에 더 취약할 수 있는 이들에게 제품 사용을 권한 셈이다.

실제 가습기 살균제는 어린이들이 있는 집에서 많이 사용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직접 쓴 <내 몸이 증거다>에는 어린아이들이 있었기에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는 증언이 여럿 확인된다.

‘1994년 11월 인체에 해가 없다는 TV 광고를 믿고 아기가 있는 우리 집은 유공에서 만든 가습기 메이트를 마트에서 구입해 주로 잠자는 시간에 사용했다.’

‘태어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던 아이를 위해. 99% 살균, 인체 무해라는 문구를 보면서 가습기에 이걸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 머리맡에 틀어줬다.’

‘병원에서 태어날 때 건강하게 태어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감기에 걸렸다. 동네 소아과에선 가습기 틀어주라고 했다. 때마침 텔레비전에서 SK 유공 가습기 메이트를 선전해 사용했다.’

애경의 주요 마케팅 대상도 아이와 산모였다. 재판에서 공개된 애경의 마케팅 관련 문서에는 애경이 체인점인 B산후조리원에 가습기 메이트를 광고하려 한 기획안이 담겼다. ‘산후조리원과 함께 마케팅해 신생아실과 산모실에 가습기 메이트 장점이 부각된 광고 설치’, ‘홈크리닉 가습기 메이트 노출 통한 브랜드 인지도 강화 및 인체 안전 강조한 제품 특장점 소개’ 등의 문구가 쓰여 있는 기획문서는 임원까지 보고가 됐다. 마케팅 기간은 2004년 10월부터 2005년 3월로 적시됐다.

애경은 민원 응대를 하면서 아이나 노약자에게 가습기 살균제를 권하기도 했다. 애경은 2011년 2월 16일 자 민원에 응대한 뒤 차후 다시 문의 시 ‘애경 연구소에서 가습기 메이트 관련해 기본적인 안전성 자료 보유하고 있음’이라고 밝힌 뒤 ‘면역력이 약한 유아나 노약자가 있는 가정에서 사용하시는 것이 더욱 좋다’고 알릴 것을 담당자에게 요청했다.

불확실성 잣대 달라질까

가습기 살균제 흡입독성이 문제 된 2011년 이후 이뤄진 실험은 주로 폐 섬유화 등 특정질병 발견을 목적으로 했다. 피해자들의 최초 진단명은 폐렴, 기관지폐렴, 급성 하기도 감염, 급성 기관지염, 만성 부비강염, 급성 상기도 감염, 간질성 폐질환, 만성 인두염, 천식 등으로 병명의 앞머리에는 ‘상세불명(원인미상)’이 붙었고, 폐 질환에 국한되지도 않았다. SK가 1994년 가습기 메이트 출시 전 수행했어야 하는 실험은 적은 가능성일지라도 이들 질병의 발병 징후를 확인하는 것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제품 출시 이후에야 나온 연구는 제품의 독성이 가진 불확실성을 조금도 해소해주지 못했다. 법정에서 불확실성을 문제로 다루고자 한다면, 이 검증의 불확실성이야말로 비판의 대상이 돼야 한다.지난해 12월 28일 기준 가습기 살균제 피해 신청자는 7883명, 정부 지원 대상자는 5445명, SK 성분 가습기 살균제 사용 피해자는 2181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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