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효가 끝나가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참상이 드러나고 꼭 10년이 흘렀다. 무려 18년 동안 전국적으로 43종 998만 개나 판매된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 규모는 95만 명을 훌쩍 넘는다는 추정도 있다. 단연코 단군 이래 최악의 참사였다. 그런데 정부가 실제로 파악한 피해자는 사망 1687명을 포함해서 고작 7535명뿐이다. 추정 피해자의 99.2%는 피해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세월이 흐르면 몸에 남아있던 피해의 흔적도 흐려지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참사의 의학적‧생리적 시효가 끝나가고 있는 셈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과 대응은 절망적이었다. 그나마 알량한 구제급여라도 지급받은 피해자는 2956명에 지나지 않는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요란했던 4년 전의 호언장담도 피해자들에게는 희망 고문이었을 뿐이다. 결국 피해자들을 제대로 구제해주지도 못했고, 제조사에게 확실하게 책임을 묻지도 못했다. 그동안 한눈만 팔다가 내년 6월이면 활동이 종료되는 ‘사참위’(사회적참사위원회)가 화학물질 피해에 대응할 ‘중독센터’를 설립하자는 엉뚱한 제안을 내놓았다. 끝까지 피해자가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고 몸부림치는 부끄러운 모습이다.
가습기에는 생수만 넣어야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우리 사회를 휩쓸기 시작한 맹목적인 ‘살균’ 광풍이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압축 성장의 과정에서 상식과 합리가 사라져버린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부실의 종합 세트라고 할 수도 있다. 국민의 안전을 지켜줘야 할 정부‧기업·전문가들이 모두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무려 18년 동안 참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참사의 전모가 밝혀진 후에는 최소한의 해결책도 찾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는 절박한 상황의 피해자들을 서로 갈등하고 분열시켜버렸고, 기업은 냉정하게 책임을 외면해버렸다. 전문가들도 황당한 ‘연구용역’을 챙기는 일에 더 바빴다. 힘없는 피해자들은 최소한의 전문성은커녕 상식조차 기대할 수 없는 법정에서 여전히 힘겹게 고군분투하고 있다.
참사의 불씨는 1994년 당시 유공(SK케미칼의 전신)의 개발 담당 부장의 어설픈 아이디어에서 시작됐다. 경제 사정이 좋아지면서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한 초음파 가습기의 물때를 제거하는 ‘세정제’를 어린이에게도 안전하게 만들겠다는 발상이 문제였다. 생활화학제품과 소비자의 안전에 대한 전문성이 턱없이 부족했다. 가습기의 물때를 제거하는 세정제를 직접 사용할 이유가 없는 안전성이 제품 개발의 목표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세정제로 세척한 가습기는 깨끗한 물로 헹군 후에 사용하는 것이 상식이다. 소비자들에게 그런 상식만 일깨워줬더라면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조사가 ‘세균제’라는 엉뚱한 상표명을 붙인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세정제’를 가습기의 물에 넣어서 밀폐된 실내에서 반복적이고 지속적으로 분무하도록 요구했다.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어처구니없는 사용법이었다. 물때가 녹아나온 ‘비눗물’을 에어로졸 형태로 밀폐된 실내에 분무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 세정제에 인체에 해로운 살균 성분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밀폐된 실내에서 사용하는 가습기에는 생수만 넣는 것이 합리적인 상식이다. 수돗물에 남아있는 염소와 탄산칼슘같은 광물질도 걱정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엉터리 살인적 사용법을 아무도 걸러주지 못했다. 공산품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기술표준원은 무신경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독성학자를 자처했던 수의학자는 오히려 제품의 안전성을 ‘검증’해줬다. 산업부는 ‘세계 최초의 창의적 신기술’이라고 추켜세우면서 KC마크까지 붙여줬다. 참사가 드러났지만 아무도 사법적‧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
중독센터보다 피해자 구제가 우선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보건·의료 체계도 피해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의료계가 임산부들에게 타나는 원인미상의 폐손상을 처음 주목한 것은 2011년이었다. 무려 18년 동안 엉터리 제품의 살인적인 사용법 때문에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은 철저하게 놓쳐버렸다. 사참위가 요구하는 중독센터를 설립한다고 앞으로 그런 사정이 달라질 가능성은 없다.
의료계와 독성학계의 대응도 실망스러웠다. 어렵사리 폐손상과 가습기살균제의 관련성을 밝혀냈던 질병관리본부도 감염병이 아니라는 이유로 손을 떼고 말았다. 위험을 방치했던 산업부도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해버렸고, 결국 애먼 환경부가 덤터기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전문성도 없고, 의지도 없었던 환경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환경부가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 증상을 ‘폐 섬유화’로 한정하고, 제품에 따라 피해자의 등급을 구분했던 것부터 끔찍한 패착이었다. 쥐 실험을 핑계로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GH(염화에톡시에틸구아디닌)의 피해는 인정해주고, CMIT(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의 피해 사실은 과학적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일부 전문가들의 억지였다. 만성 독성 물질에 의한 질병의 모든 인과관계를 쥐 실험으로 밝혀낼 수 있다는 억지는 현대 의학에 대한 모욕이었다. 사람은 쥐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축을 진단‧치료하는 수의사가 사람을 진단‧치료하는 의사가 될 수는 없고, 독성학 실험실이 병원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없다.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 사실은 쥐가 아니라 피해자로부터 확인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설픈 독성학 전문가들에게 쥐를 이용해서 살균제 성분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확인하고, ‘살생물질’의 ‘흡입독성’을 확인하는 용역과제를 떠맡기는 것이 환경부가 했던 일의 전부였다. 대통령의 어설픈 관심이 오히려 사태가 악화시켰다. 정치적 파괴력을 기대할 수 없는 가습기살균제는 ‘사참위’에게 성가신 군더더기였을 뿐이다. 피해자를 구제하고, 제조사의 책임을 밝혀내는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결국 제조사의 책임을 밝혀줘야 할 법정도 제조사가 동원한 변호사들의 화려한 궤변에 압도되고 말았다.
독성학과 역학 전문가들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만성 독성물질에 의한 독성이 생물종에 따라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독성학의 핵심 원칙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참사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던 살인적 사용법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 구제보다 용역과제에 관심을 보인 전문가들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재발 방지를 위해 ‘가습기살균제연구소’를 설립해야 한다는 요구도 있었다. 사참위의 ‘중독센터’ 요구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세정력도 없고, 살균력도 없는 엉터리 가습기 살균제의 만성 인체 독성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이미 차고 넘친다. 피해를 호소하는 피해자들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가장 확실하고 명백한 과학적 증거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저농도의 만성 독성물질 흡입에 의한 질병의 발생 과정을 어설픈 쥐 실험으로 밝혀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는 더 이상 신뢰할 이유가 없다.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는 특정한 살균 성분의 급성 독성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는 세척력도 없고, 실질적인 살균력도 없는 엉터리 맹물이었다. 그러나 만성적인 인체 독성을 가진 화학성분을 밀폐된 실내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분무하도록 요구한 살인적인 사용법에 대한 책임이 무겁다. 살인적인 사용법의 위험성을 몰랐다면 생활화학 제품을 개발해 생산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고, 그런 사실을 알고도 소비자를 속였다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상해죄를 저지른 것이다. 어느 경우이거나 그런 제조사가 생산하는 엉터리 공산품의 안전 관리를 소홀히 했던 정부의 책임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