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지연된 정의와 남아있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삶에 대하여

오피니언
홈 > 정보마당 > 오피니언
오피니언

[오마이뉴스] 지연된 정의와 남아있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삶에 대하여

관리자 0 269

지연된 정의와 남아있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의 삶에 대하여

오마이뉴스 2024.2.28 
[시선] 서울고등법원 2024. 1. 11. 선고 2021노134 판결에 대한 소고

서울고등법원은 2024. 1. 11.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를 생산한 기업 책임자들의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에 대해 대부분 유죄를 선고하였다.

서울고등법원은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참사 사건을 가리켜 '제품을 출시하기 전 안전성 검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가습기살균제를 유통시켜 사실상 전 국민을 상대로 만성 흡입독성시험을 행한 사건'이라고 규정하였다.

해당 판결은 2021. 5. 18.부터 2024. 1. 11.까지 무려 3년여에 걸친 재판 끝에 선고된 것이었다. 검사와 피고인 측 모두 상고함에 따라 해당 사건은 대법원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원인 불명의 폐손상 환자 다수의 사례가 의학계에 보고되면서 2011년 세상에 드러났다. 2017년 1월 PHMG/PGH 성분 가습기살균제를 생산·유통한 기업 대표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기까지는 약 6년의 시간이,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 생산·유통 기업 책임자들에 대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기까지는 약 13년의 시간이 걸렸다.

비록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은 유죄를 선고하였으나, 원심은 무죄를 선고한 만큼 유무죄를 장담하기는 어려우며 대법원의 선고까지 몇 년이 걸릴지도 알 수 없다. 피해자들은 또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2011년 사건이 처음 공론화되었을 때 빠른 연구와 수사가 이루어졌다면 피해자들이 이토록 오랜 시간을 형사사건에 매달리며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은 없었으리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는다. 지연된 정의의 부당함이 여전히 피해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무엇보다 범죄, 사회적 참사에서 형사처벌은 전체 사건 해결의 초석,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범죄, 사회적 참사가 공론화되고 수사가 시작되어 관련자들이 기소되고 법원의 재판으로 처벌에 이른 뒤에도 피해자들의 삶은 계속된다. 1985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범죄 및 권력남용 피해자를 위한 사법 기본원칙"은 가해자의 형사처벌은 물론 피해자의 존엄에 대한 존중, 공식적·비공식적 절차를 통한 피해자의 권리구제, 충분한 원상회복 등 피해자의 권리를 총체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범죄와 권력남용으로 훼손된 피해자의 인간적 존엄은 진상규명과 이를 바탕으로 한 책임자 처벌,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신체적·정신적 손해에 대한 충분한 배상 등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겨우 복구될 수 있기 때문이다. PHMG/PGH 성분 가습기살균제 생산·유통 기업 대표에 대한 유죄판결이 확정된 뒤인 2018년 12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고 다년간의 조사 끝에 2022년 9월 가습기살균제참사 종합보고서를 내놓은 이유 또한 형사처벌로 다 담기지 않는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현황을 파악하여, 피해자에 대한 구제와 배상, 지원 방안,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법원의 판결이 선고되고 가해자가 처벌되고 난 뒤에도, 황폐하게 남은 피해자의 삶을 돌아보고 회복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의 삶의 회복'이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 법원과 수사기관의 역할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CMIT/MIT 성분 가습기살균제 유통·생산 기업들에 대한 형사항소심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피고인측은 '형사처벌이 없이도 기업들은 이미 피해자의 건강 회복에 필수적인 의료지원을 하고 있으니 이를 피고인들에게 유리한 양형사유로 반영해달라'고 변론하였다. 피고인들이 강력한 양형사유로 주장한 피해자에 대한 유무형의 지원, 피해의 원상회복은 마땅히 국가가 책임졌어야 하는 부분이다. 범죄피해자 보호법 제4조는 범죄피해자 보호·지원을 위한 국가의 각 조치 및 재원 조달 책무를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2024. 2. 6. 서울고등법원의 또 다른 판결에 따르면 국가는 가습기살균제 참사의 원인이 된 유해물질의 유통을 막기 위한 의무를 유기한 방관자이자, 피해자들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배상할 책임이 있는 가해자였다. 2009년생인 피해자가 중학생이 될 나이가 되어서야 국가의 배상책임이 인정되었다. 지난한 법적절차에서 정의가 지연되는 동안 국가는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인 국민을 구제하고 지원할 법적 의무의 주체로서 주어진 소임을 다하였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2월 28일, 정부가 가습기살균제 참사와 관련하여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에 상고하기로 하였다는 기사를 접하였다. 서울고등법원이 인정한 가습기살균제 참사 관련 국가배상금은 300~500만 원에 불과하였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데 그조차 요원함은 무슨 까닭인가.
 
237439607_C58swLTl_11b8108fcd0ef06cc8a48fec96747660041bfe1d.jpg
▲  조은호 변호사 (월간변론 편집위원)
ⓒ 민변

 

 

덧붙이는 글 |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공익인권변론센터는 2016년 4월 21일 민변 변호사들의 공익인권변론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자 설립되었습니다.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월간변론 편집팀의 '시선'은 민변 회원들에게 매월 발송되고 있는 '월간변론'에 편집위원들이 기고하는 글입니다. '시선'은 최근 판례와 주요 인권 현안에 대한 편집위원들의 단상을 담고 있습니다.
 
0 Comments
시민환경보건센터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