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의심스러울 땐 피해자 편에 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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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의심스러울 땐 피해자 편에 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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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의심스러울 땐 피해자 편에 서길

경향 2023.8.29 


역사는 2023년 8월24일 벌어진 일을 또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할지 모른다. 이날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제1원전 부지 탱크에 보관 중인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본은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피폭국이다. 또한 일본은 1993년 2월 러시아가 1960년대부터 1993년까지 핵폐기물을 “오래된 관행”처럼 동해에 버렸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그해 11월 앞장서서 핵폐기물 해양투기를 전면 금지시키는 국제협약(런던협약)을 끌어냈다. 그랬던 일본 정부가 오염수 방류는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아닌 ‘과학의 문제’이며 국제사회에서 ‘과학적으로 국제 안전기준에 따른 것으로 문제가 없다’는 인정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김관욱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그렇지만 방사능 오염수가 미래에 어떤 피해를 초래할 것인지 과학적으로 100%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건 가해자를 감별해 낼 수 없는 일종의 ‘느린 폭력’이다. 인류학자 오은정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 사회에서 방사선 피폭을 우려하는 자국민들에게 “피해망상에 걸린 이기주의자”라는 딱지를 부쳤다고 지적한다. 즉, 합리적 의심의 내용이 아닌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또한, 2021년 8월5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무려 75년이 되어서야 일본 정부는 당시 원자폭탄의 ‘검은 비’(폭탄 구름에서 생긴 비)를 맞은 생존자들을 피폭자로 인정했다. 과학적으로 검은 비를 맞은 지역은 방사선량 노출이 극히 적다며 국가는 오랜 기간 이들을 외면해 왔다. 당시 원자폭탄 피해자들의 생애 수명조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하물며,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인한(그리고 오염수 방류로 인한) 인체의 피폭 영향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일은 수세대에 걸쳐 이루어져야 할지 모른다.

일본이 이처럼 각종 재난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을 포기하지 않는 배후에는 도쿄전력, 즉 원자력산업계가 있다. 핵산업은 아직 손실보다 이윤이 더 많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윤의 대상이 누구이고, 손실의 대상이 누구일까. 확실한 건 손실의 대상이 피해자이고, 이윤의 대상이 피고가 되었을 때 법은 과학(적 입증)을 빌미로 피고의 편에 서 왔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지난 6월8일 서울고등법원에서는 SK케미칼·애경산업·이마트의 가습기살균제 항소심이 진행됐다. 피고인(세 기업의 전직 임원 13명) 모두 2021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유는 가습기살균제와 폐질환·천식 간의 인과관계를 ‘과학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피고인들의 변호인들(60명의 대형로펌 소속)은 모든 연구조사의 한계를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그 속에서 피고인은 항상 반증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과학’과 합리적 의심이 완전히 제거되어야만 확정판결을 내릴 수 있는 ‘법’의 차이로 인해 법의 보호를 받아 왔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재해의 심판 과정에서 수없이 반복됐다. 최근 광반도체 제조업체에서 2년간 일했던 30대 노동자가 퇴직 6년 만에 파킨슨병이 발병했고, 뒤늦게 산재 신청을 했지만 사용했던 화학물질에 대한 자료조차 남아 있지 않아 산재를 인정받기까지 3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피고인 업체가 항소를 제기했다. 한편, 2014년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에서 1년8개월 근무한 노동자 역시 퇴직 5년 후 급성 백혈병에 걸렸고, 산재 신청을 했다. 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근무환경이 개선되었다며 불승인했고 2년간의 소송 끝에 승소했다. 하지만 이미 그가 사망한 뒤였고, 공단은 항소를 제기했다.

완벽히 통제된 실험실이 아닌 이상 방사능 및 화학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해로움을 완벽히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잘 알려진 법 격언이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으로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원칙일 테다. 그런데, 만일 피고인이 거대한 권력과 부를 지닌 대상이고, 원고가 이들의 이익 때문에 질병을 얻은 피해자라면, 과연 법은 누구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할까. 더욱이 원고가 과학적 입증 가능성의 난제 앞에 불리한 상황이라면 말이다.

법은 이럴 때 과학을 ‘피고인의 이익이 아닌 피해자의 이익으로’ 우선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일본 정부도,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와 반도체 제조업체 그 누구도 지금껏 피해가 아닌 이윤만을 얻지 않았던가. 이것이 진정 법이 추구하는 합리적 의심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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