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주의 세상탐사] ‘나쁜 사고’와 위험증폭사회
환경보건시민센터 운영위원 안종주 박사의 내일신문 2013년 2월15일자 칼럼입니다.
'산 넘어 산'이란 말이 있다. 애초에는 '山 넘어 山'이었으나 대한민국에서는 '酸 넘어 酸'이다. 불산 고개를 넘으니 염산, 다시 한 고개를 넘으니 불산, 또 불산이다. 지난해 9월에는 5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준 구미 휴브글로벌 불산 누출사고가 온 국민에게 불산이란 용어를 친숙하게 만들더니, 이제는 폭죽 놀이라도 하듯 곳곳에서 산(酸) 시한폭탄이 터지고 있다. 올 들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사건만 해도 경북 상주 웅진폴리실리콘(주) 염산누출사고(1월 12일), 충북 청주 (주)지디 불산누출사고(1월 15일), 삼성전자 경기 화성공장 불산누출사고(1월 27일) 등을 꼽을 수 있다.
특히 삼성전자 불산 누출사고는 사망자가 나온 데다 세계 초일류기업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충격이 더 컸다. 휴대폰·반도체 제조와 판매는 분명 일류인 것 같은데 산재·사고 예방과 관리, 위기 대응은 삼류에도 못 미치기 때문이다. 우리를 더 부끄럽게 만든 것은 구미 불산누출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운 상태에서 유사한 사고가 잇따라 터졌다는 점이다. 소 잃고 외양간도 고치지 않는 것이다.
구미 사건에서 교훈을 얻어 정부와 기업이 산업·환경안전에 대한 사고방식과 제도, 그리고 산업보건 행정을 확 바꾸었어야 하는데도 늘 그러하듯이 이를 게을리 해 화를 자초한 것이다. '조치는 느리게' '은폐·축소는 재빠르게' '조사는 비과학적으로' 한 탓이다.
이번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동안 산재·직업병 사건이나 환경사건과 관련해 늘 이렇게 해왔다. 소 잃은 기업, 정부 모두 외양간 고치는 데 드는 비용이 더 비싸고 차라리 잃는 소 보상 비용이 더 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고는 피할 수 없는 성격을 띤다. 우리가 자동차나 비행기, 버스, 기차를 타고 다니는 한 교통사고는 일어나기 마련이고, 이런 위험은 피할 수 없다. 현대 사회는 위험제로 사회라는 이상을 이룰 수 없다.
사후조치는 느리게, 은폐축소는 재빨리
하지만 음주운전을 하거나, 교통신호를 무시하거나, 정비를 게을리 해서 생기는 사고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나쁜 사고다. 나쁜 사고는 그동안 대한민국 산업현장 곳곳에서 일어났고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하다는 것이 이번에 여실히 드러났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이 세계 최고라고 전 세계에 내세우는 삼성전자에서조차 나쁜 사고는 오랫동안 발생해왔다. 이번에도 사망을 피할 수 있었던 노동자를 무늬만 세계 일류 기업이 사실상 죽음으로 내몰았던 셈이다.
많은 사람들은 삼성전자 화성공장에서 일어난 불산 누출 노동자 사망 사건을 보면서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도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삼성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잇단 직업성 암 사망 사건을 떠올리고 있다.
회사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노동자의 죽음이 회사와는 무관하다는 놀라운 발상 때문에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두번 죽게 만든 기업이 이번 불산 누출 사건에서도 자신들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미 불산에 상당 노출된 노동자를 새벽에 다시 불러내 죽음으로 몰았다. 노동자가 사망하고 난 뒤에야 노동 당국에 사고를 신고했다. 삼성의 이런 태도는 주민들을 분노케 했다. 언론도 삼성을 나무랐다. 경찰도 삼성전자 관계자와 보수공사를 맡은 하청업체 관계자를 불러 진상을 조사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뻔하다. 실무 관계자 몇명 입건해 사법처리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며 대부분 벌금형으로 마무리 될 것이다. 늘 그러했듯이.
환경보건시민센터 운영위원 안종주 박사의 내일신문 2013년 2월15일자 칼럼입니다.
지역주민과 노동자들이 나서야 한다
나쁜 사고는 이처럼 사건이 터지면 이제는 확실하게 하라고 언론이 떠들고, 기업도 반성하는 척하고, 정부도 대책을 마련하는 것처럼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유야무야가 되는 사회에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아니라 나쁜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사회는 위험증폭사회이다. 위험증폭사회는 정부와 기업이 시민들과 노동자의 생명을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 사회이다.
지역공동체 주민들과 노동자가 떨쳐 일어나야 위험증폭사회의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다. 인근 공장에서 어떤 위험물질을 다루는지, 지역주민과 학교, 인근 공장, 소방서 등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법을 만들어야 한다. 이는 최소한의 대책이다. 더는 자신들의 생명을 노동·환경당국과 기업들에게 맡겨놓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소 잃은 뒤 외양간을 제대로 고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