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녹는 속도보다 느린 기후변화협상
카타르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18)이 남긴 것
교토의정서 연장 등 성과 있으나 지지부진, 지구 온도 4도 상승 불가피
현지 시간으로 지난 8일의 일이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순간이었다. 총회 의장으로서 물밑 협상을 주도해 왔던 카타르의 압둘라 빈 하마드 알티야가 예고 없이 합의문이 통과되었음을 알리는 망치를 두드렸다.
이른바 '도하 기후 게이트 웨이'가 통과되는 순간이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대표단들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장내에서 쏟아지는 환호와 박수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알티야의 승리이자 독무대였다. 그는 협상 초기에는 ‘너무 느긋한 스타일’이라는 비판을 들었지만, 막판에는 러시아 등의 반란을 단숨에 진압하는 뚝심을 발휘하면서 파국을 막은 일등공신이 되었다.
아래에서는 카타르 도하에서 2주간 열렸던 제1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18)의 주요 결과를 요약해 소개한다.
1. 교토의정서 연장
● 선진국들의 온실가스 의무 감축을 규정한 교토의정서는 연장되어 2013년 1월부터 예전과 같은 효력을 갖게 되었다. 제2차 공약기간은 선진국들의 희망대로 8년으로 결정됐다. 따라서 교토 유연성 메커니즘으로 불리는 청정개발체제(CDM), 공동이행제도(JI), 배출권거래제(ETS) 등은 최소한 2020년 말까지 교토의정서에 참여하는 선진국들의 감축 수단으로 인정받게 된다.
● 미국은 중국, 인도 등 주요 개도국의 불참을 핑계로 1차 공약기간에 이어 이번 연장기간에도 의무감축국에서 빠졌다. 1차 공약기간에 참여했던 러시아, 일본, 뉴질랜드는 미국과 같은 이유를 들어 2차 공약기간 참여를 거부했다. 캐나다는 교토의정서를 아예 탈퇴해버렸으며, 개발도상국의 지위를 갖고 있는 중국과 인도는 애초부터 교토의정서 의무감축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연장된 교토의정서는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15%만 규제할 수 있게 됐다.
● 이처럼 많은 한계에도 교토의정서 연장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평가된다. 향후 새로운 기후변화체제에 대한 협상 과정에서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적극적인 참여를 압박할 수 있는 디딤돌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 제2차 공약기간에서는 지금까지 감축 대상이었던 6종의 온실가스 외에 삼불화질소(NF3)가 새롭게 추가된다. 삼불화질소는 평면 모니터와 태양전지 생산에 사용되는 물질이다. 전문가들은 이산화탄소보다 1만 7200배나 강력한 온실가스라는 점에 주목해 삼불화질소를 ‘교토의정서가 빠뜨린 온실가스’라고 불러 왔다.
2. 잉여 배출권(핫 에어)의 효력
●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구 동구권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잉여배출권의 효력은 2차 공약기간에서는 제한된 형태로만 인정된다. 유럽연합 회원국들과, 호주, 일본, 리히텐슈타인, 일본, 모나코, 노르웨이, 스위스 등은 2차 공약기간으로 넘어오는 배출권(AAUs)을 구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 새로운 기후변화체제가 출범할 2020년 이후에도 잉여배출권의 거래가 허용될지는 분명하지 않다. 잉여배출권의 양은 전 세계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분의 1에 달하는 약 130억 톤으로 추산된다. 환경운동가들은 잉여배출권이 효력을 갖는 한, 2020년 이후 미국과 중국이 이들을 대량 사들여 국내 감축을 회피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3. 새로운 기후변화체제 마련을 위한 협상 시간표
● 2020년 출범 예정인 새로운 기후변화협약을 둘러싼 협상을 2015년까지 완료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하고 이를 현실화하기 위한 대강의 시간표가 제시되었다.
● 우선 각 국 정부는 유엔 기후변화협약 사무국(UNFCCC)에 제출한 자국의 감축공약을 재평가한 후, 2014년 4월 30일까지 더욱 과감한 감축목표 제시 여부를 검토한다는 데에 합의했다. 이를 위해 2013년 3월 1일까지 유엔 기후변화협약 사무국에 1차 평가 결과를 제출하기로 했다.
● 협상문에 담길 주요 내용은 늦어도 2014년 말까지 마련함으로서 협상문 초안이 2015년 5월 이전까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14년에 별도의 세계 정상회의를 소집해 정치 지도자들의 의지를 북돋을 것이라고 말했다.
● 유럽연합은 2015년 이전에 감축목표를 현 20%에서 30%로 상향조정함으로서 미국과 중국 등을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미국은 2020년까지 2005년 배출량 대비 17% 감축한다는 약속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이는 기준년도를 1990년으로 잡을 경우 4% 감축 수준에 불과하다.
4. 녹색기후기금(GCF) 등 개발도상국 재정 및 기술 지원
●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인 선진국의 개도국 지원기금 출연 계획은 '기금 출연 액수를 지금부터 2020년까지 반복적으로 상향 조정해 1000억 달러 수준까지 높인다'는 원론적인 수준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하지만 기금 문제에 대한 논의를 단순히 1년 미룬 것에 불과하다는 강한 비판이 군소도서국가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 개발도상국 지원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중기 지원기금으로 2015년까지 매년 100억 달러 규모의 기금을 제공한다는 데에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는 G77과 중국 등 개도국이 요구했던 3년간 총 600억 달러의 절반 수준 규모다.
● 2015년까지 개발도상국들을 지원하게 될 녹색기후기금의 출연 액수는 영국, 독일,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 덴마크 등 유럽의 일부 국가들만 구체적으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들이 내놓은 지원 규모를 모두 합하면 60억 달러에 불과해 나머지 금액의 조성 여부는 불확실한 상태로 남겨져 있다.
●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을 인천 송도에 설치한다는 안과 GCF 재정상임위원회의 계획이 인준되었다. GCF 사무국은 내년 하반기부터 업무를 개시해 2014년부터는 실질적인 기금 조성 및 집행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 개발도상국으로의 기술이전 문제를 다루게 될 기후기술센터(CTC)의 호스트는 향후 5년간 유엔환경계획(UNEP)이 이끄는 컨소시엄이 맡기로 했다. 또한 CTC 자문위원회의 구성에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5. 기후변화 ‘손실과 피해’에 대한 보상
● '도하 기후 게이트웨이' 합의문에는 ‘손실과 피해’에 대한 보상 원칙이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되었다. 이는 기후변화 피해를 입은 국가들에 대 선진국의 지원 의무를 적시한 것으로서 ‘원인자 책임 원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평가된다.
● 개발도상국들은 새롭게 추가된 이 규정이 향후 기후변화협상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기후변화 피해에 대한 보상이 단시일 내에 가시화되지는 않겠지만, 향후 선진국들의 책임을 요구할 수 있는 단서 정도는 마련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좀처럼 주목받지 못했던 ‘손실과 피해’에 대한 보상 문제가 이번에 도하에서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르고 합의문에도 포함된 데에는 최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허리케인 샌디의 피해 복구 예산으로 의회에 600억 달러의 예산 편성을 요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미국은 ‘손실과 피해’에 대한 보상액은 별도의 기금이 아니라 연간 1000억 달러 규모가 될 녹색기후기금의 일부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어 향후 협상 과정에서 거센 논란이 예상된다.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은 올해에만 작년 대비 약 2.6% 늘어났으며, 1990년 배출량의 50%나 증가한 상태다. 도하 기후변화협상이 교토의정서 폐기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은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산업화 이전에 비해 지구 기온이 2℃ 이상 상승하는 것을 억제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합의에 비춰보면, 이번에도 공수표와 제스처만 난무했다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도하에서 합의된 내용이 모두 지켜진다 하더라도 획기적인 방향 전환이 없이는 4℃ 이상 상승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 협상의 속도가 빙하가 녹아내리는 속도보다 더 느리다”는 지적은, 기후변화의 진행 속도와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국제사회의 태도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015년까지 새로운 기후변화체제를 두고 진행될 협상 과정에서 배출량 순위 세계 7위인 우리나라에 대한 온실가스 감축 압력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다.
따라서 차기 정부가 짊어질 짐은 매우 무거울 수밖에 없다. 현행 국가감축목표가 국제사회의 요구와 흐름에 부합하는 수준인지 살피고, 보다 과감한 감축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제도를 재정비해야 한다. 또한 각 부문과 업종별로 실질적인 온실가스 감축 여부를 꼼꼼하게 점검해 배출량 증가 추세를 주도하고 있는 요인 찾아내는 일이 시급하다. 협상 전략도 대폭 수정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의 규범은 해야 할 일을 미루면 언젠가는 응분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도록 되어 있다. 지금은 녹색기후기금(GCF) 사무국 유치를 과대 포장해 우리나라가 마치 기후변화 대응 선도국이 된 것처럼 취해있을 때가 아니다. 다음세대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감당해야할 책임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숙고하는 태도가 요구된다.
안병옥 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
위 글은 한겨레 환경블로그 <물바람숲>에 실린 글입니다. 2012년 1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