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가습기 살균제가 20대 국회에 던진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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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가습기 살균제가 20대 국회에 던진 숙제

최예용 0 5897

[시론] 가습기 살균제가 20대 국회에 던진 숙제

 

중앙일보 2016 6 8 

 

가습기 살균제 문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래 일화를 상기하며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1. 민사소송에서 피해자 중 상당수는 가해 기업과 ‘화해’했다. 사망하거나 중증의 피해자의 경우 화해 금액은 교통사고 사망 시 위자료를 참고해 2억~3억원 사이에서 정해졌고 화해 내용의 비공개가 화해 조건으로 붙여졌다.

#2. 옥시 전 최고경영자(CEO)는 장애 아들을 헌신적으로 양육한 아버지였다.

#3. 세퓨 대표의 딸은 아버지가 인터넷 정보를 참고해 원료물질을 적당히 배합해 만든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과도 없는, 교통사고 사망 시 위자료 기준이 적용된 화해를, 함구를 조건으로 받아들인 피해자들. 헌신적인 아버지였지만 흡입독성 실험의 필요성을 시사한 내부 보고를 무시했던 CEO. 자신이 만든 제품의 치명적 위험성에 완전히 무지했던 아버지…. 이런 부조리는 누구(무엇)에 의해 어떻게 생산되고, 또 유지되는가.

평등하게 설계됐다는 민사재판에서도 가해 기업의 강자성은 여지없이 관철된다. 현행 시스템에선 ‘책임 부인’이 기업엔 이익이다. 정보는 기업에 있지만, 인과관계의 입증 책임은 피해자에게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법정감정인의 이용에도 현실적 제약이 크다. 법정에서 기업의 책임회피성 변론에, 마땅히 이겨야 할 재판에조차 질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에 피해자들은 그만 지쳐버린다. 그리고 턱없는 금액으로 화해하고 소송을 포기하기 일쑤다. 요행히 승소 판결을 받더라도 기업은 재빨리 판결 금액을 송금하고 책임을 털어버린다. 최근 희생자나 제품 이름을 딴 특별법 논의가 잦다는 사실은 현행 사법 시스템이 기능 부전 상태라는 분명한 증거다. 사법구제 시스템에 변화를 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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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 전 CEO의 이중 행태가 비난받았다. 하지만 그는 가정에선 훌륭한 아버지로, 회사에선 뛰어난 경영자로서 규범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이윤이 생존 원리인 기업에 최소한의 윤리경영을 기대하려면 기업의 ‘셈법’에 변화를 줘야 한다. 세퓨 대표의 무지는 정부의 그르친 유해성 심사와 물질의 용도 변경을 통제하지 않고, 관리 대상 품목에 한해 제품 안전성을 확인할 의무를 지운 규제 시스템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규제 시스템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20대 국회에 다음과 같은 입법 과제를 숙제로 남겼다. 먼저 피해구제법의 정비다.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는 하자 있는 제품을 사용한 소비자와 제조사 간의 민사소송으로 해결돼야 한다며 피해구제특별법안에 반대했다. 그러나 국가는 국민의 생명·신체 등을 보호할 헌법상 의무를 지고 있다. 따라서 피해구제법을 통해 국가가 선(先) 구제- 후(後) 가해 기업에 구상소송을 진행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부가 나서는 구제 과정에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고, 향후 손해배상소송에서도 피해자에게 유리한 소송 환경이 조성된다.

기업의 셈법에도 변화를 줘야 한다. 기업이 사고를 예방하고 사고가 터진 경우 능동적으로 수습에 나서는 게 결국 ‘더 이익’이라고 판단하도록 말이다. 이와 관련해 일찍부터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론이 제기됐으나 학계는 신중론 내지 부정론이 다수다. 그렇다면 그 대안으로 ①위자료 규정 활용 방안, ②(피해구제기금에 편입되는) 과징금 부과 방안, ③(기업 처벌을 전제로) 범죄수익환수제 활용 방안 등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기업의 셈법에 변화를 주려면 위자료·과징금 등이 ‘최소한’ 해당 제품 매출이익의 상당 부분에 이르도록 끌어올려야 한다. 또 기업도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옥시에 집중된 비난의 핵심은 “비용 절감을 위해 공업용 세척제를 원료로 쓰면서 비용 지출이 싫어 흡입독성 실험을 하지 않은” 의사 결정의 ‘의도적 무모성’에 있다. 이러한 무모한 의사 결정을 막으려면 기업을 처벌해야 한다. 경영자는 갈아치우면 그만이다. 영국이 2007년 ‘기업살인법’을 제정한 까닭도 기업을 처벌해야 스스로 안전 관리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위해물질 규제의 근본 기조도 변화돼야 한다. 화학물질의 용도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도록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법(화평법)’을 고쳐야 한다. 가습기 살균제와 같은 소위 ‘살생물제’는 선진국처럼 별도의 법으로 관리해야 한다. 화학물질과 제품의 감독 권한이 분산돼 있는 행정 사각지대도 물질-제품 통합 관리 방식으로 제거해 가야 한다.


하지만 이런 개별 처방 방식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용도 변경에 따른 유해성재심사제도가 없어도 옥시는 흡입독성 실험을 했어야 한다. 그러나 하지 않아도 위법은 아니다. 규제는 규제 밖의 것은 허용되는, 위법이 아니라고 여기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해당 물질과 제품에 최신 정보를 가진 기업이 스스로 안전을 점검하고, 정부가 그 유효성을 확인·보완하는 규제 방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규제 정비와 기업의 위험 관리 체계의 구축은 반드시 같이 가야 한다.

박 태 현
강원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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