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피해 입증 책임 국가가 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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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피해 입증 책임 국가가 지라

최예용 0 5033
가습기 피해 입증 책임 국가가 지라  

2016년5월22일 한삼희 칼럼, 조선일보 

대기오염 물질 가운데 제일 주목받는 것이 초미세 먼지다. 이걸 'PM 2.5'라고 부르는데, 직경이 2.5마이크로미터(1㎛=100만분의 1m) 미만이라서다. 워낙 작아 기관지 점막에서 걸러지지 않고 허파의 말단 폐포(肺胞·허파꽈리)까지 도달한다. 그런데 2011년 안전성평가연구소가 가습기에서 분무되는 PHMG(옥시싹싹 가습기당번 원료)나 CMIT(애경 가습기메이트 원료) 덩어리의 입자 크기를 조사해봤더니 0.1마이크로미터 수준이었다. 초미세 먼지 25분의 1 크기였다.


사람의 독성 물질 노출 경로는 ①소화기 ②피부 ③허파 세 가지다. 위, 장 같은 소화기는 점막으로 보호돼 있다. 피부는 죽은 세포가 쌓인 진피층이 보호하고 있다. 반면 폐포는 산소·이산화탄소 같은 가스가 직접 혈액으로 녹아들거나 빠져나오는 출입구다. 그래서 허파 흡입을 혈액에 꽂아넣는 정맥주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PHMG·CMIT 등의 합성 화학물질은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어서 아무리 항생제를 투여해도 먹히지 않는다. 이것들이 폐포를 공격하면 폐섬유증을 일으킨다. 폐포가 염증을 일으켰다 아물었다 반복하면서 굳어버려 기능을 못하는 것이다. 이런 폐섬유증이 있느냐 없느냐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 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2011년 안전성평가연구소 흡입 독성 실험에서 CMIT는 PHMG와 달리 독성이 확인되지 않거나 아주 미약했다. 그래서 질병관리본부는 애경 제품을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서 배제했다. 그러나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CMIT 경우 특성상 허파보다 다른 장기에 피해를 주는 것일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놨다. PHMG는 분자량이 1만8500이나 되는 고분자 화합물이다. CMIT는 분자량이 149밖에 되지 않는다. CMIT의 분자 단위 크기가 워낙 작아 허파에 직접 피해를 끼치기보다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운반돼 다른 장기들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하대 임종한(산업의학) 교수도 비슷한 견해를 얘기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다른 장기 피해는 거의 인정해주지 않는다.

문제는 말도 안 되는 제품을 만들어 '위험하지 않다'며 팔았던 기업, 그 위해성을 걸러내지 못하고 공인 인증까지 내준 정부, 그리고 기업 광고와 정부 관리 시스템을 신뢰했다가 피해 입은 소비자 가운데 누가 입증(立證)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점이다. 피해자들은 가습기 살균제 구입 영수증과 의료기관 치료 기록을 일일이 찾아내 제출해야 한다. 애경 가습기메이트를 썼다가 거의 관련 없다는 뜻의 '4등급' 판정을 받은 어느 주부는 비슷한 처지의 22명 자료를 수집해놓고 너무 억울하다며 호소하고 있다. 가습기메이트를 썼다가 목에 튜브를 끼고 살았던 다섯 살 나원이는 그제 수술을 받고 3년 반 만에야 튜브를 떼어냈다. CMIT 제품으로 피해 입었다고 시민단체에 신고한 167명 중 정부가 인정한 건 나원양 등 세 명뿐이다.

피해자에게 입증 책임을 지우는 것은 야구 놀이를 하다가 이웃집 창문을 깬 걸 본 목격자까지 있는데 집주인더러 '녹화한 CCTV라도 가져와야 배상해주겠다'고 하는 거나 다름없다. 유리창 깬 사람은 옥시가 교수를 매수했듯 증거물인 야구공을 어딘가 숨겨놨을 수도 있다. 가습기 살균제는 유리창을 깬 정도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렸다.

가습기 살균제가 1994년부터 팔려 참혹한 결과를 낳았는데 정부는 17년 방치했다. 2011년 원인이 밝혀졌는데도 기업은 5년 지나서야 마지못해 사과했다. 주무 장관은 '정부가 세금을 쓰면서 책임지는 건 옳지 않다'고 말해 피해자들 가슴을 후벼 팠다. 만일 당신이 피해자라면 정부에게서 '스스로 입증해 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심정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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