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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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관리자 0 9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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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무려 53명이 죽었다. 주로 임산부와 갓난아이들이었다. 이는 시민단체에 접수된 수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직 신고하지 않은 사람, 실제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당하고도 어떻게 죽었는지 잘 몰라 그냥 지나친 사례,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난 사람, 1억 원이 넘는 비용을 들인 끝에 폐 이식 수술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사람을 더하면 그 피해자는 훨씬 많을 것이다. 이처럼 중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알게 모르게 폐기능이 손상된 사람까지 더하면 그 피해 규모는 실로 엄청날 것이다.

정말 예삿일이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 대한민국에서 터져 나왔다. 화학물질에 의한 환경재앙이다. 이타이이타이병이나 미나마타병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세계 학자들이 관심을 보일만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런 환경재앙을 당하고도 어느 누구도 “내 잘못이오.”를 외치지 않는다. 정부도, 살균제 판매기업도, 전문가도 “내 탓이오.”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죽였는가?

그런데 “사실상 내가 죽였다.”고 울먹이며 말하는 이들이 있다. 임신한 아내의 건강이 걱정돼, 또 아내의 가습기 청소가 힘들까봐 자신이 살균제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해 아내가 이를 사용하다 숨지자 망연자실한 남편이 뒤늦게 후회하며 내뱉은 한 맺힌 절규다. 그들의 절규는 죽음 앞에서조차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세상을 향해 던지는 비수다. 일부 가습기 살균제 회사 경영진들은 이번 일로 회사가 쫄딱 망하게 생겼다고 푸념들을 한다. 아무리 ‘내 코가 석자’라고 하지만 해도 너무 한 것 아닌가. 아내와 자식을 잃은 남편들은 부디 자학을 멈추고 정신을 차려 진짜 ‘살인’의 책임자를 향해 비수를 들이대기 바란다.

사실 이번 일의 일차적인 책임은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회사에 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상품 사용설명서대로 충실하게 사용하다 변을 당했다. 어떤 회사는 살균제 제품에 어린이에게 사용해도 안심이라는 문구까지 버젓이 달아놓았다. 그렇다면 이번 가습기 살균제 집단 사망 사건은 당연히 살균제 제조·판매 회사의 책임일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회사도 나서서 “우리가 모든 책임을 지고 피해보상을 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들 가습기 살균제 판매회사들은 ‘우리가 고의로 한 것이 아니며 정부의 허가를 받아 판매한 제품이기 때문에 소송을 하려면 해 봐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일차적인 책임은 기업에 있지만 정부 또한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청, 환경부, 지식경제부 등 그 어느 곳도 자신들에게 잘못이 있다거나 제품안전관리를 소홀히 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들 정부 부처 가운데 적어도 한 곳은 사건이 이 지경에 이른 것에 대한 책임을 말해야 한다. 특히 의문의 집단 폐질환 사망 사건의 용의자가 가습기 살균제임에도 확실한 증거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몇 달간 계속 판매토록 내버려 둔 정부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만약에 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찾아냈다면 아직 완벽한 물증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가 거리를 활보토록 내버려 두었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체포해 추궁을 했을 것인가. 가습기 살균제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살인마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자이지 않은가. 정부의 태도는 시민의 생명보다 기업 활동 또는 기업이윤이 우선이라고 여긴 것이나 진배없다. 적어도 보건복지부나 식약청, 환경부처럼 국민의 건강과 생명, 안전을 책임지는 부처는 기업 우선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이 정도의 사건이라면 대통령이 나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 보완과 피해자 보상을 이야기해야 마땅하다

이번 사건의 교훈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화학물질도 때론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선진국 등 외국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대한민국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기업, 정부, 전문가 모두 이번 일을 계기로 이를 뼛속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국민의 안전이나 생명, 건강을 돌봐주지 않는 사회는 결코 시민들이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회이다. 더더군다나 수많은 생명의 죽음 앞에 ‘나 몰라’하는 태도를 보이는 정부는 더는 국민의 정부가 아니다. 오롯이 기업을 위한 정부다. 죽은 생명은 다시 살아올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그들의 넋이라도 기리겠다면 정부가 나서서 이들의 가족들이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온 몸을 던져야 할 것이다. 이는 정부가 존재하는 최소한의 이유이다.

안종주/언론인·전 <한겨레> 보건복지전문기자, 환경보건시민센터 운영위원

* <오피니언>란은 주요 환경보건문제에 대해 전문적 식견과 피해자의 입장에서 문제의 실상과 해결방향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환경보건시민센터'에 참여하는 운영위원, 회원 시민의 글을 소개하는 곳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글과 의견을 기다립니다. 02-741-2700, choiyy@kfe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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