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책임'과 '책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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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책임'과 '책임감'

최예용 0 8777
세 살 먹은 건강한 아이가 갑자기 원인 미상의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비슷한 사례가 잇달아 보고되었다. 지금까지 유사 피해 신고 사례만 370여건이다. 질병관리본부 조사 결과, 피해자들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경우가 많았는데, 살균제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보다 폐렴 발생 위험이 47배 높은 것으로 나왔다. 기업은 제품 판매를 중단했다.

정부 발표와 언론 보도를 요약하면 이렇다. 기업은 치명적 위험성이 있을 수 있는 화학제품을 만들었고, 정부는 제대로 관리감독을 하지 않았으며, 기업과 정부를 믿고 제품을 쓴 소비자는 가족을 잃거나, 생존했어도 직장을 잃고 엄청난 의료비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

2년 전 발생한 이 사건은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한 기업이나 정부 부처는 없고, 피해자 보상도 없으며, 유사 피해 재발을 위한 구체적인 예방책도 없다. 그나마 질병관리본부는 문제 원인을 밝혀 제품 판매 중단 권고 조처를 취했고, 피해자 폐 손상 정밀조사 재실시를 어제 약속했다. 또한 복지부 장관은 외면당하던 피해자들을 만나 유감의 뜻을 표했으며, 심상정 의원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구제’ 결의안을 대표 발의해 본회의를 통과시켰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지난 2년을 보건대, 정부와 기업은 피해자 보상과 관련해 소극적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는 이번 사건 피해자들을 보상해줄 관련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특별법 제정이나 또다시 몇 년 걸릴 소송 결과를 기다릴 가능성이 크다. 2012년 <조선일보> 보도에 의하면 공정거래위 관계자는 해당 업체들이 “살균제 원료를 흡입하면 인체에 위험하다는 사실에 대해 충분히 알고도 판매한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해당 기업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부 조사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법적 소송에 대비해 사망 사고와 자사 제품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피해자들은 현실적으로 특정 기업의 잘못을 법정에서 입증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결국 정부와 기업의 책임 공방 사이에서 피해자들만 심한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해결책은 ‘책임’이 아닌 ‘책임감’에 있다. 책임은 결과에 대한 의무나 위법 행동에 대한 제재를 뜻하고, 책임감은 의무를 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정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못한 것에 대해, 기업은 자사 제품과 관련해 고통받는 소비자를 위해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

이 사건에서 책임감을 어떻게 구체화할 수 있을까? 첫째, 피해자가 거대 기업을 대상으로 법정 싸움을 하기보다 정부가 구상권을 통해 먼저 피해자들에게 보상하고, 국가가 기업과 해결하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다. 둘째, 정부는 이번 사건을 통해 화학제품으로 인한 원인 미상의 피해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향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풀어야 한다. 아직까지 구체적 예방책에 대해 어느 정부 부처도 내놓은 바가 없다. 셋째,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의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기업들도 제품 판매를 중지한 상황에서 직접 피해 보상은 못한다 하더라도 해당 기업들이 피해자 치료비에 도움을 주기 위한 기금을 조성해 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 출마 선언에서 강조한, 어떤 국민도 홀로 뒤처져 있지 않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먼저 억울한 국민을 도와줘야 한다. 박 대통령은 정부와 기업이 법적 근거만 대며 발 빼고 있을 때 ‘창조적’ 해결방안을 지시하고 예방책을 주문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법적 책임’은 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책임감 있는 행동’을 취해주길 바란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2013년 5월6일자 한겨레신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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