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은 눈을 감고 덮쳐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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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눈을 감고 덮쳐온다

최예용 0 3968

불행은 눈을 감고 덮쳐온다

 

한겨레 2017 2 8 

 

아들 권쥐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권쥐는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마침 뉴스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폐렴 환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했다. 아내 쏭과 나는 관련 보도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 또 새로운 바이러스가 출현한 건 아닐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급성폐렴의 원인은 뜻밖에도 가습기 살균제였다. 가습기 살균제의 몇몇 성분이 폐 섬유화를 유발했고, 자칫하면 사망에 이르게도 한다고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트에서 가습기 살균제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1 판촉행사는 물론, 위생용품 코너만 가면 담당 점원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가습기 살균제를 마치 가족의 건강을 위해 빠뜨려서는 안 되는 계절상품처럼 권유했다. 몇 번이나 살까 말까 망설였었다. 감기를 달고 사는 권쥐에게 효과가 있을 것 같았고, 가습기를 매일 세척하는 수고를 덜 수 있겠다 싶었다.

 

 

만약 가습기 세척이 조금만 더 번거로웠다면, 점원의 홍보에 솔깃했다면 가습기 살균제를 진작 사용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담당 점원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제조사와 유통업체로부터 홍보에 동원됐을 뿐이니까. 내 눈에도 가습기 살균제가 생화학무기나 번개탄처럼 치명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치명적인 줄 알았다면 담당 점원은 아마도 이렇게 귀띔해줬겠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사용하지 마세요.”

 

 

가습기 살균제는 1994년부터 판매됐고, 2006년부터 급성폐질환 환자가 늘어났다. 당시 몇몇 의사가 문제를 제기했지만, 정부는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2011년 폐 손상으로 인한 사망자가 급증하면서 정부는 뒤늦게 역학조사를 실시했고, 그해 8월 사망 원인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지목했다. 하지만 후속 조처는 더디기만 했다.

 

관련 사건의 1심 선고는 가습기 살균제가 사회적 문제가 된 지 6년, 시민단체가 고소한 지 5년 만인 지난달 6일에야 내려졌다. 그나마도 신현우 옥시 전 대표는 징역 7년형, 존 리 전 대표는 혐의가 충분히 입증되지 않아 무죄를 선고받았다. 홈플러스 같은 유통업체는 가벼운 벌금 말고는 아무 제재도 받지 않았다. 게다가 정부는 환자의 피해 등급을 나눠 지원·보상에 차등을 뒀고, 폐 섬유화 증상 외 기흉, 급성천식 등 다른 여러 피해 사실은 축소하기 바빴다.

 

 

한때 일요일 저녁이면 온 가족이 티브이 앞에 둘러앉아 <1박2일>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지켜봤다. 오늘은 출연자 중 누가 노숙을 하게 될까 손에 땀을 쥐면서. 그 덕분에 “인생은 복불복”이라는 말도 덩달아 유행했는데, 그 말은 꼭 불행도 복불복이라는 얘기 같았다. 하지만 한번 시작된 현실 속 불행은 노숙 정도의 벌칙으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가난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터무니없는 복지정책처럼 피해 사실 역시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면 구제받을 길이 없다. 억울한 마음에 시위라도 하면, 얼마나 더 큰 보상을 바라냐며 따가운 눈총을 받을 수도 있다.

 

 

반면 가해자들은 겉으로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하고, 뒤로는 피해자들의 피해 회복에 쓰여도 모자랄 큰돈으로 대형 로펌의 변호사를 선임해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그 모든 절차가 합법적이고, 피해자들은 그 합법적인 절차 속에서 위로는커녕 도리어 무너지기 일쑤다. 불행은 결코 복불복이 아니다. 공평한 불행을 바라는 건 아니다. 어떤 불행에 이유가 있다면 끝까지 추적하고, 마땅한 조처를 해줄 최소한의 상식을 바라는 것뿐이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 가습기 살균제 유가족도 했던 말이고, 세월호 유가족도 했던 말이다. 여러 편견과 오해, 합법적인 절차와 싸우다 일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말이기도 하다. 아니, 싸우는 게 일상이 된 사람들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들의 말을 얼마만큼 귀담아듣고 있을까. 사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불행이 우리를 인정사정없이 덮칠 때 그제야 그들의 절규를 되새긴다면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누군가는 “나만 아니면 돼” 하며 그들이 그저 불운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들에게 닥친 불행이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가족만 피해 가길 바라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불행은 자연재해처럼 눈을 감고 덮친다. 그 불행을 피할 가장 안전한 방법은 불행을 만든 주체가 되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불행의 근원을 제거할 주체가 되든지.

 

 

권용득 만화가·<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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