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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부끄럽습니다 / 이계삼

한겨레신문 201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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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분신자결한 어르신의 존재로 인해 경남 밀양시 산외면 보라마을은 송전탑 싸움의 성지가 되어버렸다. 끊이지 않고 찾아드는 손님들을 위해 국수를 삶아 내고, 농성장 당번을 서고, 행정대집행에 새까맣게 동원된 공무원과 경찰에 맞서고, 집회를 다니는 일들을 모두 70대 노인 10여명이 감당했다. 나머지 주민들은 관망했지만, 이장님에 대한 두 번에 걸친 만장일치의 신임투표로 지지해 주었다.

그러나 싸움은 녹록지 않았다. 공사 강행의 명분이었던 신고리 3~4호기 준공이 제어케이블 부품 재시험 탈락으로 2년 이상 뒤로 밀리고, 환경영향평가법 위반 사실이 밝혀지고, 4개 면에서 100명이 넘는 주민들이 현장에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공사는 중단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슬슬 패배감이 감돌기 시작했고, ‘개별보상금’이 헛헛한 마음들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2013년 연말까지 보상금을 타 가지 않으면 마을 자금으로 회수한다’는 공식 발표가 있었고, 보라마을에는 애초 책정된 개별보상금에서 얼마를 더 얹어준다는 소문이 돌았다.

순식간에 아홉 가구만 남긴 채 합의가 이루어졌다. 새로운 임기를 시작한 지 석 달밖에 되지 않은 이장님은 ‘반대 대책위의 지시를 따른다, 희망버스 때 동의 없이 강제로 참가자 숙소를 배정해주었다’는 당치도 않은 이유로 해임되어버렸다. 지난 2년, 투쟁으로 풍찬노숙했던 주민들은 졸지에 소수파가 되어버렸다. 좌절은 극심했다. 잠을 잘 수가 없었고, 합의한 사람이 미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결국은 나도 이 마을에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심리적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감을 잃고 기가 꺾여버린 주민들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다.

밀양 송전탑 싸움의 막바지, 10년간 싸워온 마을들에는 지금 눈 뜨고 지켜보기 괴로운 분란들이 이어지고 있다. ‘어디 마을은 합의금으로 땅을 샀다더라’, ‘어느 마을은 합의금으로 시내에 아파트를 두 채나 샀다더라’, ‘그거 되팔아서 나누어 가지면 된다더라’. 마을별 합의금을 편법 집행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한전이 지급하고 마을에서 엔(n)분의 1로 나누게 되어 있는 개별보상금에서도 ‘분모’를 줄이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고, 배제된 주민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대책위로 들려온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주민들에게는 ‘공사 끝날 때까지 마을 합의 안 하면 그 돈은 다 떠내려간다더라. 네가 책임질 거냐?’라는 듣기 괴로운 겁박들이 닥쳐든다.

주민들은 지금 실존적인 질문 앞에 놓여 있다. ‘지난 싸움은 나에게 무엇을 남겼던 것인가.’ 끝도 없이 이어진 싸움으로 몸도 마음도 성치 않은데,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돈으로 찢기고 원수가 되어간다. ‘것 봐라! 이리될 줄 몰랐더냐?’ 이런 소리에 악다구니가 치받아 오르지만, 예사롭게 들리지도 않는다. 우리는 잘못했던 것인가? 생존권을 지키고자 공권력에 맞섰던 일이, ‘돈’이 아니라 송전선 지중화와 핵발전소 증설 중단과 전력 정책 재검토를 요구한 일이 과연 쓸데없는 몸부림이었던 것인가? 금전이 동원된 위력시위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든 노인들은 지금 날마다 스스로를 향하여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보라마을 이장님은 4개 면 주민활동가들 중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마이크를 잡으면 청산유수로 이어지는 구성진 재담은 늘 배꼽을 쥐게 만들었다. 의롭고, 따뜻하고, 눈물 많은 분이었다. 그런 이장님을 나는 몹시도 좋아했다. 그런데 이장님은 내게 ‘미안하고, 죄송스럽고, 부끄럽다’고 면목 없어 하신다. 미안하고, 죄송스럽고, 부끄러워해야 할 인간들은 따로 있다. 이장님에 대한 나의 존경과 사랑은 조금도 변함없다. 다만, 저들이 ‘다 끝나간다’며 슬슬 휘파람을 불 준비를 하는 듯하여 그것이 분할 따름이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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