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에 함께 분노해준 국민이 고맙습니다
최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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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31 06:41
한겨레신문 2016년 5월5일
최예용 소장이 런던에서 보내온 편지
2011년 8월 가습기살균제 사건이 터진 때부터 피해자 가족과 연대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워 온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이 5일 새벽 <한겨레>에 편지를 보내왔다. 최 소장은 전날 가습기 살균제 가해기업 옥시레킷벤키저의 본사가 있는 영국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편지를 썼다. 그는 가습기살균제로 아들 승준이를 잃은 김덕종씨 등과 함께 5일 레킷벤키저 주총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이 회사의 부도덕함을 고발한 뒤 덴마크로 날아가 14명의 피해자를 낳은 세퓨 쪽 원료공급회사 케톡스를 항의방문 하는 등 일정을 마치고 오는 11일 귀국 할 계획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초기인 2011년 정부가 동물실험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 자리에서 대책 마련을 호소하며 울부짖은 피해자가 있습니다. 그는 세퓨라는 제품을 사용하다 하나뿐인 아이를 잃은 아빠였습니다. 아이를 잃은 상황은 부부를 갈라서게 만들었습니다. 엄마는 경상도 친정으로 돌아갔고 아빠는 힘든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2012년 10월 국정감사장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저는 한 뉴스 전문 채널의 프로그램에 나가 실상을 알렸습니다. 방송을 마치고 나오는데 담당 피디가 말을 건네왔습니다. 자신도 가습기살균제로 아이를 잃었노라고 했습니다. 2009년 대한소아과학회 논문에 소개된 원인불명의 아이들 사망사례 중 하나가 자신의 아이라고…. 피해신고를 왜 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이를 잃은 뒤 이혼하고 지금은 재혼해서 아이들을 낳고 사는데 전처와 죽은 아이 이야기를 꺼내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가 한 말이 잊혀지지 않네요. “아이를 하나 둔 부부가 이런 일을 당하면 열에 아홉은 헤어집니다.”
아이를 잃은 부부가 다들 왜 헤어지는지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유도 모른 채 황망하게 아이를 보내는 과정에서 던진 말들은 비수가 돼 서로에게 꽂힙니다. 본인들의 갈등에다 양가 친척들의 개입 속에 갈등이 증폭되고 책임론이 분출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으며 한 가정 자체가 해체돼버립다. 저는 지금까지 수백여 건의 가습기살균제 피해사례를 접하면서 아이를 잃고 난 뒤 헤어진 이혼 사례를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기억>이란 제목의 티브이 드라마가 떠오릅니다. 15년 전 뺑소니 교통사고로 하나뿐인 어린 아들을 잃은 태석과 지수는 헤어져 각자 다른 삶을 삽니다. 지수는 이혼 전 살던 집에서 혼자 살면서 아들을 앗아간 뺑소니범을 향한 분노로 가득한 판사입니다. 태석은 재혼해 두 아이를 두었고 잘나가는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어느날 정기 건강검진을 받은 태석에게 알츠하이머라는 병이 찾아옵니다. 물건을 잃고, 사람 이름을 잊고 자신이 찾아가던 곳이 어디였는지 잊어 거리를 헤매는 병의 진전 속에 태석은 전처의 집을 찾아가는가 하면 재혼해 얻은 중학생 아들의 이름 대신 오래 전 잃은 아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알츠하이머는 태석에게 잃은 아들의 기억만을 남기고 다른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갑니다.
태석이 근무하는 로펌은 그쪽 계통에서 잘나가는 곳입니다. 로펌을 설립한 이는 은퇴한 법조계의 여성 거물이었고 현 대표는 검사출신인 그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태석이 알츠하이머로 하나씩 기억을 잃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15년 전의 뺑소니 사고 범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그 로펌 대표의 아들이죠. 그 아들은 할머니와 아버지의 후광속에 새내기 법조인이 됐지만 15년 전 사건의 기억을 고통스러워합니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고민하는 녀석에게 이미 소멸시효가 지났고 증거도 없으니 법적으로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며 정신 차리고 살라고 합니다.
그런데 뺑소니 사실을 알고 있는 아들의 중학교 친구가 로펌 대표 앞에 나타나 15년 전의 일을 들먹이며 돈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태석과 전처 지수는 아들 친구를 범인으로 오인하게 됩니다. 뺑소니 사건의 발생 초기부터 모든 상황을 지휘하고 통제해온 법조계의 거물인 할머니는 손자의 친구를 제거하고 손자를 해외로 유학을 보내는 것으로 상황을 정리합니다. 드라마는 태석과 전처 지수가 로펌 대표 일가가 저지른 뺑소니 사건의 은폐 과정과 청부살인을 파헤치는 결말을 향해 가죠.
드라마 <기억>의 이야기 곳곳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특징이 오버랩됩니다.
첫째, 미성년자이고 무면허인 중학생이 차를 몰다 어린 아이를 치어 숨지게 합니다. 놀란 운전자는 뺑소니를 치는데 그땐 폐회로티브이(CCTV)가 없어 증거가 남지 않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라는 제품은 가습기 물통에 농약이나 마찬가지의 화학물질을 넣어서 방안에서 분무시키는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제품으로, 한국 말고 다른 나라에는 없는 물건입니다. 3000-4000원 정도하는 일회용 물건을 현금으로 사서 쓰고 버린 피해자들에게 제품을 구입해 사용한 증거가 남아 있긴 어렵습니다.
둘째, 드라마 속에서나 현실에서나 하나뿐인 아이를 잃고 부부는 헤어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엄마와 아빠는 고통 속에 살아갑니다.
셋째, 가해자에게 사건의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효의 문제가 있습니다. <기억>에서 뺑소니 사고의 범인은 할머니와 아버지의 비호 속에 당시 살인사건 공소시효 15년을 넘겨 법적 책임에서 벗어납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형사책임을 묻는 공소시효는 7년이고, 민사책임을 묻는 소멸시효는 10년입니다. 19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반에 피해를 당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경우 2011년 정부조사로 사건이 알려진 그 시점에 이미 민형사상의 시효가 지나가버렸습니다. 2005년을 전후한 시점의 많은 피해자들도 정부가 조사를 하느니 마느니 하며 늑장을 부리고 검찰도 고발이 접수된 지 4년이 지나서야 수사에 착수해 시효가 지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선 공소시효를 넘기는 과정에서 범인의 비호세력으로 막강한 법률가들인 할머니와 아버지가 활약합니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범인 비호세력은 대한민국 정부와 검찰인 셈입니다.
넷째, 드라마에서 뺑소니 사망사건의 공범은 사고 당시 중학생인 무면허 미성년자의 가족 일당입니다. 사건의 증거를 철저히 은폐하고 심지어 피해자 가족을 자신의 회사에 취직시켜 지켜보기까지 합니다. 사건의 진실을 아는 유일한 증인이 나타나 돈 내놓으라고 협박하고 피해자들이 이를 눈치챌 즈음 청부업자를 시켜 자살로 위장해 살해합니다. 막장 드라마인 셈입니다. 현실속의 가습기살균제 책임자인 옥시레킷벤키저 등 기업들은 드라마보다 더한 막장을 연출합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 김앤장의 변호사들을 앞세우고 서울대학교와 호서대학교의 관련 교수들을 매수해 정부조사가 틀렸다며 조작된 보고서를 법정에 버젓이 내밀고 큰 소리 칩니다. 이들은 또 세계를 주무르는 다국적 담배회사와 석면회사가 요구하는 조작된 보고서를 낸 바 있는 미국의 컨설팅 회사인 그래디언트에게 요구해 한국에서 조작된 자신들의 보고서를 리뷰한 의견서를 받아 “국제적인 연구기관도 우리 조사결과를 이렇게 평가해 준다”는 식의 주장을 펼칩니다. 다국적기업다운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드라마 제목 <기억>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기억입니다. 드라마에서 아들을 잃은 피해자 부모는 이혼해서 각자 살지만 처참하고 아픈 기억을 지우지 못한 채 고통속에서 몸부림칩니다. 알츠하이머가 갉아먹는 기억의 사라짐 속에서도 죽은 아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범인을 찾아야 한다는 의지는 더욱 불타오르죠.
안성우씨는 5년 전 둘째를 임신한 상태의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는 가습기살균제가 원인임을 알고 망연자실하며 모든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자신이 주문해 받은 물건이었고 임신한 부인을 위해 꼬박꼬박 가습기살균제를 물통에 넣어주던 그 손은 바로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족을 죽였다는 죄책감 끝에 그는 직장을 버리고 충북 옥천의 산골마을에 있는 한 암자에 아내와 태아의 혼을 모시고 2년간 곁을 지켰습니다.
이후 폐가 굳어지는 폐섬유화를 앓는 첫째를 돌보기 위해 부산 본가로 가 살던 그가 수많은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기업인 옥시레킷벤키저의 여의도 본사 앞 도로 위에 텐트를 친 이유는 살아남은 아들에게 아빠가 무언가 했다는 걸 나중에라도 말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지워져가는 기억과 감정을 되살려놓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한국 사회는 부인과 아이를 잃은 안성우씨가 가해기업의 마천루 빌딩 옆 도로에서 텐트농성을 하며 책임을 묻는 처절함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향한 연민은 검찰이 밝혀낸 기업의 파렴치한 조작과 은폐를 만나며 대중적 분노로 커져 갔고 급기야 국민적인 옥시제품 불매운동으로 폭발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공감해 준 국민이 고맙습니다. 나도 하마터면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며 피해자와 가족을 위로해준 당신이 고맙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를 우롱하고 피해연구를 맡은 대학가를 검은 돈으로 먹칠한 다국적기업에 분노하는 여러분이 고맙습니다. 내 일처럼 공감하며 뉴스를 전달해준 기자들이 고맙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