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연쇄 살인, 의사들이 걱정된다!
가습기살균제 연쇄 살인, 의사들이 걱정된다!
[안종주의 '건강 사회'] 위험한 전문가의 편견
프레시안 2013년 11월 7일자
경마장에 가보면 출발 주루선상의 경주마들이 앞만 보고 달리도록 옆 가리개를 해두었다. 사격 선수들도 표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얼굴 옆에 가리개를 하고 과녁을 향해 쏜다. 경주용 말과 사격 선수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하겠지만 보통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앞만 보고 달리다간 낭패를 당하기 쉽다. 자동차 운전을 하거나 건널목을 건너거나 길을 걸을 때 앞만 보아서는 안 되고 상하좌우를 잘 살펴야 한다. 그래야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
흔히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듣고 아는 것만 진실 또는 사실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경험하거나 배운 사실만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새로운 질병이나 감염병, 환경병, 직업병이 발생하더라도 대부분 이를 지나치기 쉽다.
가습기 살균제 재앙 사건에서도 보았듯이 우리 의사들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에게 10년 넘게 감기, 결핵, 폐렴 환자 등으로 오진했다. 물론 과거에 보지 못한 질환자가 계속 나오거나 새로운 것을 밝혀내려는 탐구 정신이 강한 의사나 의학자들은 마침내 새로운 질병임을 밝혀내거나 새로운 환자로 의학계에 보고한다. 그 결과 과학사, 의학사에 이름을 남기거나 노벨상을 탄 사람들도 있다.
인간은 실수하는 존재다. 따라서 실수를 실수임을 알고 고치면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이 본 것만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좁은 시야를 지닌 이들이 지닌 편견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편견은 'bias'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나 사건 또는 현상을 매우 엄격하고 좁게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태도를 말한다.
과학과 의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전문가, 즉 과학자와 의학자의 편견이 새로운 자연 진리의 발견이나 질병의 파악을 방해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중세 기독교 신학에 매몰된 과학자들의 편견은 자구의 나이와 생명의 탄생, 진화 등에 대한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 편견의 악령에 사로잡힌 그들은 진실이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편견을 지닌 과학자들도 그들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런대로 과학자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이들은 모두 잊힌, 이름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반면 편견의 포로가 되지 않고 벗어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의 지평을 넓힌 과학자, 의학자들은 지금도 교과서에, 인류 역사에 빛나는 이름을 남겼다. 갈릴레이, 파스퇴르, 아인슈타인 등이 바로 그들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전문가의 편견이 작동할 소지가 다분히 있는 일대 사건이 진행 중이다. 다름 아닌 가습기 살균제 피해 재앙 문제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민관합동조사위원회는 11월 말까지 피해 여부 최종 판정을 위해 막바지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망자 가족과 피해 신고자들은 그 결과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피해 신고자 대부분은 자신 또는 가족들이 가습기 살균제의 확실한 피해자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예상은 이를 판정하는 전문가들에 달려 있다.
ⓒ프레시안(남빛나라) |
1980년대 온산병과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에서도 작동
여기서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그동안 각종 직업병이나 환경병을 다루어오면서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이 지닌 편견이 문제가 됐으며 아직도 그 기제가 작동할 위험이 상존한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1985년 온산공단 환경병과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직업병을 꼽을 수 있다.
그 사람이 환자냐, 환자가 아니냐를 판정하는 열쇠는 의사가 쥐고 있다. 이번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판정에는 환경 노출 분야 전문가도 한 축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판정은 참여 의사들의 결정으로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의사들이 편견 없이 얼마나 제대로 된 판정을 하느냐에 따라 피해 신고자들의 희비가 엇갈릴 것이다. 또한 시비와 갈등의 소지도 의사들의 판정에 달려 있다.
1970년대부터 오염물질을 마구 쏟아낸 온산공단 공장 인근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1980년대 들어 여러 증상과 고통을 줄기차게 호소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 '온산 괴질'이란 이름의 사회 문제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의사들은 이를 환경성 질환, 즉 공해병으로 진단하지 않았다. 원인 모를 질병으로만 남았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교과서나 백과사전에도 온산공단 주민들이 겪었던 질환은 '온산병'이라는 이름의 공해병으로 소개돼 있지 않은가.
당시 일부 환경운동가들은 카드뮴 중독 공해병인 이타이이타이병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정부 당국과 의사들은 일본에서 발생한 이타이이타이병의 전형적 증상과는 다르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온산 주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질병에 대해 의사들은 그 정확한 원인을 집어내지 못했다. 각종 중금속과 화학 물질 등 유해 물질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온 주민들이 지금까지 알려진 각종 원인들을 조사해도 관련성이 드러나지 않을 경우 각종 유해 물질의 복합 노출로 인한 공해병으로 진단해도 될 터인데도 '전문가의 편견'이란 벽에 가로막혔다.
1988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대한민국 최대 직업병인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증 사건에서도 전문가의 편견 때문에 엄청난 사회적 갈등이 벌어졌다. 당시 원진레이온 작업 환경과 검진을 맡았던 대학의 일부 직업 환경 의학자들은 그 증상이 과거 다른 나라에서 발생한 이황화탄소 직업병 증상과 일치하는, 중증 환자들에 대해서만 직업병 인정 판정을 내렸다. 산업 의학 교과서에 나와 있는, 전형적인 환자만 직업병 환자로 판정을 내린 것이다.
이는 실제로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많은 노동자, 특히 경증 환자를 보듬지 못한 것이었다. 이들은 동료의 주검을 앞에 두고 오랜 투쟁을 벌인 끝에 대대적인 역학 조사를 벌인 다른 의학자가 지닌, 트인 시각의 힘을 빌려 비로소 직업병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과거를 복기해보면 사건 초기, 즉 1987~1989년 여러 환자-거의 대부분 중증 환자-를 직접 진단한 유일한 기관인 고려대학교 의과 대학 전문가들의 편견(자기가 판정한 것과 유사한 환자만 직업병 환자다)이 힘을 얻었더라면 수많은 경증 이황화탄소 직업병 환자는 원인모를 병에 걸린 사람으로 억울하게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피눈물 나는 대투쟁과 과거 이황화탄소 중독증 환자를 진단한 적은 없지만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의 다른 전문가가 대규모 조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고 이황화탄소 중독 판정 기준을 열린 시각으로 새롭게 확장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수렁에서 건져냈다.
그 결과 200~300명에 머물던 이황화탄소 직업병 환자 수는 900여 명으로 엄청나게 불어났다. 그렇게 새로운 직업병 판정을 받은 사람은 육신과 마음의 고통을 돈으로나마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편견이 열린 마음과 시각 앞에 무릎을 꿇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 직업병 사건이다.
이처럼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니면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전문가의 편견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 판정에서도 재현될 소지가 다분히 있다고 본다. 왜냐 하면 의사들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환자로 국내외 학술지에 보고한 사례는 실제 이번에 피해 신고를 한 사람들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경증 환자와 경계선상 피해자에 대한 판정
이들 의사들은 여러 1, 2차 병원을 거쳐 자신들의 대학병원을 찾은, 가습기 살균제 과다 노출로 인한 사망자나 중환자실 입원환자, 폐 이식 환자들을 진료했다. 따라서 만약 이들이 그 당시 진료했던 환자와 거의 똑같은 흉부 엑스선 영상이나 컴퓨터단층촬영영상(CT), 폐 조직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신고한 피해자만 살균제 피해자라고 판정하고 나머지 경증 환자들에 대해서는 경험한 적이 없다거나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피해자에서 제외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럴 경우 피해 신고자와 판정 전문가 간은 물론이고 다른 전문가와의 심각한 사회적 갈등 양상으로 번질 위험성이 있다.
가습기 살균제 재앙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벌어졌다. 그리고 그 실체가 드러난 지 2년 밖에 되지 않았다. 범인은 잡았지만 그 범인이 흉기로 어떻게 사람에게 치명상을 입혔는지, 흉기에 찔리고도 어떤 사람은 죽었고 어떤 사람은 중상을 입었으며 어떤 사람은 별 다른 상처를 입지 않은지와 세세한 범행 수법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다시 말해 살균제를 넣은 가습기를 사용한 방에서 가족이 함께 잠잤음에도 어떤 이는 죽고, 어떤 이는 살았으며 어떤 이는 비교적 멀쩡한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사건의 진범을 잡은 뒤 의료계에서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간질성 폐 질환에 대한 나름대로의 진단기준을 마련했다. 하지만 아직 세세한 표준 진단 기준은 없다. 따라서 경증 환자나 판정하기 애매모호한 경계선상의 피해 신고자에 대해서는 다양한 전문가가 모여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 판정하는 전략과 절차가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그들에게 기대할 것은 과거 그들의 선배들이 온산 공해병과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직업병 판정 초기에 보였던 좁은 시각, 즉 편견을 보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은 피해 신고자들의 살균제 노출이 확실하고 그들이 보인 증상과 질병이 결핵이나 세균 등 다른 원인이라고 밝혀내지 못하는 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판정하는 것이다.
만약 판정 전문가들이 당연히 이런 열린 마음으로 판정에 임하고 있다면 지금까지 풀어낸 나의 생각은 우리 의학 전문가들에 대한 필자의 편견이 된다. 그리고 나의 그런 기우가 편견이길 바란다. 편견을 지닌 이가 없는데도 그것을 편견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이며 전문가가 편견을 지니지 않고 탁 트인 시각을 가진 사회는 건강사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