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윤 칼럼] 18.4GW보다 중요한 질문
[이정윤 칼럼] 18.4GW보다 중요한 질문
"AI는 전력을 많이 쓰는 기술이 아니라 전력을 똑똑하게 쓰는 기술"
"18.4GW의 산정 근거 투명하게 밝히고 '에너지 효율'에 집중해야"
[산경e뉴스] "문제를 만든 것과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흔히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에게 귀속되는 이 말은 AI 시대 대한민국의 에너지정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정윤 논설위원AI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생산혁명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혁명은 새로운 사고가 함께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문제를 일으킨 과거의 공급중심 사고로는 문제해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최근 「AI 생산혁명론」에서 "AI는 기술혁명이 아니라 생산혁명"이라고 주장했다.
AI는 생산비용과 생산시간, 생산규모를 동시에 바꾸는 범용기술이며 국가의 경쟁력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생산체계를 조직하는 능력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AI를 반도체, 데이터센터, 전력, 용수, 산업부지를 하나의 생산 플랫폼으로 보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할 부분이 많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생산체계를 공급체계와 동일시해도 되는가”는 짚고 넘어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AI 생산혁명을 단순히 발전소와 데이터센터를 많이 짓는 문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생산체계는 공급설비 뿐만 아니라 수요관리, 망의 유연성과 효율, 유연한 전력운영체계 등 제반 생산요소를 다 감안하는 것이므로 발전소, 송전망, 데이터센터와 같은 공급설비 체계의 범위를 넘어서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공급만이 능사가 아닌 것이다.
정부는 AI 국가전략과 함께 18.4GW 규모의 AI 전력수요를 제시했다. 이는 국내 원전 약 13기에 해당하는 설비용량에 맞먹는 매우 큰 규모다.
그만큼 국가 산업구조를 바꿀 수 있는 숫자다.
하지만 이 수치가 어떤 가정과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산정되었는지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정부가 함께 제시한 목표는 2029년까지 약 26만 장의 GPU 확보다.
이를 기준으로 단순 계산해 보자. 최신 AI GPU를 장당 700W~1.2kW 수준으로 가정하고, 서버와 냉각을 포함한 데이터센터 효율(PUE) 1.3을 적용하면 전체 데이터센터 전력은 대략 0.2~0.4GW 수준이다.
CPU, 메모리, 네트워크, 저장장치 등 부대설비까지 넉넉하게 포함하더라도 1GW 안팎이면 충분한 전력수요 규모다.
물론 18.4GW에는 GPU 운용 뿐만 아니라 반도체 생산, 해외 AI 데이터센터 유치, 연관 산업, 예비율 등 다양한 요소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산정 근거를 국민에게 투명하게 설명하는 일이다. 어떻게 이 수치가 나왔냐는 것이다. 이는 현재 작성중인 전력수급계획의 근간부터 다시 바꿔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정책의 철학이다.
최근 발표되는 AI 정책을 보면 대규모 전력공급과 산업단지 조성은 강조되지만 정작 에너지효율, 수요관리(DR), 에너지저장장치(ESS), 분산형 전원, 디지털 전력망, 전력망 유연성은 상대적으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는다.
이는 생산혁명을 자칫 공급혁명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낳는다.
20세기 산업화 시대에는 공급 확대가 성장의 핵심이었다.
발전소를 짓고 송전망을 늘리면 경제도 함께 성장했다.
그러나 AI 시대의 경쟁력은 공급량이 아니라 같은 전력으로 얼마나 더 큰 가치를 창출하는가에서 나온다.
대한민국은 COP28에서 2030년까지 에너지효율 개선 속도를 두 배로 높이기로 국제사회와 합의했다.
또한 국제에너지기구(IEA)도 AI 시대의 전력정책에서 발전설비 확대 뿐만 아니라 에너지효율, 수요관리, 저장장치, 전력망 유연성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
AI는 전력을 더 많이 쓰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전력을 더 똑똑하게 쓰기 위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경영학의 거장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것만큼 쓸모없는 일은 없다"고 말했다.
공급 확대 자체가 목표가 된다면 아무리 효율적으로 추진해도 시대의 방향과 어긋날 수 있다.
품질경영의 선구자 W. Edwards Deming(에드워드 데밍)도 "나쁜 시스템은 언제나 훌륭한 사람을 이긴다"고 했다. 이 명언은 "아무리 뛰어난 인재를 데려다 놓아도 구조와 시스템이 엉망이면 결국 그 사람은 지치고 무능해지거나 시스템의 한계에 갖히고 만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성과는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든다는 것이다. AI 시대의 경쟁력 역시 훌륭한 기술보다 훌륭한 시스템에서 나온다.
발전소를 얼마나 많이 짓느냐보다 전력망을 얼마나 유연하게 운영하고 에너지효율을 얼마나 높이며 AI를 활용해 시스템 전체를 최적화하느냐가 국가경쟁력을 결정한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정책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대상이 아니다.
국민은 국가전략을 함께 검증하고 선택하는 주권자다.
18.4GW라는 숫자를 제시했다면 정부는 그 근거와 시나리오를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할 책임이 있다. 국가 장기계획은 숫자보다 숫자의 근거가 더 중요하다.
AI 생산혁명의 본질은 전력을 많이 소비하는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전력으로 더 많은 지능과 더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와 충분한 설명도 없이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며 변동성 재생에너지를 보완하는 원전의 추가건설을 요구하는 것은 경직성 원전에 대한 무지를 떠나 너무나 가벼운 언사가 아닐 수 없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공급 능력이 아니라 시스템 최적화 능력이다.
20세기의 공급 중심 사고로는 21세기의 지능혁명을 이끌 수 없다.
이제 대한민국의 에너지정책도 공급 확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발전설비의 규모를 경쟁하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앞으로 국가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은 전력망의 유연성, 에너지효율, 디지털 운영, 분산형 자원, 그리고 AI를 활용한 시스템 최적화다.
AI는 기술혁명을 넘어 생산혁명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생산혁명은 공급의 확대가 아니라 시스템의 최적화를 향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AI 시대에 선택해야 할 진정한 국가전략이며 미래 세대에게 남겨줄 가장 지속가능한 경쟁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