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주의 세상탐사] 문송면, 원진레이온 그리고 삼성전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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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4 15:58
내일신문 정기칼럼
2013년 7월12일
언론인
7월이면 생각나는 사건들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건들을 이제는 잘 떠올리지 않는다. 25년이나 지났기 때문이다. 1988년 7월 2일 한 소년이 15살의 꽃다운 나이에 스러졌다.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 수은중독이라는 직업병으로. 그의 이름은 문송면이다. 그를 그냥 보내기에는 너무나 허망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산재노동자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장례식을 치렀다. 영등포로터리에서 노제까지 지낸 뒤 저 하늘로 보냈다. 그리고 20일 뒤인 7월 22일 정부기업이었던 원진레이온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란 이름의 신경 독가스를 마시고 마구 쓰러져가고 있음이 언론을 통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원진레이온 직업병은 국내 최대의 직업병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6년 넘게 눈물겨운 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지금의 잣대로 보아도 획기적인 보상을 받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전문병원 설립, 산재직업병 제도 개선 등의 정말 값진 성과를 얻어냈다. 원진레이온 산재보상 대투쟁은 우리나라 산업보건운동의 상징이 됐다. 특히 원진직업병관리재단 설립과 함께 이황화탄소 직업병 환자들을 위한 대형병원, 연구소까지 세운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보기 드문 것이었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가장 성공한 직업병 투쟁 운동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를 계기로 수년간 한국 사회에서는 수은중독 유기용제중독 등 직업병이 화두가 되었고 언론 정치권 노동계 등도 이에 대한 관심을 크게 쏟았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산재·직업병 현실을 보면 당시 성과와 투쟁정신이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자괴감마저 든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직업병 투쟁 운동 최근 유독가스에 노출돼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삼성전자나 한국타이어 등 많은 대기업에서 노동자들이 암에 걸려 숨지거나 폭발사고 등으로 희생되고 있다. 시멘트공장과 석면방직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이 진폐증, 석면폐증 등의 치명적 호흡기질환과 암에 걸려 고통을 겪고 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마트 점원 등과 반복작업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은 근골격계질환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많은 민원인들을 대해야 하는 정신노동자들은 심각한 스트레스 등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심신이 망가져간다.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 산재와 직업병도 변화한다. 최근 새로운 직업병 환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 대기업 가릴 것 없이 많은 회사의 경영주들은 여전히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산재예방에도 관심을 크게 기울이지 않는다. 직업병 인정에 인색한 고용노동부나 근로복지공단 등의 태도도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노동운동에서 산재·직업병 부문은 여전히 곁가지에 머물고 있다. 그나마 노조가 있는 곳은 낫지만 노조 조직률이 너무나 낮다.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삼성전자 백혈병 직업병 사건은 정부보다도 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삼성에서 일어난 것이기에 노동자들이 25년 전과 같은 싸움을 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삼성전자에 제대로 된 노조가 없다는 것도 큰 몫을 하고 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엔지오인 '반올림'에 6월 현재 사망자 70명을 포함해 모두 176명이 백혈병 뇌종양 유방암 등 각종 암과 기형아 출산 등 생식계통 피해를 호소해왔다고 한다. 백혈병 사망, 삼성전자만의 문제 아니다 이들의 호소를 허투루 흘릴 일이 전혀 아닌 것은 그 숫자가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또 삼성 측의 방해와 회유는 매우 교묘하고 집요하다. 힘없는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사회가 관심을 가져주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더 분통터질 일은 이들 가운데 극히 일부 몇몇 사례만 직업병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처절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가족'이 곧 우리 곁을 찾아온다고 한다. 많은 국민들이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삼성의 집단 백혈병 사망이 삼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다. 대한민국에 정의와 사람들이 살아 있음을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 느낄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행동에 나서야 한다. 25년 전 이 땅에서 있었던 문송면과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죽음과 고통이 헛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을 7월에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