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문 대통령의 ‘캘린더’
[편집국에서]문 대통령의 ‘캘린더’
경향 2017 6 15
이기수 사회에디터
학(鶴)이 목을 빼고 오매불망 기다린 소식이 이랬을 게다. 환경의날인 지난 5일 문재인 대통령의 답신이 전해진 것은 오후 4시. 기가 푹 꺾여 있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생기가 돌아왔다. 오전에 학교 우레탄 트랙 문제와 ‘동급’으로 다뤄진 총리 기념사를 듣고 나락으로 떨어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때였다. 기쁨은 눈물로 흘러내렸다. “꽃보다 예뻤던 제 아기 밤톨이와 동영이는 실험쥐가 아니었고… 세상은 묻습니다. 왜 엄마인 당신은 살아 숨 쉬냐고.” 오전 11시 ‘두 아이를 잃은 엄마’ 권민정씨가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읽은 편지가 5시간 만에 답을 받은 것이다. 대통령은 직접 사과하고 대책을 챙기겠다는 뜻을 보냈다. 한국에서만 1195명의 목숨을 앗아간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2011년 세상에 알려진 후 대통령이 처음 고개 숙인 날이다.
청와대 비서관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과 만나 “환경의날을 기다려보라”고 한 것은 엿새 전이었다. 내부 조율과 준비가 끝나지 않았지만, 대통령은 그날 정부에 지시하는 메시지를 띄웠다. 달력 속 6월5일에 가습기 살균제 얘기를 묻어둔 셈이다. 그토록 만나자 해도 뻣뻣했던 환경부 간부들은 근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환경단체를 부단히 찾고 있다. 올해 22번째 환경의날부터 시작된 대반전이다.
탁자 위 365칸 달력엔 여기저기 정부·단체 기념일과 기일(忌日)이 보인다. 빨간색 글씨는 쉬는 날, 검은색은 일하는 날이다. 달력 속 5월부터 대한민국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말은 대통령으로부터다. ‘겸손한 권력’을 다짐한 25분간의 짧은 취임식(5월10일),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이제 광주가 국민통합에 앞장서달라”고 한 5·18 기념식, “참여정부를 뛰어넘겠다”며 대통령으로선 마지막 참석임을 알린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5월23일), “애국의 역사를 통치에 이용하지 않겠다”고 한 현충일 추념사(6월6일), “밥이 민주주의”라고 한 6·10 민주항쟁 기념사까지…. 한이 쌓여 있는 사람들은 공명하는 게 있다. 누군가에게서 터진 눈물은 금세 바다가 됐다. 민주 장정과 보훈의 아픔이 배어 있는 5~6월 달력을 대통령은 ‘37세 광주둥이’를 안아주고, 서해용사·파독광부·청계천 여공을 “모두 애국자”라고 부르며 현장에서 넘기고 있다.
대통령의 기념사·추도사는 열두 달 이어진다. 철학과 색깔이 다른 ‘캘린더 정치’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이 임기 첫해 4대강과 환경산업 세계화를 외친 환경의날에 문 대통령은 가습기 살균제를 더했다. 대통령으로선 14년 만에, 바다의날(5월31일) 기념식을 찾은 문 대통령 입에선 세월호와 길 헤매는 새만금 얘기가 얹어졌다. 첫날 4대강 보를 열고 노후 석탄발전소를 정지시킨 6월 달력엔 18일 고리원전 1호기가 세워지고, 29일까지 최저임금 1만원의 설계도가 그려진다. 제헌절(7월17일), 방송의날(9월3일), 경찰의날(10월21일)도 민감한 개헌·공영방송·수사권 문제가 불거질 때다. 6·15를 엇간 남북은 8·15(광복절)~10·4(2차 남북정상회담)의 운명적 시간을 다시 맞는다. 철도·노인·지방자치·소방·농업인·장애인·과학의날과 노동절…. 대통령의 첫해에 공약이 걸러지고 당사자도 주목할 기념일은 계속된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한 달 넘게 80%를 웃돌고 있다. ‘혼군(昏君)’ 시대를 딛고 선 기저효과와 새 출발의 기대가 반영된 숫자다. 정치학자들은 “지지율에 붕 떠가는 권력”을 경계한다. 숫자에 취해, 반대가 있다고 개혁을 하지 않고 늦추다보면 어느 순간 쌓인 매로 훅 무너지는 게 동서의 정치다. 초지일관 의료보험·총기·탄소 문제와 싸우며 ‘마지막 지지율 58%’를 찍은 오바마의 소통을 정책리더십의 전범으로 치는 이유다. 문 대통령 앞에도 6말7초의 사드, 7월의 교육(입시) 공청회, 정기국회의 ‘일자리 대타협’이란 깔딱고개가 서 있다. 저마다 이해관계로 돌아서고 갈라질 수 있는 난제들이다.
문재인의 1년’은 적폐청산과 통합이 씨줄·날줄로 엉키는 시간이다. 다른 세상을 갈구하고 꽃으로도 경찰을 때리지 않은 촛불의 새 여정이다. 그러곤 냉혹한 시험대, 내년 6월 지방선거 앞에 선다. 사람들은 “이게 나라였는지” 묻고, 행복한지 살 만한지 정의로운지 지나온 1년을 숫자로 평가할 게다. 얼마 전 6·10 기념식장에서 지선 스님은 서로 먼저 타보려다 지쳐버리게 한 ‘용마(龍馬)’의 우를 경계했다. 적폐를 헤쳐가는 지혜와 집단지성의 소중함을 일깨운 말이다. 생전에 민주주의자 김근태는 “인간의 가치는 그가 품고 있는 희망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인간을 정권으로 바꿔도 말은 그대로 통한다. 희망의 동력은 커질까, 유지될까, 잦아들까. 문재인의 달력이 막 한 장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