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 인도 참사 피해자 "사고 경보도 없어, 건강한 사람도 쓰러졌다"
경향신문 2020년5월15일자
김기범 기자
“사고 발생을 알리는 경보도 없었습니다. 가스가 덮쳐온 것을 알았차렸을 땐 건강한 사람도 쓰러지고 말았어요.”
인도 남부 안드라프라데시주 비사카파트남에서 발생한 LG화학의 발암물질 누출 사고 피해자인 현지 주민 나게스와라 라오는 온라인 회의앱 줌을 통한 국제기자회견에서 사고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처럼 묘사했다. LG폴리머스인디아 공장에서 3.5㎞ 떨어진 곳에 사는 이 피해자는 “새벽 1시 15분쯤 업체(LG) 측에서 가스 누출을 알아차렸고, 2시쯤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하지만 그들은 주민들에게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아시아직업환경피해자네트워크(이하 피해자네트워크)가 주최한 이날 기자회견은 많은 이들이 인명피해를 입었음에도 정작 인도 현지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 언론들에 거의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 의식에서 아시아지역 환경단체들이 공동으로 준비한 것이다. 이날 온라인 기자회견에는 한국, 인도 외에 홍콩, 미국 등의 전문가와 언론인들이 참석했다.
지난 7일 인도 남부 안드라프라데시주 비사카파트남의 LG폴리머스인디아 공장에서는 발암물질인 스티렌 가스 누출사고가 발생하면서 주민 12명이 사망하고 수천여명이 건강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현지 사정을 알리는 기사는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국내의 환경단체나 전문가들 역시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현지 사정을 간접적으로만 파악하고 있는 상태다.
기자회견에서 라오는 “새벽 4시쯤 LG 측의 대피가 시작됐을 때 주민들은 잠들어있는 상태였다”며 “자지 않고 휴대전화로 채팅을 하거나 비디오게임을 하던 아이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고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그는 “(스티렌) 가스에 노출된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건강한 경찰관도 땅에 쓰러져버렸다”며 “주민들은 병원 등 안전한 장소를 찾아 이리저리 뛰었다”고 설명했다.
라오는 “5㎞ 떨어진 곳까지 확산된 가스에 노출된 이들은 눈에서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며 “1~3㎞ 반경 내의 주민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날 오후 8시쯤 바람의 방향 때문에 또 한번의 (가스) 누출이 있었다”며 “가스 누출은 통제되지 않은 상태였고, 다시 한번 대피를 해야했다”고 설명했다. 라오는 “경찰들은 다소 거칠게 주민들을 대피시켰다”면서 “35만명의 사람들이 거리로 나갔다”고 말했다. 그는 “(당국은) 코로나19로 인해 주민들에게 다른 지역으로 나가지 말도록 했다”고 덧붙였다.
라오는 또 “사람들은 밤새 깨있었고, 공장이 폭발할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며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 채 걱정만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보팔 참사 생존자인 라크나 딩그라는 “보팔이 다시 반복되지 않으려면 인명피해를 일으킨 범죄행위가 제대로 규명되어야 한다”며 “그 범죄행위는 매우 위험한 물질로 수천명의 사람들의 목숨을 위험에 처하게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보팔에서는 범죄에 대한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충분한 증거가 수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2만5000명이 죽고, 50만명 이상이 고통을 받게 한 참사가 교통사고처럼 처리되고 말았다”고 설명했다.
인류 사상 최악의 화학물질 참사로 기록돼 있는 보팔 참사는 1984년 12월 3일 인도 중부 보팔에서 미국 기업인 유니온카바이드사(현재의 다우케미칼)의 살충제 제조 공장에서 유해화학물질인 아이소사이안화메틸이 누출된 사고다. 공식 집계상 2250명이 사망하고, 50만명 이상이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까지도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사회를 맡은 랑 라오 가루 인도 안드라대학 전 교수는 당시 인명피해뿐 아니라 가축, 곡물 등도 피해를 입었다면서 피해 지역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도 공개했다.
한국 측 전문가로 참석한 서울대 보건대학원 백도명 교수는 “스티렌 노출로 인해 사망 피해가 일어난 사고는 이번 사고 전까지 없었다”며 “이번 사고에서 스티렌 농도는 매우 높은 수치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생존자 중 아직 병원 치료를 받고 있는 이들은 산소호흡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며 “(피해자들에 대해) 간, 신장, 폐, 생식기능 손상과 암 등에 대한 모니터링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백 교수는 “단순히 건강 검진이나 위해성 평가만 할 것이 아니라 보다 적합한 역학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며 “지난해 한국에서 발생한 한화토탈의 비슷한 사고의 경우 3년 간의 역학조사가 현재 실시되고 있으며 인도에서는 비슷한 수준, 또는 더 포괄적인 조사가 실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13일 아시아지역 환경단체, 전문가 등으로 이뤄진 아시아직업환경피해자네트워크(ANROEV)는 성명을 통해 LG화학에 인도에서 발생한 사고가 한국에서 일어난 것으로 간주해 피해 대책과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