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시스템은 어디서 무너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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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시스템은 어디서 무너졌을까

최예용 0 3463

국가의 시스템은 어디서 무너졌을까

 

시사인, 2016년5월17일자 

 

아무런 흡입독성 검사를 거치지 않은 제품들이 ‘인체 무해’ 따위 문구를 달고 10년이 넘는 기간 팔려나갔다. 제도의 빈틈과 기업의 부도덕, 공무원의 책임 떠넘기기 속에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발생했다.

 

폐가 딱딱하게 굳어 사람이 죽을 정도의 물질이 어떻게 ‘가습기 살균제’로 만들어지고 유통될 수 있었을까. 기업이 제품을 팔고 소비자가 이를 흡입하기까지 국가의 관리감독 시스템은 과연 작동했나. 작동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최근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속도를 내면서 다시 떠오르는 질문이다.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을 포함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의 주성분은 PHMG다. 주식회사 유공(현 SK케미칼)이 이 물질을 제조하겠다고 1996년 12월 환경부에 신고했다. 환경부는 유해성 심사를 진행한 결과 이듬해인 1997년 3월15일 이 PHMG가 속한 부류의 화합물이 “유독물에 해당 안 됨”이라고 관보 제13559호에 고시했다. 이어 2000년 5월22일 PHMG를 ‘유독물 등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화학물질’로 관보 제14497호에 개정 고시했다.

 

하지만 환경부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불거진 뒤인 2012년 9월 뒤늦게 PHMG를 유독물로 지정했다. 환경부가 자체로 진행한 경구·피부·흡입·어류 독성 실험 모두에서 해당 물질이 유해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97년 유해성 심사에서는 어떤 근거로 PHMG가 유독물이 아니라고 고시했을까.

 

환경부의 답은 이렇다. 첫째, PHMG가 잘 휘발되지 않는 고분자 화합물이어서 당시 독성 실험 자료를 제출할 의무가 없었다. 둘째, 회사가 카펫 제조 시 첨가할 항균제 용도로 유해성 심사를 신청했기 때문에 소비자가 흡입할 우려가 없다고 판단해 흡입독성 실험을 따로 요청하지 않았다. 결국 환경부는 별다른 독성 평가도 하지 않고 이 물질이 유독물이 아니라고 고시했다는 얘기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조남진</font></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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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

당시 유해화학물질관리법에 따르면 PHMG 같은 고분자 화합물은 독성 실험 자료를 일부만 제출해도 됐거나 아예 제출하지 않아도 되었다. 역시 고분자 화합물에 해당하는 ‘세퓨’ 등의 주성분 PGH도 환경부가 흡입독성 평가 없이 ‘유독물 등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화학물질’로 2003년 6월10일 관보 제15417호에 고시했다. 

 

김용화 성균관대 약학대학 초빙교수(전 안전성평가연구소 선임연구부장)는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고분자 화합물에 독성 자료 제출 의무를 면제하면서도 양이온성 고분자 화합물(PHMG와 PGH가 이에 해당한다)이면 반드시 자료를 제출하도록 예외 조항을 두고 있다. 이들 물질이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였다. 우리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처럼 예외 조항을 두었다면 인명 피해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015년 1월부터 시행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은 뒤늦게 양이온성 고분자 화합물에 대한 독성 자료 제출을 의무화했다.

 

용도를 고려해 흡입독성 자료를 요청하지 않았다는 환경부 설명에도 문제가 있다. 환경부는 PHMG의 경우 ‘카펫 첨가 항균제’, PGH의 경우 ‘고무·목재·직물 등의 보존을 위한 항균제’ 용도로 업체가 신청했다는 이유로 흡입독성 평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식회사 유공이 환경부에 제출한 PHMG 제조 신청서에는 ‘작업자에 노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충분히 환기할 것’ ‘흡입 시:신선한 공기가 있는 곳으로 옮길 것’과 같은 표현이 있다. PGH 제조 신고서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흡입 시 유해성을 짐작하게 하는 단서다. 이에 대해 환경부는 사업주와 노동자가 주의해야 할 일반적인 사항일 뿐 흡입독성 자료를 요청할 근거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논란 불거진 후에야 유독물로 고시


PGH 제조 신고서에는 ‘배출 경로:제품에 첨가(spray or aerosol 제품 등/항균효과)’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런데도 2003년 유해성 심사에서는 경구 독성 평가만 이뤄졌다. 당시 ‘화학물질의 유해성 심사 등에 관한 규정’을 보면, 용도상 주 노출 경로가 경피 또는 흡입으로 판단되는 경우 시험성적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관리 당국이 심사 과정에서 이 규정을 위반했다고 지적한다(논문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있어 국가배상책임에 관한 일고찰> 참조).

 

이 같은 과정을 거쳐 환경부는 가습기 살균제의 주성분 PHMG와 PGH 모두를 흡입독성 평가 없이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고시했다. 가습기 살균제 논란이 불거진 뒤에야 자체 실험 결과 모두 유독물로 고시했다. 앞으로 피해 판정이 본격화될 예정인 또 다른 주성분 CMIT와 MIT는 유해성 심사 신청 대상이 아니어서 별다른 심사도 하지 않았다가, 역시 논란이 불거진 이후 독성 실험 결과에 따라 유독물로 지정했다.

 &lt;div align=right&gt;&lt;font color=blue&gt;ⓒ시사IN 신선영&lt;/font&gt;&lt;/div&gt;5월2일 옥시레킷벤키저가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피해자 가족들이 ‘면피용 사과’라며 항의하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5월2일 옥시레킷벤키저가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피해자 가족들이 ‘면피용 사과’라며 항의하고 있다.

의문은 남는다. 애초에 카펫 항균제나 고무·목재·직물 항균제 용도로 유해성 심사를 통과했더라도 흡입이 명백히 예상되는 가습기 살균제에 이 물질들을 사용하려면, 즉 용도를 바꾸려면 가습기 살균제 출시 전 이들 물질에 대한 흡입독성 평가를 새로 받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는 용도가 변경되어도 재심사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라는 것이 환경부의 공식 해명이다. 재심사 근거 자체가 없으니, 이를 하지 않았다고 처벌할 조항도 없다. 

 

이에 대해 임종한 인하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사회의학)는 “용도를 바꾼다는 것은 노출 경로를 바꾸는 것이다. 흡입하느냐, 피부에 닿느냐, 먹느냐에 따라 동일한 화학물질이라도 독성 영향이 확연히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독성 평가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라고 지적했다. 미국 독성물질관리법을 보면, 이미 제조 신고 검토가 끝나 등재된 물질이더라도 용도가 중요하게 달라지면 안전성 여부를 다시 심사받도록 하는 ‘신규 용도 유해성 재평가’ 조항이 있다. 박태현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앞의 논문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있어 국가배상책임에 관한 일고찰>에서 “용도에 따른 노출 경로가 달라질 경우 유해성 심사를 다시 받도록 제도를 마련하지 않은 것은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보호조치를 하지 않은 것이므로 국가가 배상 책임을 진다”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출시된 가습기 살균제는 어느 법령에 의해서도 관리되지 않았다. 약사법에 따른 의약외품에는 ‘감염병 예방을 위하여 살균·살충 및 이와 유사한 용도로 사용되는 제제’가 포함되지만,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가습기 살균제를 의약외품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인명 피해 발생 후인 2011년에야 뒤늦게 의약외품으로 규제했다. 이미 가습기 살균제가 시장에서 퇴출 선고를 받은 뒤였다.

 

의약외품도, 화장품도, 식품도 아닌 가습기 살균제는 공산품으로 유통됐다. 그렇다면 품질경영 및 공산품안전관리법(이하 품공법)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옛 지식경제부)가 관리했어야 한다. 하지만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유일하게 개발된 가습기 살균제는 품공법상 안전 인증 대상 공산품에 명시된 품목이 아니었다. 품공법상 안전 인증 대상 공산품이 아니라면 품공법상 자율 안전 확인 대상 공산품 중 ‘생활화학 가정용품’의 ‘세정제’ 정도에 해당될 수 있었다. 이에 산업통상자원부는 “일반 가정에서 바닥, 욕조, 타일, 자동차 등의 물체를 세정할 용도로 사용하는 세정제만을 관리 대상으로 하고 있었을 뿐 살균제는 관리할 법적 근거가 없었다”라고 해명한다.

 

하지만 산업통상자원부가 역학조사 이후 수거 명령 대상이 된 ‘가습기클린업’을 포함한 일부 가습기 살균제는 세정제로 간주해 KC 마크를 붙여준 것이 뒤늦게 드러났다.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는 그나마 2011년 역학조사를 통해 원인 미상 폐 손상의 원인이 가습기 살균제였음을 밝혀낸 기관이다. 조사 결과를 근거로 수거 명령도 내렸다. 하지만 이미 2006년부터 알 수 없는 이유로 폐가 굳어가는 사례가 의학계에 보고되었음에도 이상 징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심지어 2009년 ‘급성 간질성 폐렴의 전국적 현황 조사’라는 논문 집필에 질병관리본부 연구원 2명이 참여했음에도, 정부 차원의 역학조사는 그로부터 2년 뒤인 2011년 서울아산병원 신고로 이뤄졌다. 당시 논문은 가습기 살균제를 원인으로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49.4%의 높은 사망률과 빠른 임상 경과”를 보였다며 “전국적인 네트워크 구성과 원인 규명을 위한 지속적인 전향적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라고 끝맺고 있다. 해당 증상을 보인 78명 중 36명이 사망한 당시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여 국가 차원에서 전문적이고 대대적인 역학조사를 벌였다면 좀 더 빨리 원인을 찾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논문 집필에 참여한 질병관리본부 관계자는 당시 연구가 왜 역학조사로 이어지지 않았느냐는 <시사IN>의 질문에 “그쪽(공동 집필한 대학 연구진)이 검체 검사만 요청해온 거라서…”라고 말했다.

 

유해물질 관리감독과 이상 징후 조기 발견에 실패한 국가는 사후 피해 구제에도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보건복지부는 ‘기업과 소비자가 해결할 문제’라는 태도를 보였다. 충분하고 적절한 검사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하지 않아서 폐손상조사위원회 위원들이 사퇴하는 일도 있었다. 폐손상조사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질병관리본부는 전염병이 아닌 화학물질이라 자기 영역이 아니라 하고, 환경부는 환경부대로 제품의 문제지 화학물질 관리 책임과는 멀다 하고, 산자부는 본인들이 제품을 관리하긴 하지만 건강관리 쪽은 아니니 반품을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나왔다. 부처 간 정리가 안 되면 국무총리실이 나서서 조정해야 했지만 그것도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각자도생’하라는 식이었다. 피해자들이 피해 등급으로 나뉘어 서로 상처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옥시 제품 12년간 453만 개 판매


피해 구제까지 가지 않더라도 책임자에 대한 수사와 처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2012년 8월 피해자들이 직접 업체들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검찰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검찰은 2013년 ‘시한부 기소 중지’를 했다. 사실상 수사를 중단했다. 특별수사팀을 2016년 1월에야 꾸렸다. 이미 세 차례에 걸쳐 피해자의 고발이 이뤄진 뒤였다. 주요 업체 압수수색도 고발 4년 만에 뒤늦게 이뤄졌다.

 

그 와중에 피해자들이 국가를 대상으로 청구한 손해배상 소송은 1심에서 패소했다. 원고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사망했더라도 당시 법령이나 정보 등에 비추어보면 피고(대한민국)의 주의 의무 위반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제도의 빈틈과 기업의 부도덕, 담당 공무원들의 책임 떠넘기기 속에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발생했다. 제품군 자체는 1994년 11월 주식회사 유공(현 SK케미칼)이 개발해 처음 시장에 나왔다. ‘옥시싹싹’을 포함해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다섯 개 제품은 2001년 3~10월 출시됐다. 아무런 흡입독성 검사를 거치지 않은 제품들이 ‘인체 무해’ 따위 문구를 달고 10년이 넘는 기간 팔려나갔다. 판매량 1위였던 옥시 제품은 12년간 453만 개가 팔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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