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석면특집] ③ 국내 피해 첫 인정 제일화학 출신 17%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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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석면특집] <석면법 5년> ③ 국내 피해 첫 인정 제일화학 출신 17% 사망

최예용 0 4778

<석면법 5년> ③ 국내 피해 첫 인정 제일화학 출신 17% 사망

 

연합뉴스 2015 8 18

 

석면 피해자 박영구씨
석면 피해자 박영구씨(서울=연합뉴스) 옛 제일화학 석면공장에서 일했던 석면 피해자인 박영구(62)씨가 부산시 연제구 옛 제일화학 부지를 둘러보며 석면 피해의 참담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폐질환이 원인"…피해자 가족들 10년째 '산업재해' 법정 투쟁

(서울·부산=연합뉴스) 임주영 차근호 기자 = "석면포를 덮고 쉬기도 했어요. 저 죽는 줄도 모르고요…"

 

박영구(62)씨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부산 제일화학에서 일하던 젊은 시절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순간이라는 생각에 한숨을 쉬었다.

 

제일화학은 1969년부터 가동된 우리나라 최초의 석면 방직 공장이었다. 부산 한복판(연제구 연산1동)에 세워져 운영되다가 1992년 경남 양산으로 옮겼다.

1971년에는 아시아 최대의 석면기업인 일본 니치아스(옛 일본석면)와 손잡고 합작회사도 만들었다. 여기서 만든 청석면 제품은 일본으로 수출했다.

 

한때는 제일화학 직원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누나의 소개로 이 회사를 알게 돼 1971년에 입사할 때가 그랬다. 

 

당시 국내 석면 방직공장 중에서 제일화학이 규모가 가장 컸고 보수도 많았다. 시골에서 갓 올라온 17세 청년은 이곳에 입사한 것을 행운으로 여겼다.

 

석면 먼지가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다. 그런 것은 박씨에게 대수롭지 않았다.

 

박씨는 "제일화학에서 청춘을 불살랐다"고 했다. 입사 초기에는 하루 12시간씩 2교대 근무를 했고, 몇 년 후부터 3교대가 되면서 8시간씩 일했다.

 

석면 가루가 온 공장에 눈처럼 쌓일 때도 있었다. 박씨는 석면에서 섬유를 뽑아내는 기계가 행여 고장이 날세라 먼지를 털면서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했다. 마치 내 몸의 일부처럼 아꼈다.  

 

당시 제일화학 주변은 미나리꽝이었다. 공장에서 먼지가 날리면 파란 미나리꽝이 하얀 눈밭처럼 변해버렸다고 박씨는 회상했다.

 

찰리 채플린의 명작 '모던 타임스'에 나오는 공장 노동자처럼 그는 톱니바퀴처럼 움직였다. 정해진 시간에 맡은 일에 충실했다.

 

입과 코를 가린 것은 거즈 마스크 하나가 전부였다. 일을 마칠 때쯤이면 얼굴은 석면 가루가 묻어 하얗게 변했다. 마스크 안으로 석면이 들어와 코 주변에 잔뜩 쌓였다. 

 

컬컬해진 목에서 큰 헛기침을 한 번 하면 가래가 나왔다. 뱉어낸 가래에 석면 가루가 뭉텅이로 묻어 있는 것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땐 그랬다.

 

심지어 공장 작업자들은 도시락을 싸와서 먹었다. 어떤 날은 석면 가루가 안개처럼 뿌옇게 날리는 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박씨는 서둘러 밥을 먹고 나서는 석면포를 몸에 둘둘 말아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박씨는 "그게 회사 생활의 조그만 낙이었다"고 회고했다.

 

석면의 치명적인 위험이 알려지기 전이었다. 박씨에게 석면은 생활의 일부였다.

 

일본 니치아스사의 간부들이 공장 시찰을 올 때면 눈만 보이게 온몸을 감싼 특수복을 입고 다닌 것이 기억난 건 한참 뒤였다. 일본 간부들이 둘러보는 작업장에는 아무런 보호 장구도 입지 않은 근로자들이 일했다.

 

박씨는 입사 8년째인 1978년에 직장 동료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회사를 그만두고 분식집을 차려 '장밋빛 인생'을 꿈꿨다. 그러나 행복의 기대는 머잖아 멈췄다. 둘째를 출산한 아내가 마른기침을 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기침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는 가슴을 바늘로 찔린 것처럼 아파했다. 진통제로 버티고 산소호흡기까지 달았다. 10년여의 병치레 끝에 아내는 중학생인 두 아들만 남겨두고 서른여덟의 나이로 허망하게 세상을 등졌다. 

 

아내를 떠나보낸 괴로움에 몸서리치던 박씨가 석면의 존재를 알게 된 건 2005년이다. 

 

공장에서 함께 일했던 원점순 씨가 석면으로 암을 얻어 목숨을 잃었다. 그 유족은 제일화학의 후신인 제일ENS를 상대로 국내 최초로 '석면피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박씨는 언론 보도를 보고서야 석면의 무서움을, 아내 죽음의 이유를 알게 됐다.

 

박씨 자신도 이유를 모르는 폐병으로 병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후 그는 2007년 석면폐증 진단을 받았다.  

 

제일화학에 근무했던 석면 피해자와 가족들은 이때부터 2013년까지 힘겨운 법정 투쟁을 벌인 끝에 일부는 산업재해를 인정받았다.

 

박씨는 현재 '제일화학 석면피해자' 가족 대표를 맡고 있다. 당시 함께 일한 노동자는 대략 240여명이다.  

 

이 가운데 160여명은 연락이 닿았지만, 벌써 그 중 50명이 세상을 떠났다. 폐질환이 원인이었다. 제일화학 동료 노동자 중 최소 17%가 석면 피해로 추정되는 질환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박씨는 17일 "아직 60대도 되지 않는 제일화학 옛 노동자들이 1년에 여러 명씩 죽어가고 있다"고 힘겹게 말했다. 

 

그는 "국가는 석면 피해자를 제대로 인정해 주는지, 삶을 꾸려나가도록 보살펴 주는지 돌이켜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제일화학 석면 피해자인 양용길(62)씨는 "근로·보건 당국이 산재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몇몇 질병에 걸렸는지를 따져보는데, 이 기준은 오래전이나 요즘이나 거의 변함이 없다"며 "여러 질병을 더 추가해 산재 인정기준을 넓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에서 석면 피해 배상에 관한 최초의 법원 판결은 2007년에 나왔다.

 

대구지법은 2007년 12월 제일화학 전직 노동자이며 중피종 환자였던 고 원점순씨 유족이 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약 2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쟁점은 석면사(絲) 제조 공장에서 근무했던 원씨가 퇴사 후 약 26년이 지난 뒤 악성 중피종으로 사망한 경우 회사 측에 손배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였다.

 

법원은 유족의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사용자였던 회사는 근로자의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는 유해물질을 다루는 작업장에서 근로자에 대한 안전배려 의무를 위반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법원은 "석면 제조회사가 근로자에게 안전배려를 해야 하는 의무를 위반한 이유로 손배 책임을 인정한 국내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 판결은 이후 유사한 고통을 겪은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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