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뉴스] 왜 그들은 영국에 갈 수밖에 없었나
왜 그들은 영국에 갈 수밖에 없었나
레킷벤키저 찾아갔더니 "한국 법인 책임일 뿐"
【베이비뉴스 윤지아 기자】 기사작성일 : 2015-05-27 17:55:21
지난 2005년, 권민정 씨는 둘째 아이 출산을 50일 앞두고 있었다. 병원으로부터 '태아의 장기가 하얗게 뒤덮여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중절수술을 했다. 정확한 원인과 이유도 모른 채 '밤톨이'라는 태명의 아이를 하늘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임신한 셋째 아이의 장기도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다행히 출산을 했지만 그 아이 역시 2007년 4월, 호흡곤란으로 세상을 떠났다.
2011년 여름에 찾아온 호흡곤란. 쓰러진 뒤 몇 시간 만에 폐가 하얗게 굳어버렸다.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김성태(42) 씨는 매일 두려움에 떨고 있다. 김 씨는 IT관련 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일도 그만두고 일 년에 몇 번씩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양쪽 폐를 이식하면 좋아질 줄 알았는데, 폐기능이 계속 떨어져 일반인의 26% 수준밖에는 안 된다. 그나마 폐 이식이 그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2001년 둘째 출산 전후부터 옥시레킷벤키저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해 2011년 정부의 역학조사가 발표될 때까지 겨울철마다 매달3~4개씩을 사용해왔던 이시연(45) 씨.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제품을 사용하면서 애경 가습기메이트 제품도 한두 번 사용했던 주부였다.
이 씨는 지난 4월 환경부의2차 조사에 등록, 조사 결과에 따라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거의 확실'한 1단계 판정을 받고 지난 5월 4일 심장과 신장기능이 떨어져 충남대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이 씨는 심장과 신장기능이 떨어져 퇴원 예정일을 하루 앞둔 지난 9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무려 142명이 목숨을 잃었다. 건강해지기 위해, 좀 더 깨끗하게 가습기를 이용하기 위해 사용했던 가습기살균제 때문이라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평범하던 가정이 한순간에 파괴되고 말았다. 살아남아 억울한 죽음을 세상을 알리던 가족들은 얼마전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죽음의 살균제를 만든 책임을 물으려 옥시레킷벤키저의 본사를 찾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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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 레킷벤키저 영국본사 항의방문단이 2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제금융센터 IFC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영국항의방문단 활동보고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기태 기자 likitae@ibabynews.com ⓒ베이비뉴스 |
환경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정부조사에 신고돼 확인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530명 중, 76%인 403명이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제품을 사용했다. 또한 사망자 142명 중에서는 70%인 100명이 옥시싹싹 제품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자 중 20명이 사용한 제품은 정확히 밝혀진 바 없지만, 옥시싹싹 제품의 시장점유율로 봤을 때 이들 중 상당수는 옥시제품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게 환경단체들의 분석이다.
사건초기부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상태를 파악해오고 있는 임흥규 환경보건시민센터 팀장은 "정부의 지원대상인 1~2단계 판정을 받은 환자들은 물론이고 '가능성 낮음'의 3단계나 '가능성 거의 없음'의 4단계 판정을 받은 경우 중에 상태가 나빠져 산소호흡기를 착용해야 하거나 반복적으로 병원에 실려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3~4단계로 판정받은 피해자들은 정부의 지원범위 밖에 있어 사망자가 나와도 파악조차 안 되는 상황"이라고 전한 바 있다.
'레킷벤키저'라는 영국회사가 만들어 판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제품의 피해자가 403명에 이른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만큼 사람들이 믿을 만한 기업이었다는 반증이다. 레킷벤키저는 지난해 21억3000만파운드(3조 7000억 원)의 이익을 낸 한국 점유율 1위 종합생활용품 업체로 '건강', '위생', '가정'이라는 3대 가치를 내세우고 있는 세계적인 사회적 기업이다. 이면에서는 소비자의 건강을 파괴하고 가정과 가족을 파괴했지만 말이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는 지난 2011년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이후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알리고 기업의 책임 있고 진심어린 사과와 보상을 위해 작은 불매운동부터 시작해 서명운동, 사망자 추모 및 기업 책임을 촉구하는 1인 시위 등의 국내 캠페인과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했지만 옥시 레킷벤키저(현재 RB코리아) 본사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했다.
현재 옥시는 피해자들과 시민단체의 1인 시위, 접견 신청, 사과 요구 등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피해자들이 여의도에 위치한 국내 옥시 본사를 방문할 때마다 보안 요원에게 전해듣는 말은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말뿐이라고 전해졌다. 지난 2011년부터 불거진 사건이지만 4년째 외면만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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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 레킷벤키저 영국본사 항의방문단이 2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제금융센터 IFC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영국항의방문단 활동보고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사진은 이번 영국항의방문했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을 사용하다 아내를 잃은) 맹창수 씨(왼쪽에서 두번째)가 영국 로펌 즉에 영국법원에 레킷벤티저를 제소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모습. 이기태 기자 likitae@ibabynews.com ⓒ베이비뉴스 |
결국 피해자모임과 시민단체는 옥시 한국 법인은 영국 본사 움직임에 따라 움직인다고 판단하고, 지난 18일 영국으로 떠났다. 직접 피해자들이 본사를 찾아 기업의 책임 인정과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기 위해서였다.
피해자 대표로 영국항의방문단에 참여한 맹창수 씨는 27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제금융센터 IFC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열린 가습기살균제 피해 영국 항의방문 보고 기자회견에서 "영국 본사 첫 번째 방문 당시만 해도 책임도 있고 합의를 해줄 수 있다고 이야기 했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방문 때는 모두 RB코리아 책임으로 돌렸다"며 "'오늘 지나면 내일 잊혀지겠지'라는 자세로 일관하는 레킷벤키저는 사회적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지 않고 국제 소송까지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맹 씨의 말대로 영국 레킷벤키저 본사 측은 세 번의 만남동안 영국항의방문단에게 사과나 책임표명을 전한 바 없다. 레킷벤키저 측을 대표해 나온 임원들은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소송 진행 중으로 책임표명은 어렵다는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 생존자, 딸 강나래(9) 양과 함께 영국항의방문에 동참한 가습기살균제와가족모임 강찬호 대표는"5살, 어린나이에 간질성 폐질환으로 입원한 후9살이 된 나래와 함께 한 영국행에서 레킷벤키저 본사로부터 얻은 것은 '책임은 한국(RB코리아)에 있다'는 문서 한 장이었다"며 "영국투쟁은 시작에 불과하다. 영국 현지에서 국제 소송 준비를 비롯해 나래가 사용하고 덴마크에서 원료를 수입해 사망자 14명, 생존환자 27명 등 41명의 피해자를 발생시킨 세퓨 제품에 대한 정확한 조사도 실시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피해자들이 영국까지 항의방문한 이상, 정부 역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지원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피해자들에게 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한 정부는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을 통해 지난해 12월 옥시레킷벤키저 등 13개 업체를 상대로 22억 원대의 구상금 청구 소송을 낸 바 있다. 구상금 청구 소송 자료에 따르면 옥시레키벤키저는 16억 5900만 원으로 가장 많으며, 애경산업 4억8100만 원, SK케미칼 3억 7200만 원, 홈플러스 3억 4000만 원, 롯데쇼핑 3억 2200만 원 등이다.
또한 정부는 올해 말까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신청을 받을 예정이다. 환경부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와 피해자들의 요구에 따라 신청기간을 2015년12월 31일까지 연장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폐질환이 의심되는 사람이나 그 유족은 올해 말까지 한국환경산업기술원 누리집(www.keiti.re.kr)에서 신청서를 내려받아 작성한 후 관련 서류와 함께 우편(122-706, 서울시 은평구 진흥로 215 한국환경산업기술원)으로 제출하면 된다. 인정여부는 피해 인과관계 조사와 환경보건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결정되며, 피해자로 인정될 경우 정부로부터 의료비와 장례비(사망자)를 받을 수 있다.
앞으로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과 환경보건시민센터는 향후 국내에서의 추가소송을 조직하고 레킷벤키저 본사를 상대로 한 영국법원 제소를 준비하는 것과 동시에 영국과 유럽 등 국제시민사회에서 살인기업을 규탄하는 활동을 전개할 예정이다. 또한 사회적합의기구 구성을 추진해 가습기살균제 피해 문제 해결이 더 이상 지연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