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대책... 조정안과 구제법 모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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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대책... 조정안과 구제법 모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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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서지 않는 가해 기업들... 피해자만 '막막'


오마이뉴스 2023.9.26 최예용 


[이게 이슈] 난항에 빠진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대책... 조정안과 구제법 모두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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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월 1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조순미씨가 SK케미칼, 애경산업의 전 대표, 이마트 및 제조업체의 전직 임·직원들 총 11명에게도 모두 무죄가 선고 되자 기자회견에서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 이희훈


 

2022년 3월에 나온 '가습기살균제 피해지원을 위한 조정안'이 아직도 실행에 옮겨지지 않고 있다. 9개 가해 기업 중 조정위원회에 참여한 옥시레켓벤키져와 애경이 조정안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 단체 중에서도 동의하지 않는 그룹이 있다. 이 때문에 전국 8천여 명의 피해자와 유족들의 정신적 경제적 고통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참사가 2011년에 알려진 이후 6년 만인 2017년에 피해구제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게 최소한의 병원 치료와 사망자에 대한 장례비 그리고 경제적 능력을 잃은 중증 피해자들에게 최소한의 생활비 및 간병비를 의료보험의 범위내에서 가해 기업에게 걷은 기금에서 지급하는 제도다.




가해 기업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나 몰라라 하자 국회가 '최소한의 긴급 구제(relief)' 차원에서 만든 제도다. 신체적, 경제적, 정신적 피해를 포함한 제대로 된 배·보상 (compensation)의 개념이 아니다. 때문에 배·보상은 구제법과 별도로 이루어져야 한다.  


'조정안'이란 참사가 알려진 지 10년째가 되었지만 배·보상에 관한 피해대책이 마련되지 않자 피해자단체와 가해기업들이 구성한 조정위원회가 도출해낸 사실상의 '가습기살균제 피해 배·보상안'이다. 2021년 8월31일 조정위원회를 만들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언론 기사로 알려졌다. 당시 환경부 장관이 전 헌법재판관 김이수씨를 조정위원장으로 추천한 것은 환경부도 조정방식에 적극적이라는 이야기였다. 


독자에겐 '조정'이란 말이 조금 생소할 수 있겠다. 조정이란 간단히 말해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합의'를 말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합의'라는 말을 쓰지 않고 왜 '조정'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까. 가습기살균제 사건과 같이 피해자도 많고 가해자 기업도 많아서 양자가 추천한 전문가들(주로 변호사)이 조정위원회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나온 합의안을 조정안이라고 말한다. 이 조정안을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모두 받아들이면 '조정이 이루어졌다'라고 한다. 


민사 법정에서도 조정이 이루어지곤 하는데 판사가 판결을 내리기 전에 원고와 피고 양자에게 '서로의 주장에서 한 발씩 물러서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 라고 권고하는 경우다. 이 경우 어느 한쪽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판결로 가는데, 판결은 돌이킬 수 없고 사실상 어느 한쪽에 불리한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양자 모두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어서 판사가 조정을 제시한다면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왜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일반적인 법적 절차로 해결되지 못할까


일반적인 분쟁 해결 과정은 모두들 아는 바와 같다. 먼저 양자가 대화로 해결한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교통경찰을 부르기 전에 양자가 합의금을 주고받고 끝내는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피해가 심각하거나 사고 관련자가 여럿일 때는 합의 방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교통경찰을 부르고 입건되고 사망사고 등의 경우 구속되어 재판을 받기도 한다. 범죄 여부를 따지는 형사재판에서 유죄판결이 나오면 피해 배·보상을 다루는 민사재판을 통해 배보상 금액의 크기가 결정되어 분쟁의 법적인 절차가 마무리된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에서도 이러한 법적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걸까? 당연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가습기살균제 재판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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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4월 25일, 가습기살균제 가해기업 옥시와 애경 범국민불매운동 선포식이 피해조정위원회가 입주한 서울 종로 교보빌딩앞에서 피해자유족과 서울환경운동연합, 환경보건시민센터 회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첫째, 원고·피고가 많고, 법적 해결 과정의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있다. 2012년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피해자들이 처음 형사고발을 했는데 경찰과 검찰이 차일피일 미루다 2015년 말에야 수사에 나섰고 2016년 초에 서울중앙지검에 '가습기살균제 피해사건 수사팀'이 구성되었다.


첫 구속자가 나온 것이 2016년 4월인데 7년이 지난 2023년 9월 현재에도 재판이 계속되고 있다. 수사 대상인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 기업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또 검찰이 PHMG와 PGH를 원료로 한 제품 관련 기업들과 CMIT/MIT 원료제품 기업들을 구분해서 몇 년의 시간차를 두고 수사했기 때문이다.


옥시,롯데,홈플러스,세퓨 등 PHMG와 PGH 원료제품 기업들은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옥시 전 대표 신현우의 경우 징역 6년이었다. 헌데 CMIT/MIT 원료제품 기업인 SK,애경,이마트 등에 대한 검찰수사는 2019년에야 본격 진행되었고 2021년초에 1심 판결이 나왔는데… 아뿔싸! 모두 무죄란다. 


이것이 이 사건의 두 번째 특징이다. 즉 일부 기업은 유죄, 다른 일부 기업은 무죄인 상황이다. 2023년 9월 말 현재 SK, 애경, 이마트에 대한 항소심이 진행중이고 연말경 판결이 나올 예정이라 그 결과에 귀추가 주목되지만 1심에서 무죄가 나온 건 큰 사회적 충격이었다.


재판부는 피고 측이 주장한 'CMIT/MIT는 PHMG보다 독성이 크게 낮아서 검찰이 주장한 독성시험 결과들은 모두 작위적이라 신뢰할 수 없다. 10여 명의 단독사용자들의 제품 사용 여부도 확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소위 '일반적 인과관계'와 '개별적 인과관계' 모두를 부인한 셈인데 재판부가 이를 모두 받아들여 피고들 손을 들어줘 버렸다.   


형사재판이 이렇게 오래 걸리고 복잡하게 흘러가는 사이에 민사재판은 한마디로 손을 놔 버린 형국이다. 피해자 개인별, 혹은 여럿이 단체로 제기한 민사소송이 수 십 건에 이르는데 단 한 건만 1심 판결이 나왔고 나머지는 하세월이다. 그 한 건도 소액 소송이어서 그다지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 


여기서 한가지, 대법원 형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옥시, 롯데, 홈플러스, 세퓨의 경우는 왜 민사재판에서 배·보상을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세 번째 특징인 이 부분은 기업이 인정하는 피해인정 질환과 구제법이 인정하는 피해인정 질환이 다르기 때문이다.


옥시 등은 이 사건 초기의 인정 질환인 '가습기살균제 폐손상' 1·2단계 피해자 500여 명에 대해서만 배·보상했다. 참고로, 어린이 사망의 경우 최대 10억 원이었다. 그들 중 일부가 옥시, 롯데, 홈플러스, 세퓨의 형사재판 피해자 원고였다. 그런데 기업들은 그들 피해자들에 대한 형사재판 과정에서 배·보상을 진행했다. 형사재판에서 유리한 판결을 받기 위한 전략이었고 결국 2심에서 감형되었다. 이들의 질환은 '가습기살균제 폐손상'으로 '다른 원인이 아닌, 가습기살균제 의해서만 발병하는 특별한 질환' 즉 '특이적' 질환이다.


2017년에 제정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에 의해 2023년 8월말까지 인정된 피해자들은 5041명인데, '가습기살균제 폐손상' 1·2단계 500여 명을 제외하고 4500여 명은 '천식, '간질성폐질환', '폐렴', '태아피해' 등의 질환자들이다. 기업들은 이들 피해자들은 '특이적'인 질환자들이 아니라 '비특이적'인 질환 즉 '가습기살균제 외에 여러 다른 발병원 인들이 있는 경우들이어서 우리가 책임지고 배·보상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이들에 대한 배·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옥시 등 가해 기업들은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한 특징인 '비특이성'을 내세워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식의 경우 반려동물 털에 의한 천식과 가습기살균제에 의한 천식을 의학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데 이런 신체적 의학적 특징을 악용하고 있는 거다.


그러나 실제로 구제법의 판정과정은 1)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한 후 일정기간 이내에 발생한 질환이나 사용전의 질환이 악화된 경우에 대해서 2) 독성학적 기전이 확인되고, 3) 임상적 판단을 바탕으로, 종합적인 '역학적 상관관계'를 근거로 진행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의 20일 자 <오마이뉴스> 기사 참조, 관련기사: 가습기살균제 폐암 피해 인정? 환경부가 말하지 않은 진실, https://omn.kr/25pnt)


조정안이 어떻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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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3월 16일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및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족 주최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 살인기업 규탄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들은 조정위의 배보상 조정안을 규탄했다. ⓒ 연합뉴스


 

자 이제 이 글의 서두에서 제기한 내용으로 돌아가자. 조정안의 내용이 어떻길래 기업과 피해자 양측 모두에서 조정안에 대해 반대의견이 나온 걸까? 조정안은 다음과 같은 내용과 특징을 갖고 있다.


1) 전적으로 피해구제법의 판정 결과를 바탕으로 한다. 즉, 조정위원회가 독자적으로 개별 피해사례에 대해 '비특이성' 여부 등 가타부타 따지지 않는다. 2) 피해 신고자 모두를 대상으로 한다. 구제판정 불인정자도 포함해 가습기살균제 제품을 사용했다는 피해만으로도 소액의 조정금을 지급한다. 3) 기업이 '가습기살균제 폐손상' 1·2단계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배보상금보다는 조정금이 적다. 4) 일반적인 합의와 조정에서와 같이 조정이 성립되면 추가적인 법적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 등이다. 이런 특징 하에 조정안은 최대 9천억 원의 조정기금이 필요하고 이를 구제법 피해기금 분담률에 맞춰 각 기업들의 분담금을 책정했다. 


조정위원회는 조정안을 만들면서 피해자 정보는 정부로부터 제공받았고 원칙과 세부 조정의견에 대해 양쪽의 의견을 계속 청취했다고 한다. 때문에 최종 조정안이 양쪽에서 잘 받아들여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정작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 모두에서 반대의견이 나왔다. '조정'의 성격상 어느 한쪽에서라도 반대하면 이루어질 수 없는데, 기업과 피해자측 양측 모두에서 반대 의견이 제시된 것이다. 


옥시와 애경은 왜 조정안에 반대하나


가해자 즉 기업 측의 조정위 참가기업은 모두 9개인데 이중 SK, 롯데, 홈플러스, GS, LG, 다이소, 헨켈 7개 기업은 조정안에 대해 찬성했고 옥시와 애경 2개 기업은 반대했다. 문제는 옥시와 애경이 가장 많은 피해자를 냈고 따라서 조정 기금 분담률도 전체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옥시와 애경을 빼고 갈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먼저 옥시와 애경은 자신들의 분담금이 너무 많다고 주장한다. 2017년 구제법 시행과정에서 각 가해 기업들의 책임이 분담금 비율에 반영되었다. 조정안은 그 구제법을 그대로 적용한 것뿐이다. 


특히 옥시는 SK가 전체 가습기살균제 제품 대부분에 원료를 공급한 부분에 대해 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주장은 옥시가 할 주장은 아니다. 옥시는 자신들이 저지른 책임에 대해 최선을 다하면 된다. SK가 제품원료기업으로서 져야 할 책임이 상대적으로 적게 반영된 문제는 SK가 조정안 기금 마련 과정에서 추가적으로 더 내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조정기금은 더 커져서 조정안이 더 안정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옥시와 애경 등 기업들은 소위 '종국성'을 주장한다. 종국성이란 이번 조정안을 통해 가습기살균제에 관한 자신들의 책임을 모두 지워버리겠다는 거다. 더 이상의 추가책임이 없게 해달라는 거다. 언뜻 맞는 주장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다. '기업이 주장하는 종국성'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만약 폐암처럼 조정안 합의 이후에 심각한 건강피해가 새롭게 나타나면 어쩔 것인가? 또 현재는 어리거나 청소년인 피해자의 경우 앞으로 살아가면서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새롭고 심각한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에 처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도 피해신고자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새로운 피해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포함한 '종국성'이 과연 가능한 건가? 이것이 피해자들이 조정안에 대해 우려하고 반대하는 이유다. 


조정안과 구제법이 모두 필요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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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 국회에서 열린 환경노동위원회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 공청회에 출석한 기업측 진술인들이 자리에 앉아 있다. 맨 오른쪽은 안식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조정위원회 사무국장. 왼쪽부터 SK케미칼 김철 대표, 애경산업 채동석 대표, 옥시레킷벤키저 박동석 대표. ⓒ 연합뉴스



이 때문에 조정안과 관련된 종국성은 '완전한 면죄부'가 아니라 조정안의 기초가 된 '구제판정 내용에 국한된 종국성'이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천식 피해인정자의 경우, 이번 조정안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구제법에서 인정된 천식에 국한된다. 만약 이 천식 피해자에게 폐암과 같은 추가 질환이 발생하고 그 질환이 가습기살균제 때문임이 밝혀진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구제법이 지원해야 한다. 조정안이 실현되더라도 구제법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물론 추가 질환에 대한 새로운 조정이나 민사소송도 가능해야 한다.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만약 기업의 주장인 '완전한 면죄부'로서의 종국성이라면 그것은 불합리하고 기본적인 법적권리마저 무시하는 초법적인 발상이다.        


기업들은 조정안 이후의 문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습기살균제 참사 사건에는 국가의 책임도 크다. 그러나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인 배·보상을 하는 문제는 그동안 국가가 구제법을 운영하는데 사용한 수 백 억원의 연구 조사 및 판정 과정의 경비를 부담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다. 당연히 국가가 사용하는 돈은 모두 세금이다. 국가기관인 과거 대통령들과 공정위원회와 기술표준원 그리고 환경부와 환경과학원 등이 잘못한 일들은 앞으로 명백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일부 피해자들은 앞서 설명한 옥시 등이 '가습기살균제 폐손상' 1·2단계 피해자들에게 지급한 배·보상 수준의 조정안을 주장하며 제시된 조정안에 강력히 반대한다. 정서적으로는 맞는 주장이다. 피해자들이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내 돈 주고 수퍼에서 사다 쓴 제품 때문에 사람이 죽고 다친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제품을 제조·판매한 기업들에게 왜 제대로 된 책임을 묻지 않으며 피해자들에게 충분한 배보상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긴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현실은 간단하지 않다. 법원은 SK, 애경, 이마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해자들의 질환이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발생했다는 명확한 판단을 의학계도, 법원도, 국가도 하지 못한다. 구제법이 인정한 피해자들에게 가해기업이 배·보상 하지 않아도 강제하지 못한다. 시간만 하염없이 흐른다. 이런 과정에서 나온 것이 사회적해결 방식인 조정이다.


삼성 백혈병 직업병 사건의 조정 사례 


조정에 의해 문제를 해결한 대표적인 사례는 '삼성전자 노동자의 백혈병 산재 사건'이다. 흔히 '황유미 사건'으로 알려진 바로 그 경우다. 당시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에서 일하던 20대의 젊은 여성노동자에게서 매우 드문 급성백혈병이 발병해 산업재해가 신청되었는데 불승인되었다. 작업 현장에서 백혈병 암을 일으킬 만한 원인물질이 없었다고 회사 측에서 주장했고 산재인정기관에서 삼성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사건은 사회적 이슈가 되었는데 유사한 피해자가 속속 드러났고 이 문제는 한두 명의 개인적 사건이 아닌 삼성전자에서 발생한 노동자 집단 발병 사건으로 커졌다. 한편 삼성은 대학교수들에게 현장 조사를 맡겼는데 폐암 발병 물질인 벤젠이 검출되었다는 사실이 국회를 통해 알려져 이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후 몇 년 동안 피해자단체와 삼성 간의 대립이 계속되다가 조정방식이 제안되어 양자가 추천한 조정위원회에서 조정안이 나왔다. 그런데 삼성 측에서 이 조정안을 거부하면서 피해자들을 갈라치기 했다. 이에 강력히 반발한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를 필두로 일부 피해자와 지원단체들이 서울 강남역 인근의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2년 넘도록 텐트 농성을 벌였다. 그사이 2016년 말~2017년 초 촛불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사건의 해결도 주요한 촛불의 요구사항이었다. 국정농단 사건에 삼성전자의 이재용 회장이 연루된 사실이 밝혀졌고 삼성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결국 삼성은 처음의 조정위원회에 문제해결의 전권을 맡기겠다고 물러섰고 피해자 단체도 동의했다. 2018년 조정안이 성립되어 서울 프레스센터 20층에서 대대적인 조정안 협약식 행사가 열렸다. 삼성백혈병 조정안의 핵심은 1) 산재로 인정되지 않는 희귀질환 피해노동자 사례를 모두 포함하되 2) 조정금액은 산재인정시 받는 산재보험금보다는 낮은 액수를 지급하는 것이다. 삼성 측이 액수에 상관없이 소수의 적용대상을 선호했다면, 피해자단체는 다수의 적용대상을 더 선호한 셈이었는데 조정안은 다수에 적용하되 대신 산재보험금보다는 낮은 액수를 조정금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사이에 산재인정기준이 넓어져 백혈병 등 일부 희귀질환이 산재로 인정되는 흐름이 생긴 것도 이런 조정합의가 가능했던 배경이다. 삼성백혈병 사건은 조정 방식으로 해결되었지만, 첫 번째 조정안은 양측에 의해 거부되었고 힘든 시기를 거쳐 두 번째 조정안이 받아들여지는 우여곡절을 거쳤다. 이렇게 삼성반도체의 경우가 힘든 사회적 해결 과정을 거치는 동안 유사한 반도체 사업장인 SK하이닉스 등에서는 비교적 쉽게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졌고, 큰 갈등없이 삼성 조정안과 유사한 내용과 방식으로 결론이 났다.          


가습기살균제 사건은 대표적인 환경보건 피해이고 삼성 백혈병 사건은 대표적인 산업보건 피해다. 소비자와 노동자가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은 억울한 경우들인데 기업들의 몰염치한 책임회피 과정에서 법적 의학적 인과관계를 밝히는 일이 매우 어려운 경우이기도 하다. 두 사건 모두 '제도적인 해결 장치인 법적해결' 과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적 해결 장치인 '조정' 과정에 기대고 있다.


조정은 사회적 합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자신들의 주장에서 한 발씩 물러서야 가능하다. 가해기업의 '종국성' 주장과 일부 피해자의 '나도 10억'이라는 주장은 조정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다. 안타깝지만 선택해야 한다. 일부 이견은 보완할 수 있다. 조정안을 수용하되 구제법을 유지하는 것, 가능하면서 현실적인 가습기살균제 해법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최예용씨는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이자 환경보건학 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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