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건장진단, 환경측장과 '후쿠시마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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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칼럼] 건장진단, 환경측장과 '후쿠시마 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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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12일자 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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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0여년 세월이 지난 지금, 건강진단 제도나 유해위험수당 제도는 상당 부분 그의 주장대로 바뀌었다. 그뿐 아니라 석면 사업장의 위험성도,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도, ‘라돈침대’의 영향도, 가습기살균제 문제도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난 뒤에는 언제나 그의 주장이 옳았음이 밝혀졌다. (…) 그 깡마른 사내는 바로 백도명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명예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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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5월16일 오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 사망 30주기 추모조직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에서 삼성반도체 희생자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가 발언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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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1988년 15살 소년 문송면군이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 수은중독 직업병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수은중독 직업병’이라고 쉽게 표현하지만 처음 회사 근처 병원에서 감기로 진단받은 뒤 수은중독으로 인정되기까지 몇달 동안 수많은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켜켜이 쌓였다. “송면이가 죽었습니다”라는 전화를 받고 깊은 밤중에 병원으로 달려갔던 많은 활동가와 보건의료인들 대부분 지금도 여전히 현장에 남아 있다.

1991년엔 원진레이온 노동자 김봉환씨가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사망했다. 이 사건 역시 “이황화탄소 중독”이라고 쉽게 표현하지만, 고인의 관이 놓인 회사 정문 앞에서 137일 동안 집회가 이어졌다. 관을 냉각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으나, 고인에게 정말 송구스러운 표현이지만 ‘주검에서 물이 흐를 지경이 돼서야’ 그 싸움이 끝났다.

이 두 사건의 중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단체가 노동과건강연구회였다. 우리 사회 노동재해에 관한 인식이 매우 취약할 때여서 서울 구로시장 근처 허름한 상가 사무실에 걸려 있는 ‘노동과건강연구회’라는 간판을 보고 들어와 “혹시 개소주나 흑염소 같은 건강식품 파는 곳이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나 역시 노동과건강연구회 회원이었고 내 삶을 통틀어 노동재해 관련한 활동을 가장 열심히 했던 시기였다. 1981년 “군사정권의 필요에 의해 급조됐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졸속으로 도입된 산업안전보건법은 그 내용이 부실해 노동자의 건강을 제대로 담보할 수 없었다. 유명무실한 건강진단 제도가 특히 그러했다. 회사 지정병원에 가서 받는 형식적 건강진단을 통해 노동자의 직업병이 발견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노동조합 노동안전보건 담당 간부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그 건강진단을 좀 더 내실화할 수 있을지 모색하는 활동에 열중했다.

환경측정 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와 달리 회사가 작업을 모두 중단하고 대청소한 뒤 이뤄지는 형식적 환경측정을 통해 작업장의 유해위험요소가 제대로 밝혀지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소음이 발생하거나 분진이 많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적은 금액의 유해위험수당이 지급되기는 했지만 그것도 노동조합이 어느 정도 힘을 갖추고 있는 사업장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는 당연히 유해위험수당을 인상하고 가능한 한 적용 사업장을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활동에 열중했다.

어느 날 우리 모임에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의사라고 소개받은 깡마른 사내가 찾아왔다. 열띤 토론을 잠자코 듣고 있던 그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귀를 기울여야 제대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건강진단 제도를 폐지해야 합니다. 회사에서 비용을 받는 의료기관이 노동자 건강진단을 제대로 하기는 어렵습니다. 회사가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건강진단 제도를 폐지하고 노동자가 비용을 부담하거나 공공기관이 시행할 수 있도록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유해위험수당도 폐지해야 합니다.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면서 수당을 받을 것이 아니라 유해하고 위험한 사업장을 없애야 합니다.”

내 기억으로 그날 그 자리에서 그 주장에 동의한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 친구가 제정신인가?’ 싶었다. 돈 한푼 아쉬운 노동자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생각이고 그것이 바로 현장을 모르는 지식인의 한계라고 단정지으며 우쭐해했다.

그로부터 30여년 세월이 지난 지금, 건강진단 제도나 유해위험수당 제도는 상당 부분 그의 주장대로 바뀌었다. 그뿐 아니라 석면 사업장의 위험성도, 반도체 공장의 백혈병도, ‘라돈침대’의 영향도, 가습기살균제 문제도 적지 않은 세월이 지난 뒤에는 언제나 그의 주장이 옳았음이 밝혀졌다. “피해 사실을 입증하고, 알리고, 더 나아가 사회를 바꾸는 것이 과학자의 책임”이라고 믿는 그의 모습을 피해자들의 기자회견장이나 가습기살균제 제조사인 영국 옥시 본사 앞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깡마른 사내는 바로 백도명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명예교수다.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기준치의 100배를 넘는 물고기가 잡혀 소위 ‘세슘우럭’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슘으로 범벅이 된 물고기는 단순히 표층해수만 들이마시게 해서 생기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세슘새우’ ‘세슘플랑크톤’ 등 먹이사슬의 문제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백도명 선생의 ‘후쿠시마 괴담’을 내가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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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일본 후쿠시마현 앞바다에서 잡힌 우럭에서 1㎏당 500베크렐(㏃)의 세슘이 검출됐다고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이 보도했다. 엔에이치케이 방송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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