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1] "정말 살고 싶어"…1774번째 가습기살균제 피해 사망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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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1] "정말 살고 싶어"…1774번째 가습기살균제 피해 사망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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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살고 싶어"…1774번째 가습기살균제 피해 사망자의 말 

배구선수 출신 안은주씨 11년 투병 끝에 3일 사망
환자들 삶은 파탄…여전히 사과와 배·보상은 없어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2022-05-07 
지난 2016년 5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 '옥시 제품 불매' 집중행동 선언 기자회견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고(故) 안은주씨가 불매운동을 알리는 피켓을 들고 있다. 2016.5.9/뉴스1 © News1 박세연 기자

"언니, 살고 싶어." 

오른손에 휴대용 산소통이 올려져 있는 손수레를 끌고 가족들 앞에 나타난 안은주씨가 세 살 위 언니 안희주씨를 만나 꺼낸 말은 단순했다. "폐 이식을 하면 살 수 있데. 정말 정말 살고 싶어."

산소통을 빠져나오는 공기는 튜브를 통해 은주씨의 코로 산소를 밀어 넣었다. 178㎝의 큰 키, 산소통이 작아보일 정도로 당당한 체구를 가진 은주씨는 건강에는 늘 자신 있었지만 이제 산소통이 없으면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그의 폐는 이미 3분의 2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살고 싶다'는 말에 가족들은 아무 말 없이 병원비를 모았다. 형제들은 본인들의 집과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땅을 담보로 대출을 냈다. 은주씨가 구조를 요청한 2011년 가을 그후로 11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가족들에게는 10억원이 넘는 빚이 남았다. 

마지막까지 삶을 끈을 쥐고 있었던 은주씨는 지난 3일 새벽 쉰넷의 나이로 가족의 곁을 떠났다. 그의 이름 앞에는 '1774번째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그가 사용했던 '옥씨싹싹 뉴가습기당번'은 그의 유품 중 가장 중요한 물건으로 남았다.

◇"가…지…마…"

희주씨는 지난달 27일 1박2일 일정으로 동생을 찾았다. 한 달에도 많으면 7~8번씩 경남 함안에서 동생이 입원한 서울 연세세브란스병원까지 병문안을 왔다. 평소에도 언니가 찾아오면 컨디션이 좋았던 은주씨는 그날 유독 몸 상태가 좋았다. 

은주씨는 '모두 보고 싶다'며 언니의 휴대전화로 가족들과 하나하나 영상 통화를 했다. 인공호흡기를 달기 위해 목을 절개해 말도 하지 못했고 몸도 마비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지만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가족 중 군 복무를 하는 아들하고만 통화가 닿지 않았다.

이튿날인 지난달 28일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병실을 나서려는 희주씨를 은주씨가 붙잡았다. 목을 절개하고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은주씨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입 모양으로 힘겹게 "가…지…마…"라고 말했다. 

이전과 다르게 유독 자신을 잡는 동생에게 희주씨는 "내려갔다가 또 올 게. 안 가면 집도 넘어가. 은행에 이자도 넣어야 하고 네 간병비도 내려면 가야지"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띄었다. 

은주씨는 언니가 가고 나서도 마비된 몸에서 유일하게 조금씩 움직일 수 있는 오른쪽 팔을 흔들며 한참을 "가지마"라고 말을 했다. 그 "가지마"라는 말은 은주씨가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 됐다. 

지난 2019년 12월13일 2차 폐 이식 수술을 마치고 일반병실로 전원된 안은주씨가 말을 할 수 없어 글로 쓴 자신의 심경(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뉴스1

희주씨가 집으로 돌아간 뒤 이틀이 지난달 30일 토요일부터 은주씨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됐다. 일요일에는 자신이 그토록 가고 싶지 않아 했던 중환자실로 병실을 옮겨야 했다. 희주씨는 "(동생이) 너무너무 살고 싶어 했어요. 중환자실에 가면 살아나오지 못할 것 같으니까 절대 중환자실엔 안 간다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가족들은 은주씨를 중환자실로 옮기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옮기면 살릴 수 있다'는 의료진의 말에 전실을 허락했다. 당시 일이 있어 전남 강진에 나와있던 희주씨는 남편과 함께 8시간을 차로 달려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전인 동생을 배웅했다. 중환자실로 들어가면 더 이상 면회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중환자실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 증상이 점차 나아졌다. 간호사들은 '필요하면 병원에서 기다리겠다'는 희주씨를 '돌아가도 된다'도 안심시켰다. 두고온 짐을 정리하러 다시 강진으로 내려온 희주씨에게 월요일인 지난 2일 오전 다시 전화가 왔다. 중환자실을 담당하는 교수는 희주씨에게 "다시 올라오셔야겠다"고 말했다. 

남편과 차에 오른 희주씨는 이번엔 기차를 타기 위해 광주역으로 향했다. 급한 마음에 단속 카메라도 무시한 채 달렸다. 기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정오쯤이 됐다. 남은 가족들이 서울로 올라오고 면회를 위해 코로나19 PCR검사를 마친 뒤 오후 10시쯤이 되어서야 '임종면회'가 허락됐다. 

병실 안 은주씨는 아무런 인지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혈압이 계속 낮아지고 심장박동도 일정하지 않아 병실에는 위험신호를 알리는 기계음이 반복해 울려댔다. 마지막 인사를 위해 알람음이 꺼지고 가족들에게는 2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희주씨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사실 임종면회도 벌써 다섯번째였다. 삶의 의지가 강했던 동생은 또 견뎌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임종면회를 마친 희주씨는 주변에서 박스를 구해와 환자 대기실 바닥에 깔았다. 또 한참을 가다리면 '환자 상태가 좋아졌으니 돌아가도 된다'는 말을 듣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락은 생각보다 일찍 왔다. 은주씨는 날을 넘겨 화요일인 지난 3일 오전 0시40분 숨을 거뒀다. 합병증으로 각막까지 부풀어 올라 감기지 않는 눈꺼풀에는 테이프가 붙었다. 그래도 희주씨는 고통에서 벗어난 동생의 마지막 모습이 편안해 보였다고 했다.

◇모든 것을 무너뜨린 가습기살균제

어릴적 은주씨는 또래 친구들 중에서 가장 빠른 아이었다. 자라면서 키도 훌쩍 컸다. 은주씨의 할아버지는 유난히 체격이 좋은 손녀에게 운동을 시키는 게 좋겠다고 했고, 그렇게 은주씨는 초등학교 6학년부터 배구를 시작했다. 

씩씩하고 고집이 있고 당찼던 은주씨는 중학교, 고등학교 배구팀의 주장을 도맡았다. 마산제일여고를 졸업한 은주씨는 1987년 실업팀인 호남정유에 입단했다. 당시 신문들은 은주씨가 다른 선수들과 함께 '주전급 신인'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적었다. 한 신문은 "끈끈한 수비력으로 강팀들을 괴롭혀온 호남정유가 안은주의 가세로 최대의 다크호스로 주목을 끌고 있다"고 적기도 했다. 

부상으로 인해 실업팀에 몸담은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은퇴 이후에도 은주씨는 배구를 놓지 않았다. 초등학교 배구부 코치로, 생활체육 지도자로 배구를 계속해갔다. 평생 운동을 하며 살아온 은주씨는 지병도 없었고 흔한 감기조차 자주 걸리지 않았다. 

건강하던 시절 배구를 하는 안은주씨의 모습(안은주씨 유족 제공)© 뉴스1

갑자기 호흡이 어려워지는 증상을 느낀 것은 2011년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것도 숨이 차서 힘들어졌다. 당시 살고 있던 경남 밀양의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본 의사는 '뭔가 이상하다'며 '큰 병원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권했다. 부산 동아대병원에서 은주씨는 '원인 미상의 폐 질환'으로 폐의 3분의 2가 굳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앞으로 3년 정도 더 살 수 있다'고 했다. 

은주씨의 이름이 신문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가습기살균제 논쟁이 본격화된 2015년이었다. 그사이 은주씨는 질병관리본부로부터 가습기살균제 피해 등급 판정을 받았으나 '3등급(가능성 낮음)' 판단이 내려지면서 치료비 지원 등을 받지 못했다. 2015년 10월 1차 폐 이식을 받고 잠시 건강을 되찾았지만 이내 합병증으로 병원 입·퇴원을 반복하게 됐다. 

결국 2차 폐 이식이 필요하다는 소견에 따라 2018년 12월14일 재입원을 하고 2년을 기다려 2019년 11월30일 2차 폐이식을 받았으나 몸은 회복되지 않았다. 수술 후 합병증으로 목 부위를 절개하고 산소발생기를 착용했다. 몸 상태는 계속 악회돼 신장 투석과 기관지 확장시술을 받아야 했다. 하반신 마비와 욕창이 생겼고 시력과 청력이 저하돼 왼쪽 눈과 귀로는 듣고 보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2020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이 개정되면서 은주씨는 피해자로 인정을 받고 간병비 등을 지원받기 시작했지만 병원비와 간병비를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가족들이 집과 땅을 담보로 잡히고 대출을 받았다. 희주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농사를 크게 지어 '금수저'라고 불렸던 자신들이 이제는 은행에 갈 때마다 눈치를 보는 신세가 됐다고 했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안은주씨가 지난해 8월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과 영상통화를 하며 자신이 쓴 글씨를 보이고 있다.(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 뉴스1

◇피해자는 있는데 책임지는 이는 없다

"옥시는 배상하라." 지난해 8월30일 가습기살균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동시다발 일인시위가 벌어진 날 은주씨는 떨리는 손으로 노트에 이 문구를 적어 내렸다. 목을 절개해 말을 할 수 없었고 마비 증상으로 손은 떨렸지만,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잊지 않았다. 

많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그러했듯이 은주씨는 기업이 안전하다고 홍보하고 나라가 허가한 제품을 돈을 주고 사용해 질병을 얻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사과와 배·보상을 받지 못했다. 

옥시는 사건 발생 5년 만인 2016년 기자회견을 통해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한다는 말을 전했지만 보상에 대한 언급도 모호했고 당사자에 대한 직접적인 사과도 아니었다. 

그나마 지난 2월 가습기 참사가 처음 알려진 2011년 이후 11년 만에 피해구제 조정안이 나오면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 대한 가해기업들의 배·보상이라도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기대가 모아졌다. 

피해자 단체와 가해 기업이 참여한 민간조정위원회는 사망자에게는 사망 당시 연령에 따라 1억5000만원에서 4억원까지, 생존자의 경우 피해 정도에 따라 4억8000만원까지의 피해보상액을 책정했다. 

평소 가족들이 자신 때문에 평생 빚의 무게에 억눌려 살아가야 하는 것을 걱정했던 은주씨는 조정안이라도 이행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가해기업 중 7개 기업은 조정안에 동의를 했지만 책임이 가장 큰 옥시와 애경 측이 동의하지 않으면서 동의안이 무산될 위기에 놓여있다. 

지난 5일 장례를 마친 안은주씨의 유해가 경남 함안추모공원에 묻혔다. © 뉴스1

지난 4일 오전 10시 은주씨의 빈소가 마련된 함안 영동병원 장례식장, 은주씨의 입관식을 마치고 식장을 돌아온 희주씨는 동생의 영정 앞에 엎드려 한참 동안 곡을 했다. "얼마나 나가고 싶어했노. 울지 말고 가그래이, 울지 말고 가라. 아이고 불쌍해서 어짤고, 아이고 불쌍해서 억울해서 어짤고."

영정 앞 제단 위에는 종이컵에 담긴 아메리카노 커피가 올랐다. 희주씨는 커피를 좋아하던 동생이 '날씨 맑은 날 벤치에 앉아 커피 한잔을 하는' 그런 평범한 일상을 보내지 못한 것이 안쓰러워 커피를 상에 올렸다고 했다. 

희주씨는 동생의 병이 나으면 가장 먼저 제주도로 함께 여행을 가서 바닷가 카페에 앉아 바닷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시기로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못했다고 했다.

2018년 12월14일 두번째 폐이식을 위해 입원한 이후 사망하는 순간까지 병원을 벗어나지 못했던 은주씨는 장례를 마치고 나서야 병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병원 장례식장을 나선 지난 5일 전국은 유난히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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