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피해 공식화’ 9년, 유족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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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피해 공식화’ 9년, 유족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최초 피해자는 누구일까. 공식적으로 알 수 없다. 흡입 독성이 있는 가습기 살균제와 죽음 사이 인과관계를 확인하지 못한 채 숨진 이들이 많다. 정부가 최초로 인정한 피해자만 있을 뿐이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하나의 ‘기일(忌日)’이 없다. 피해자마다 가습기 살균제 사용 시작 시점과 사용 기간이나 용량이 모두 다르다. 투병 기간 차이도 크다. 3년 시한부 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난 피해자가 있는가 하면, 10년 넘게 투병 생활을 한 피해자도 나왔다.
질병관리본부는 지난 2011년 8월 31일 알 수 없는 폐 손상으로 숨진 산모들의 사망 원인을 가습기 살균제로 추정하는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두 차례 검찰수사, 국회 국정조사, 정부의 피해지원 등이 이뤄졌지만 유족들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진상규명은 더뎠고 정부는 피해자에게 피해 입증 책임을 전가하며 피해등급을 잘게 쪼갰다. 정부의 피해 인정도 까다롭게 이뤄졌다.
■정부가 오히려 이간질?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공식화한 지 오는 8월 31일로 9년째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유족 8명과 비대면 집담회를 진행했다. 유족들은 모두 “이제 그만 잊고 싶다”, “우울증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집담회는 지난 8월 26일 오후 2시 30분부터 2시간 30분 동안 이뤄졌다. 온라인 화상회의 애플리케이션 ‘줌’을 이용했다. 집담회에는 김태종씨(65), 송기진씨(57), 이규동씨(58), 이재인씨(60), 이종건씨(48), 조병렬씨(64), 최승영씨(49), 최주완씨(66)가 참석했다. 모두 가습기 살균제로 부인을 잃은 유족이다.
지난 8월 21일 기준으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 신청자는 6844명이다. 이중 사망자는 1559명이다. 추정 피해 규모는 더 크다.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는 지난 7월 27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 경험자가 약 67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규모가 크다 보니 피해자와 피해 유족의 모임도 많다.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산업기술원 홈페이지를 보면 피해자 단체만 25곳이 등록돼 있다. 지역별, 사용제품별, 피해단계별로 성격이 나뉜다.
이날 비대면 온라인 집담회에선 최승영씨와 최주완씨가 함께 한 화면에 등장했다. 유족들 사이 기자회견 참석, 1인 시위 요청을 하며 친분을 쌓았다. 최주완씨는 “같은 동네에 살며 연락을 하고 지낸다. 수년간 연락하고 지내며 서로 의지하는 피해 유족이 지금도 몇몇 분들이 있다”고 했다. 그는 2008년 3월 부인 김영금씨를 간질성 급성 폐렴으로 잃었다. 집에서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썼다.
모든 피해 유족들이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참사 수습에 실패하면서 참사 후유증이 길어지고, 깊어진 탓이 크다. 최승영씨는 “정부가 나눈 피해인정 기준(1~4단계)에 따라 보상 수준이 다르고, 판정 기준을 불합리하게 적용받은 피해자들이 많다”고 했다. 최씨의 부인은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4~5년 정도 썼다. 원인 불명의 간질성 폐렴을 앓다가 2009년 2월 사망했다. 둘째 딸은 폐 호흡량이 기준치에 미달한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피해인정 기준에 따라 피해자들 사이가 서먹해지기도 한다. 사실상 정부가 피해자를 ‘갈라치기’한 결과”라고 말했다.
2017년 5월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소속이던 김지원씨가 쓴 논문 <누가 ‘진짜 피해자’인가? 가습기 살균제 참사에서 피해자 범주의 구성>을 보면, “피해지원제도에서 1·2단계는 중증, 3·4단계는 경증을 의미한다는 대중적인 오해 때문에 3·4단계 피해자들은 이중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며 “피해자 집단 내부에서도 이해관계가 달라져 갈등·분열이 촉진됐다”고 나온다.
■9년째 나 몰라라 정부
유족들은 정부의 피해 입증 책임 ‘떠넘기기’에 여전히 괴로워했다. 이날 참석한 8명 중 4명은 2011년 8월 이전 부인을 잃었다.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공식화하기 전이다. 임종 전후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인지하지 못해 피해 입증을 할 증거물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이재인씨는 부인이 폐섬유화증으로 2009년 숨졌다. 이씨의 부인은 옥시 가습기 살균제를 썼다. 이씨는 “불교식으로 다 화장하고 예전 물건들은 다 태웠다. 2016년에야 뉴스를 보다가 가습기 살균제 때문인 사실을 알았는데, 인과관계 입증할 물건이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종건씨는 “정부가 한참 전 구입 기록 등을 입증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줘야 한다. 정부는 그래도 예전 기록을 갖고 있고, 행정력을 동원해 증거를 찾아줄 수 있지 않느냐. 정부는 여전히 빡빡한 기준을 들이밀면서 인과관계 입증만 피해자 측에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산부였던 이씨 부인은 2010년 급성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옥시제품 90%, 애경과 SK케미칼 제품을 10% 썼다고 했다.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 유족에게 정보 제공을 하지 않은 사례도 발견됐다. 이규동씨의 아내 고 장정숙씨는 간질성 폐질환으로 2012년 2월 숨졌다. 아내 장씨는 1990년대 후반부터 동산 C&G 가습기 메이트, 다이소의 PB상품 산도깨비, 옥시의 옥시싹싹을 10년 넘게 썼다. 이중 SK케미칼이 원료를 만든 동산 C&G 가습기 메이트는 확인된 피해자가 드물다. 아내 장씨는 2001년과 2003년 태아를 유산했다. 동산 C&G 가습기 메이트를 사용한 시기와 겹친다. 이규동씨는 “정부에서는 제품 샘플이 필요하다면서 원액을 수거해갔다. 2018년 8월쯤이다. 성분조사 마치면 답신을 주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에 참가한 유족 8명은 모두 “우울증을 경험했다”거나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 “죄책감처럼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했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의 투병이 길어지면 가족들의 간병 스트레스는 특히 커졌다. 온 가족이 간병을 하고 빚이 느는 사례도 많다.
지난 8월 10일, 가습기 살균제 사용 이후 폐 손상을 입은 박영숙씨(60)가 13년 투병 끝에 숨졌다. 박씨는 이마트 이플러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박씨의 남편 김태종씨는 2007년 서울 강서구 이마트 공항점에서 이플러스 가습기 살균제를 직접 구입했다. 2009년 5월까지 사용했다. SK케미칼이 제조하고 애경산업이 판매한 가습기 메이트의 PB(자체개발)상품이다. 김태종씨는 “굴지의 대기업이라면서 이마트 측은 단 한 차례 도의적이라도 연락 온 적이 없다”고 했다.
박씨는 2017년 4월 폐 상태가 악화됐다. 목을 절개한 뒤 인공호흡기를 연결했다. 이때부터 24시간 간병이 필요했다. 김태종씨는 “아내를 떠나보낸 허전함과 직접 가습기 살균제를 구입해 넣은 미안함이 마음을 떠나질 않는다. 지금 이 순간도 명치 끝이 답답해지면서 머리가 띵하다”고 했다. 그는 “동시에 간병 스트레스도 컸다. 자녀 두 명과 24시간 간병에 매달려야 했다. 우울감, 자살 충동도 자주 느꼈다. 기존에 하던 일을 접고 전국을 돌며 영업일을 하며 차 한 대로 84만㎞를 탔지만 빚도 늘었다”고 말했다.
■유족의 고통은 누가 책임지나
김태종씨처럼 발병 이후 생계에 어려움을 겪은 피해자 가족이 대부분이다. 중증 환자지만 피해인정을 받지 못한 가족일수록 경제적 고통은 커진다. 지난 2019년 3월 사참위가 발표한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가정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연구진은 조사대상인 피해가구 100가구의 피해비용을 최대 539억8000만원으로 추산했다.
교회 목사였던 송기진씨는 올해 2월 경기 남양주에서 탁구장을 열었다. 목사로 더 이상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던 탓이다. 개업과 함께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살림은 더 궁핍해졌다. 송기진씨의 부인 조성화씨는 지난해 1월 숨졌다. 2009년 급발성 폐섬유화를 발견한 뒤 11년 넘게 투병을 했다. 송기진씨는 “부인과 장모님이 2002년부터 옥시 가습기 살균제 제품을 2~3년간 썼다. 장모님은 2008년 폐섬유화 진단을 받고 이듬해 먼저 돌아가셨다”고 했다.
조병렬씨는 원래 중국을 오가며 자동화 기기 사업을 했다. 아내와 장모를 모두 가습기 살균제로 잃은 뒤 사업도 접었고 신용불량자가 됐다. 지금은 스물세 살 자녀가 아르바이트를 해 생활비를 보탠다. 조병렬씨의 장모는 2014년 2월 23일, 아내는 사흘 뒤인 26일 숨졌다. 병명은 폐섬유화였다. 애경 가습기 메이트를 거실에 틀어놓고 썼다고 했다.
죄책감이나 사회적 시선 때문에 이사를 가거나 자녀가 충격을 받을까봐 피해 사실을 미처 말 못한 유족들도 있었다. “주변에 참사 피해 가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나를 드러내고 사회생활을 하기가 어려워 고향을 떠나 이사했다”(이종건), “아이들에게 충격을 줄까봐 숨기다 중학교 진학 이후 조금씩 전해줬다”(최승영)는 이야기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