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참사 “가습기살균제 문제 해결하려면…‘국가 책임’ 인정하고 우릴 껴안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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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참사 “가습기살균제 문제 해결하려면…‘국가 책임’ 인정하고 우릴 껴안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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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문제 해결하려면…‘국가 책임’ 인정하고 우릴 껴안아야”


경향신문 2020년 8월 22일자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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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참사…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심경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지난 8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 시행령에 피해자 의견을 반영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지난 8일 오전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 시행령에 피해자 의견을 반영할 것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 당선 직후 공식 사과에도
최근까지 국회·청와대 변화는 없어
피해자들 “3년 전 약속 지키라” 촉구
 

“정부는 피해자들이 다 죽기만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3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것만 믿고 있었는데, 지금은 국민을 위한 나라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유족인 김미란씨는 사망한 아버지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에 울분을 토했다. 그는 “사람이 살해당했는데 피해라고 인정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말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환경부의 피해판정에서 가능성 거의 없음을 의미하는 4단계 판정을 받았고, 이들에 대해 조위금 등을 일부 지원하는 특별구제계정 대상으로 분류됐다. 

정부의 가습기살균제 피해 지원은 구제급여와 특별구제계정으로 나뉘는데 구제급여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일 가능성이 거의 확실한 1단계, 가능성이 높은 2단계 피해자들이 대상이다. 특별구제계정은 가능성 낮음과 가능성 거의 없음을 뜻하는 3, 4단계 피해자들이 주를 이룬다. 환경부는 지난 3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 개정으로 구제급여와 특별구제계정이 통합되면서 김씨의 아버지 등 특별구제계정 대상자도 피해자로 인정받은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정작 피해자들은 “정부는 말로만 인정할 뿐 여전히 우리를 외면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구제급여 대상자는 정부로부터 인과성을 인정받았다는 점 때문에 가해기업과의 민사소송에서 유리한 반면 인과성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의미의 구제계정에 포함된 경우 소송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낮다. 

김씨의 아버지는 2007년부터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산업에서 만든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하다 폐에 이상이 생겨 2015년 세상을 떠났다. 김씨는 “나도 반 통 정도를 사용했는데 자다가 숨이 안 쉬어져서 깨어보니 목과 코에 분비물이 가득 차 있었다”며 “그때 바로 가습기살균제 사용을 중단하고, 아버지께도 쓰지 마시라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씨의 아버지는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국가에서 검사하고 허가해준 제품에 문제가 있겠냐”며 2011년 정부가 가습기살균제 수거명령을 내리기까지 5년여 동안 계속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하다 사망했다. 김씨는 “결국 국가를 믿고, 기업을 믿은 것이 아버지의 ‘죄’였던 것”이라며 비통해했다. 

김씨의 아버지가 믿었던 정부는 국민 안전을 위해 독성물질이 들어 있는 제품을 제대로 걸러낼 검증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 기업들이 제품의 독성을 알면서도 숨기고 시중에 유통한 것을 방치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부는 게다가 김씨의 아버지처럼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과 아직까지 피해를 겪고 있는 이들 중 상당수를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당선 직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만나 사과했지만 정부의 태도는 이전 정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당시 문 대통령은 피해자와 가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면담하면서 공식 사과하고, 피해자 지원 확대와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약속한 바 있다. 추미애 당시 열린민주당 대표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을 만나 국가에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했지만, 이후 국회나 청와대의 태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최근 피해자들이 기자회견 등에서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에게 ‘3년 전 약속을 지키라’고 촉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사이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들 중에는 경제적 곤란에 처해 있는 이들이 많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피해 인정기준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탓에 삶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이들도 다수라고 지적한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폐이식 수술을 받은 후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는 안은주씨의 경우 고액의 수술비로 인해 가정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것은 물론 동생의 집까지 대출을 잡히는 상황이 됐다.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하기 전까지만 해도 국가대표 배구선수로서 남들보다 훨씬 건강했던 그는 현재 각종 의료기기의 도움이 아니면 생명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지경이다. 지난달 2일 안씨를 찾아갔지만 그는 신장이 안 좋아져 투석을 받는 중이었다. 가족들에 따르면 안씨는 컨디션이 좋을 때 스케치북에 글씨를 써 필담으로 가족들과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폐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사경을 헤맬 정도다. 폐가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태에 처한 이들은 폐이식 수술만이 유일한 희망인 경우가 많지만, 실제 이식 수술을 받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김응익씨가 지난 5월 서울 신촌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누워 있다(왼쪽 사진). 김씨는 지난 6월 폐이식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회복 중이다. 오른쪽은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피해자 안은주씨가 가족들과 필담을 나누면서 고통을 호소한 내용이 담긴 스케치북. 국가대표 배구선수였던 안씨는 폐이식 수술을 받은 후 상태가 안 좋아질 때마다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다. 김기범 기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김응익씨가 지난 5월 서울 신촌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누워 있다(왼쪽 사진). 김씨는 지난 6월 폐이식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회복 중이다. 오른쪽은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피해자 안은주씨가 가족들과 필담을 나누면서 고통을 호소한 내용이 담긴 스케치북. 국가대표 배구선수였던 안씨는 폐이식 수술을 받은 후 상태가 안 좋아질 때마다 입퇴원을 반복하고 있다. 김기범 기자

“피해 인정 못 받은 사람 많아 억울”
‘살균제 의도적 흡입’ 극단적 행동도
지속된 병원비로 경제난 겹쳐 ‘고통’
 

안씨와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던 피해자 김응익씨는 매우 운이 좋은 사례에 속한다. 그는 호흡곤란으로 응급실에 실려가 치료받은 후 폐이식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고, 퇴원 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할 처지였다. 다행히 갑작스럽게 적합한 폐가 확보되면서 수술을 받았고, 현재는 회복 중이다. 

지난달 2일 병실에서 만난 김씨는 “수술 전에는 산소발생기를 끼고 다녔고 숨쉬기가 힘들어 죽을 지경이었다”며 “감사한 마음으로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진상규명 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운데 폐이식 수술을 받은 이는 30명 정도이며 1년 넘게 폐 기증을 기다리는 대기자들도 있다. 폐이식을 받는다 해도 오랜 기간 폐가 정상 기능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피해자 가족 중에는 자신으로 인해 자녀나 부모 등이 고통받게 되었다고 자책하면서 극단적인 행동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대구에 사는 피해 청소년들의 어머니 이모씨는 “내 몸으로 피해를 증명하겠다”며 자신의 방 가습기에 가습기살균제를 넣어 의도적으로 흡입하고 있다. 이씨가 가족 몰래 이처럼 자해에 가까운 행동을 한 것이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등에 알려져 많은 이들이 이씨를 만류하고 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씨는 기자와 통화하면서 “나도 소심하고 겁 많고 평범한 엄마지만 우리 애들 같은 피해자가 무수히 많을 텐데 피해 인정조차 못 받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다. 

이씨의 첫째 아들은 2003년생, 고2로 간질성폐렴과 천식 등 다수의 호흡기질환을 앓고 있으나 정부 피해 판정에서 4단계를 받았다. 둘째 딸은 2006년생으로 천식, 만성부비동염 등 역시 다수의 호흡기질환을 앓고 있지만 3단계 판정을 받았다. 이씨는 “아이들 어렸을 때 건강을 위해 가습기를 쓰면서 깨끗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살균제를 사용했던 것이 아이들을 이 지경이 되게 만든 것 같아 가슴을 쥐어짜는 것같이 괴롭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낸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산업 제품을 사용했다. 

최근 큰아이는 심장비대증을 새로 앓게 되었고, 둘째는 간질이 나타나는 등 새로운 질환들까지 더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두 청소년이 각각 대여섯 가지 호흡기질환을 겪고 있음에도 피해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이씨는 “정부가 기업들과 싸울 작은 힘마저 빼앗고 길을 막고 있는 것 같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3·4단계 피해자들은 민사에서 이길 가능성이 거의 없다. 기자와 통화하는 내내 이씨는 울먹이며 기침을 했다. 현재 어린이·청소년 피해자는 약 1700명으로 집계되는데, 이들은 평생 호흡기질환을 앓으면서 살 수도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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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정부선 ‘폐질환’으로 한정
이후 인정 범위 확대…여전히 협소
신고 6823명 중 정부지원 절반 미만
 

핵심인 ‘피해 인정 질환 범위’ 빠진
‘구제법 시행령’ 일방 추진에 속상
 

2013년 처음 피해 판정이 시작될 때 정부는 피해 인정 질환을 폐질환으로 한정지었다. 이후 다수의 연구 결과가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다양한 질환이 나타날 수 있다는 걸 밝혀냈음에도 정부는 여전히 천식, 태아 피해, 독성간염, 아동 간질성 폐질환만을 피해 인정 질환 범위로 한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지난달 31일 현재 피해 신고를 한 6823명 중 구제급여로 정부 지원을 받는 이들은 930명에 불과하다. 특별구제 대상으로 일부 경제적 지원을 받는 이들은 2239명이며 3203명은 아직까지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처음 피해 판정이 이뤄진 2013년에는 피해 양상에 대한 과학적 연구가 부족했지만 현재는 가습기살균제로 인해 폐나 호흡기 질환뿐만 아니라 피부, 심혈관계 등 다양한 다른 질환이 발생할 수 있다는 다수의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하지만 정부의 피해 인정 범위는 여전히 협소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최근 환경부는 피해구제법 시행령 입법예고안을 발표했지만, 이 내용을 놓고도 논란이 일었다. 지난 5일 열린 피해구제법 공청회에서 피해자들은 지금껏 요구해온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피해구제법 시행령 입법예고 내용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물리적 충돌까지 빚어져 그날 공청회는 결국 무산됐다.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법안을 놓고 당사자들이 이처럼 강하게 반발한 이유는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는 건강피해 심사에 대한 내용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환경부는 지난달 24일 “(피해자의) 신속한 구제를 위해 노출 여부와 질환 진단 사실 등 요건 충족 여부만 검토하겠다”면서 “요건 심사 질환 및 기준은 환경부 장관이 고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언뜻 보면 피해자를 위해 신속하게 심사하겠다는 내용으로 보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피해 인정 질환의 범위는 밝히지 않은 것이다. 특조위 역시 입법예고 내용의 문제점 20가지를 지목하며 환경부가 이를 개선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진정 가습기살균제 문제 해결을 원한다면 국가가 책임이 있음을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전문가와 시민단체, 피해자들은 입을 모은다. 국가 책임 인정이 중요한 것은 피해자 지원 및 보상에 있어 현재보다 더 폭넓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국가 책임과 관련해 법원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며 피해자들의 고통을 방관하고 있다. 법률·행정 전문가들은 가습기살균제 관리 책임, 피해 발생 후 대처 등에서 법적인 미비점이 존재했고, 정부 부처들이 책임을 회피하거나 문제를 은폐하려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영희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는 “가습기살균제 문제는 명백히 국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사안이며 법적 책임을 인정해야만 국가가 더 강력하게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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