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석면특집1] 열도 뒤흔든 '구보타 쇼크'는 끝나지 않았다
최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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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4 11:46
열도 뒤흔든 '구보타 쇼크'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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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이 사건에다 쇼크라는 말을 썼다. 이 사건이 준 충격이 그만큼 컸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다름 아닌 일본 구보타 쇼크다. 구보타 쇼크는 10년 전 일본 석면 시멘트 수도관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던 대기업 구보타에서 노동자뿐만 아니라 공장 인근 주민에게도 석면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다.
쇼크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노동자들이 과거 10년간 그러니까 1996~2005년 51명의 석면 피해로 숨졌다는 사실도 한몫 했겠지만 그보다 석면 질환이 공해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과거 1950년대 이타이이타이병과 미나마타병과 같은 세계적 공해병의 진원지다. 그래서 일본인은 공해병이라는 말만 들어도 뇌리 속에 박혀 있던 공포 디엔에이(DNA)가 작동하는 나라다.
< 마이니치신문>이 구보타 석면 재난을 2005년 6월 29일 처음 알렸을 때, 일본 지식 사회는 물론 일본 정부, 정치계, 노동계, 시민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공해병이 시작되는 것인가라고 다들 생각했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침묵의 살인자' 또는 '조용한 시한폭탄'이라는 별명을 지닌 석면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 바뀌었다.
구보타 쇼크 10년을 맞아 6월 27일 구보타 사건이 터진 곳인 일본 효고 현 아마가사키의 중소기업센터에서 열린 이틀간의 행사에 한국 유일의 석면 추방 운동 NGO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반코)의 집행부 안종주, 최예용, 스즈키 아키라 등이 참가했다. 간사이 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은 점심도 거른 채 행사장에 도착하니 이미 자리는 피해자와 그 가족, 활동가 등 관계자들로 꽉 차 있었다.
구보타 공장 인근 10년 행사에 이탈리아, 벨기에, 한국 대표단 참가
10년 전 물 아래에 숨겨져 있었던 구보타 피해의 실상을 물위로 솟구치게 했던 주역들과 아직도 석면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동식 산소통을 지니고 인공호흡을 하면서 이날 역사적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멀리 이탈리아와 벨기에서 온 석면 피해자와 가족들도 앞자리를 차지한 채 발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가사키는 오사카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업 도시로 1970년대는 대기오염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인구 50만 명가량의 이 도시의 수장, 즉 시장은 10년 전 사건이 터져 나왔을 때도 여성이었으며 10년을 맞이한 지금도 사람은 바뀌었지만 공교롭게도 여성이었다.
이나무라 가즈미 시장은 단상에 올라가지 않고 청중들과 같은 눈높이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아직 석면 피해의 실태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아마가사키가 석면 추방 운동의 메카라고 강조하며 환경성과 아마가사키가 손잡고 국가 차원의 석면 피해 역학 조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구보타 쇼크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구보타 쇼크가 세상에 알려진 지 10년이 지났지만 구보타 쇼크는 물론 석면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이는 구보타 인근 주민 가운데 석면 질환에 걸린 피해자의 마지막 진술에서도, 유럽 최대의 석면 피해를 보이고 있는 이탈리아 카살레 몬페라토 에테르니트 공장 인근 주민 피해자의 증언에서도, 벨기에 카팔 에테르니트 공장 노동자 피해 가족의 증언에서도 너무나 생생하게 나타났다.
"의사는 저에게 한 달 시한부 인생 선고를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모임에서 말하는 것은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석면 때문에 저의 인생은 망가졌습니다. 2013년 9월 악성흉막중피종 진단을 받은 뒤 오른쪽 폐를 잘라내고 수술, 방사선 치료, 항암 치료 등을 모두 보태 18번을 받으며 생명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하루하루 상황이 급속히 악화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하고 보니 정말 억울한 마음 가득합니다."
구보타 공장에서 1.7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공식 구제 대상 거리인 1.5킬로미터 바깥에 거주해 아직 구보타 쪽의 구제를 받지 못한 스나가와 씨는 긴 투병 끝에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할 만큼 쉬었지만 젖 먹던 힘을 짜내 외쳤다. "환경오염을 근절합시다." 모두들 잠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구보타 쇼크는 일본 사회에서 석면 위험과 석면 공해 그리고 석면 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다. 노동자나 공장 인근 주민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터지면 나 몰라 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구보타는 즉각 이를 인정하고 주민 피해에 대해서도 노동자 피해 보상, 즉 산재 보상에 준하는 구제금을 주고 있다. 이는 어찌 보면 지극힌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로서는 매우 인상적이다.
구보타가 지난 10년간 구제금을 준 석면 피해 사망자는 모두 271명이다. 이 가운데 30대가 4명이며 20대도 두 명이나 된다. 현재 요양 중인 사람도 27명이나 된다. 연간 사망자 수는 2008명 24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최근 들어 약간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구보타 쇼크에 충격을 받은 일본 사회는 사건 발발 9개월 만인 2006년 3월 주민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해주기 위한 석면건강피해구제법을 제정해 시행에 들어갔다. 구제 인정을 받은 주민은 현재 1만 명가량 되며 산재 피해 노동자를 보태면 2만 명이 넘는다. 석면 노출로 인한 악성중피종 사망자만 해마다 1000명 넘게 나오고 있다.
구보타 쇼크 이후 일본 석면 금지, 피해구제법 제정
일본은 구보타 쇼크를 계기로 즉각 석면 제품 제조 및 사용 전면 금지 입법 작업에 들어가 2006년부터 사실상 전면 금지했다. 우리나라도 이에 자극을 받아 2009년부터 사실상 석면제품 제조, 사용을 사실상 전면 금지했다. 또 2011년 석면피해구제법을 제정해 일본과 매우 유사하게 주민 피해에 대해 구제를 벌이고 있는데 현재 인정자가 1500명을 넘어섰다.
구보타 쇼크는 일본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석면 방직 공장 등 다양한 형태의 석면 공장 주변에서 터질 날만 기다리던 석면 시한폭탄의 뇌관을 건드렸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오사카 부 센난, 한난의 소규모 석면 방직 공장 밀집 지대에서 일어난 석면 피해였다. 이들 피해자 가운데 상당수가 재일동포들이다. 이들은 8년여에 걸친 재판 끝에 마침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받는 쾌거를 올렸다. 구보타 쇼크와 더불어 일본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준 또 하나의 석면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구보타 쇼크 10년을 계기로 일본 언론은 일제히 일본에서 석면 문제는 끝나지 않았으며 새로운 문제들이 눈앞에 놓여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실태를 생생하게 전하며 해결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구보타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한 <마이니치신문>은 물론이고 <아사히신문> 등은 일제히 구보타 쇼크 10년을 재조명하는 특집 기사와 연재 기사를 경쟁하듯이 1면 등에 내놓았다. 석면 건축물 해체 현장의 부실한 관리, 감독 문제와 석면 건물 해체가 2030년이 되면 최고조에 이를 것이란 전망과 함께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 새로운 석면 재앙이 벌어질 것임을 경고하고 나섰다.
일본 신문들이 지적한 문제는 지금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석면 문제이기도 하다. 구보타 쇼크, 그 후 일본이 걸어온 10년의 세월, 그리고 앞으로 일본이 극복해야 할 석면 현안은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기에 이렇게 연재 글을 쓰는 것이다.
이 2015년 6월 28일자 1면에서 석면 건물 해체에 따른 석면 비산 위험을 다루었다. ⓒ에이반 " class="sm-image-c" alt="" src="http://www.pressian.com/data/photos/20150730/art_1437526647.jpg" xtype="photo" />
프레시안 석면특집1; 2015 7 22
글,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안종주 자문위원
[구보타 쇼크 10년, 한일 석면 문제 대해부 ①]
광복 70년이 되는 올해는 일본에서 석면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 '구보타 쇼크'가 발생한 지 10년이 되는 해이다. 구보타 쇼크는 일본의 문제로 국한하기보다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영향을 끼쳤으며 이를 계기로 석면 추방 국제 연대가 더욱 굳건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국제적 사건으로 평가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 이 사건 이후 일본 석면 방직 공장 노동자들의 피해가 속속 드러났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오사카 지역의 센난과 한난이다. 강제 징용 등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동포들과 2세들이 이곳에서 석면 방직 공장을 운영하거나 노동자로 일하다 대거 석면 재앙의 희생자가 됐다.
< 프레시안>은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안종주, 최예용 등의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8차례에 걸쳐 한 달간 '구보타 쇼크 10년, 한일 석면 문제 대해부'를 연재한다.
석면에 신음하는 세계 곳곳의 피해 실태, 한 맺히고 피눈물 나는 재일 동포들의 석면 피해 실상과 법정 투쟁, 일본에서 한국으로 기계와 기술이 넘어와 한국 최대의 노동자 석면 피해를 입은 제일화학 노동자 이야기, 일제 때 석면 광산이 개발돼 충청남도 홍성 등 많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민들의 석면 비극, 그리고 한국의 석면 문제 등이 다뤄진다.
또 이 사건 이후 일본 석면 방직 공장 노동자들의 피해가 속속 드러났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오사카 지역의 센난과 한난이다. 강제 징용 등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동포들과 2세들이 이곳에서 석면 방직 공장을 운영하거나 노동자로 일하다 대거 석면 재앙의 희생자가 됐다.
< 프레시안>은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 안종주, 최예용 등의 현지 취재를 바탕으로 8차례에 걸쳐 한 달간 '구보타 쇼크 10년, 한일 석면 문제 대해부'를 연재한다.
석면에 신음하는 세계 곳곳의 피해 실태, 한 맺히고 피눈물 나는 재일 동포들의 석면 피해 실상과 법정 투쟁, 일본에서 한국으로 기계와 기술이 넘어와 한국 최대의 노동자 석면 피해를 입은 제일화학 노동자 이야기, 일제 때 석면 광산이 개발돼 충청남도 홍성 등 많은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민들의 석면 비극, 그리고 한국의 석면 문제 등이 다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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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 스스로 이 사건에다 쇼크라는 말을 썼다. 이 사건이 준 충격이 그만큼 컸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이 사건은 다름 아닌 일본 구보타 쇼크다. 구보타 쇼크는 10년 전 일본 석면 시멘트 수도관을 대량으로 만들어내던 대기업 구보타에서 노동자뿐만 아니라 공장 인근 주민에게도 석면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다.
쇼크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노동자들이 과거 10년간 그러니까 1996~2005년 51명의 석면 피해로 숨졌다는 사실도 한몫 했겠지만 그보다 석면 질환이 공해병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과거 1950년대 이타이이타이병과 미나마타병과 같은 세계적 공해병의 진원지다. 그래서 일본인은 공해병이라는 말만 들어도 뇌리 속에 박혀 있던 공포 디엔에이(DNA)가 작동하는 나라다.
< 마이니치신문>이 구보타 석면 재난을 2005년 6월 29일 처음 알렸을 때, 일본 지식 사회는 물론 일본 정부, 정치계, 노동계, 시민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공해병이 시작되는 것인가라고 다들 생각했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침묵의 살인자' 또는 '조용한 시한폭탄'이라는 별명을 지닌 석면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 바뀌었다.
구보타 쇼크 10년을 맞아 6월 27일 구보타 사건이 터진 곳인 일본 효고 현 아마가사키의 중소기업센터에서 열린 이틀간의 행사에 한국 유일의 석면 추방 운동 NGO 한국석면추방네트워크(반코)의 집행부 안종주, 최예용, 스즈키 아키라 등이 참가했다. 간사이 공항에 내린 우리 일행은 점심도 거른 채 행사장에 도착하니 이미 자리는 피해자와 그 가족, 활동가 등 관계자들로 꽉 차 있었다.
구보타 공장 인근 10년 행사에 이탈리아, 벨기에, 한국 대표단 참가
10년 전 물 아래에 숨겨져 있었던 구보타 피해의 실상을 물위로 솟구치게 했던 주역들과 아직도 석면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동식 산소통을 지니고 인공호흡을 하면서 이날 역사적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멀리 이탈리아와 벨기에서 온 석면 피해자와 가족들도 앞자리를 차지한 채 발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가사키는 오사카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공업 도시로 1970년대는 대기오염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인구 50만 명가량의 이 도시의 수장, 즉 시장은 10년 전 사건이 터져 나왔을 때도 여성이었으며 10년을 맞이한 지금도 사람은 바뀌었지만 공교롭게도 여성이었다.
이나무라 가즈미 시장은 단상에 올라가지 않고 청중들과 같은 눈높이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아직 석면 피해의 실태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는 아마가사키가 석면 추방 운동의 메카라고 강조하며 환경성과 아마가사키가 손잡고 국가 차원의 석면 피해 역학 조사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구보타 쇼크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
구보타 쇼크가 세상에 알려진 지 10년이 지났지만 구보타 쇼크는 물론 석면 피해자와 가족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이는 구보타 인근 주민 가운데 석면 질환에 걸린 피해자의 마지막 진술에서도, 유럽 최대의 석면 피해를 보이고 있는 이탈리아 카살레 몬페라토 에테르니트 공장 인근 주민 피해자의 증언에서도, 벨기에 카팔 에테르니트 공장 노동자 피해 가족의 증언에서도 너무나 생생하게 나타났다.
"의사는 저에게 한 달 시한부 인생 선고를 내렸습니다. 이와 같은 모임에서 말하는 것은 아마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석면 때문에 저의 인생은 망가졌습니다. 2013년 9월 악성흉막중피종 진단을 받은 뒤 오른쪽 폐를 잘라내고 수술, 방사선 치료, 항암 치료 등을 모두 보태 18번을 받으며 생명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하루하루 상황이 급속히 악화하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하고 보니 정말 억울한 마음 가득합니다."
구보타 공장에서 1.7킬로미터 떨어져 있어 공식 구제 대상 거리인 1.5킬로미터 바깥에 거주해 아직 구보타 쪽의 구제를 받지 못한 스나가와 씨는 긴 투병 끝에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할 만큼 쉬었지만 젖 먹던 힘을 짜내 외쳤다. "환경오염을 근절합시다." 모두들 잠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구보타 쇼크는 일본 사회에서 석면 위험과 석면 공해 그리고 석면 피해자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다. 노동자나 공장 인근 주민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터지면 나 몰라 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구보타는 즉각 이를 인정하고 주민 피해에 대해서도 노동자 피해 보상, 즉 산재 보상에 준하는 구제금을 주고 있다. 이는 어찌 보면 지극힌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렇지 못한 우리로서는 매우 인상적이다.
구보타가 지난 10년간 구제금을 준 석면 피해 사망자는 모두 271명이다. 이 가운데 30대가 4명이며 20대도 두 명이나 된다. 현재 요양 중인 사람도 27명이나 된다. 연간 사망자 수는 2008명 24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최근 들어 약간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구보타 쇼크에 충격을 받은 일본 사회는 사건 발발 9개월 만인 2006년 3월 주민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해주기 위한 석면건강피해구제법을 제정해 시행에 들어갔다. 구제 인정을 받은 주민은 현재 1만 명가량 되며 산재 피해 노동자를 보태면 2만 명이 넘는다. 석면 노출로 인한 악성중피종 사망자만 해마다 1000명 넘게 나오고 있다.
구보타 쇼크 이후 일본 석면 금지, 피해구제법 제정
일본은 구보타 쇼크를 계기로 즉각 석면 제품 제조 및 사용 전면 금지 입법 작업에 들어가 2006년부터 사실상 전면 금지했다. 우리나라도 이에 자극을 받아 2009년부터 사실상 석면제품 제조, 사용을 사실상 전면 금지했다. 또 2011년 석면피해구제법을 제정해 일본과 매우 유사하게 주민 피해에 대해 구제를 벌이고 있는데 현재 인정자가 1500명을 넘어섰다.
구보타 쇼크는 일본 곳곳에 흩어져 있던 석면 방직 공장 등 다양한 형태의 석면 공장 주변에서 터질 날만 기다리던 석면 시한폭탄의 뇌관을 건드렸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오사카 부 센난, 한난의 소규모 석면 방직 공장 밀집 지대에서 일어난 석면 피해였다. 이들 피해자 가운데 상당수가 재일동포들이다. 이들은 8년여에 걸친 재판 끝에 마침내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받는 쾌거를 올렸다. 구보타 쇼크와 더불어 일본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준 또 하나의 석면 사건으로 자리매김했다.
구보타 쇼크 10년을 계기로 일본 언론은 일제히 일본에서 석면 문제는 끝나지 않았으며 새로운 문제들이 눈앞에 놓여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 실태를 생생하게 전하며 해결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구보타 사건을 가장 먼저 보도한 <마이니치신문>은 물론이고 <아사히신문> 등은 일제히 구보타 쇼크 10년을 재조명하는 특집 기사와 연재 기사를 경쟁하듯이 1면 등에 내놓았다. 석면 건축물 해체 현장의 부실한 관리, 감독 문제와 석면 건물 해체가 2030년이 되면 최고조에 이를 것이란 전망과 함께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할 경우 새로운 석면 재앙이 벌어질 것임을 경고하고 나섰다.
일본 신문들이 지적한 문제는 지금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석면 문제이기도 하다. 구보타 쇼크, 그 후 일본이 걸어온 10년의 세월, 그리고 앞으로 일본이 극복해야 할 석면 현안은 결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문제이기에 이렇게 연재 글을 쓰는 것이다.
이 2015년 6월 28일자 1면에서 석면 건물 해체에 따른 석면 비산 위험을 다루었다. ⓒ에이반 " class="sm-image-c" alt="" src="http://www.pressian.com/data/photos/20150730/art_1437526647.jpg" xtype="phot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