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가습기 살균제 피해’…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기획] ‘가습기 살균제 피해’…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민수미 기자 수정: 2015.06.08 09:43
“4년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쏟아지는 정보와 정신없이 돌아가는 하루로 인해 어제의 뉴스가 무엇이었는지 조차 기억하기 힘들어진다. 그러나 이런 사회 한곳에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부와 대중의 관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다. 대한민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이 사건은 지난 2011년 산모들이 원인 미상의 중증 폐 질환으로 잇따라 사망하면서 불거지기 시작했다. 환경부에 신고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는 총 530명이며 사망자는 142명에 달한다. 전대미문의 이 사건에 불특정 다수의 무고한 피해자가 양산됐지만, 정부의 대책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환경부는 2014년 4월 가습기 살균제 피해 정도를 1단계에서 5단계로 분류했다. 1단계 ‘가능성 확실’, 2단계 ‘가능성 높음’, 3단계 ‘가능성 낮음’, 4단계 ‘가능성 거의 없음’, 5단계 ‘판정 불가’가 그것이다. 이는 의학, 환경보건, 독성학 등 각 분야 전문가와 시민단체가 참여해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 손상 의심환자들을 조사한 결과이며 피해자들이 제출한 의료기록을 2011년을 전후해 아산병원에서 급성 폐 질환으로 사망 또는 사망에 준하는 위중한 사례들의 환례와 대조 판결한 것이다. 이 중 1·2등급의 221명만이 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의료비는 처방조제비, 호흡보조기, 선택진료비, 상급병실 차액에 대해 지급하며 장례비는 238만원 지급된다.
3·4등급을 받은 나머지 300여명의 피해자 이들에게는 5년간 건강모니터링이 지원될 뿐이다.
이후 지난 4월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의 1차 조사 때 신청하지 못한 169명과 1차 판정결과에 이의를 제기한 60여명 등 총 229명에 대한 피해자 2차 조사가 결과가 발표됐다. 이 중 1차 조사에서 가능성 낮음 단계로 판정된 4명만이 1단계에 해당하는 ‘가능성 확실’ 2단계의 ‘가능성 높음’으로 상향 판정을 받았다.
“같은 피해자인데 왜 차별받아야 하나요?”
문제는 3·4등급에 해당하는 피해자들 가운데 중증환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중증이 아니더라도 많은 피해자가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의료비는 오롯이 피해자 본인과 이들의 가족들이 부담해야 한다.
경남 밀양에 사는 안은주씨는 3등급 ‘가능성 낮음’ 판정을 받은 피해자다. 그는 여자 청소년국가대표 배구선수 출신이며 여자 배구 국가대표 후보이기도 했다. 남다른 체력과 폐활량을 자랑했던 안씨는 현재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숨을 쉬고 있다. 최근 병원에 입원, 폐이식 수술을 고려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됐지만 안씨는 3등급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정부로부터 그 어떤 지원도 받지 못했다. 지금까지 지출한 병원비만 1억원은 거뜬히 넘어가며 앞으로 운이 좋으면 받게 될 폐이식 수술비도 얼마가 들어갈지 장담할 수 없다. 지방에 사는 그가 서울에 올라와 수술을 받고 수술 전 여러 검진을 받기 위해 들어갈 부대비용도 생각해야만 한다.
2010년 온종일 체육관에서 먼지를 마시며 배구 교습을 하던 안씨가 칼칼했던 목을 풀기 위해 할 수 있었던 건 집에 돌아와 가습기를 틀어놓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사용했던 옥시싹싹 가습기 살균제가 그의 삶에 이토록 큰 불행을 안겨올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때 아이들 방에는 가습기를 틀어놓지 않았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안도를 한숨을 내쉬던 안씨는 “차라리 가습기 때문에 병이 든 게 아니라고 하면 체념이라도 하겠지만 분명한 원인이 있음에도 지원에 있어 차별을 받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어 “3등급에 해당하지만, 정부에서 말한 모니터링은커녕 전화 한 통 받은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남편과 아내, 아이 둘까지 네 가족 모두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가 된 가정도 있다. 피해 분류 등급 4단계에 해당하는 이최섭씨는 “첫째 아이는 1등급, 둘째 아이는 3등급, 아내는 4등급에 들어갔다”며 “같은 공간에서 똑같이 노출됐음에도 이처럼 분류가 된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이어 “가습기를 사용한 이후로 심장이 많이 안 좋아졌다. 하지만 분류단계 판정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폐 손상에 국한되어 있다. 가습기 살균제 성분이 앞으로 몸에서 어떻게 또 어떤 증상으로 표출될지 모르니까 날마다 불안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이씨는 최근 있었던 피해자 2차 조사에 재심을 신청했지만 1차 조사와 마찬가지로 4등급 판정을 받았다. 가습기 살균제를 쓴 이후 한 달에 한 번꼴로 병원을 찾아가고 의사로부터 “항생제를 너무 많이 써서 이젠 처방도 하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말이다. 이씨는 “2차 조사에서 따로 시행되는 검사도 없었다. 1차 조사 때 제출했던 자료로 다시 판정한 것이다. 왜 다시 4등급에 분류됐는지 이유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환경부의 피해 판정 분류 실효성에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다.
“의료비 지원 못 받으시는 분들 생각하면 죄책감마저 들어요”
물론 의료비 지원이 된다는 점에서 1·2단계 피해자들이 경제적 압박에 있어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고충 또한 적지 않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신지숙씨는 현재 폐 이식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은 상태다. 산소호흡기 도움 없인 호흡할 수 없다. 신씨는 “피해자들을 몇 단계, 몇 등급으로 나눠놓았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는다”며 “나를 스스로 1등급이라 말하는 게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무슨 등급 매긴 소가 된 기분”이라며 말을 줄였다.
1·2단계 피해자들도 병원비만 지원될 뿐 사후 조치는 전혀 뒷받침되고 있지 않다. 5살 난 딸을 키우고 있는 신씨의 경우 2년 전 장애인으로 등록, 이로 인해 나오는 장애인 활동 도우미의 도움으로 간신히 육아를 감당해내고 있다. 이마저도 신씨 본인이 백방으로 방법을 알아보고 수차례 전화기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려 이뤄낸 성과다.
신씨는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발병 후 장애인 활동 도우미 지원을 받지 못했던 지난 몇 년을 돌이켜 “전쟁 같았다”라고 묘사했다. 가누기도 힘든 몸으로 육아와 가사를 병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외벌이를 하는 남편에게 느끼는 미안함은 이루 표현할 수 없다.
신씨는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면 내내 혼자 있어야 한다. 간병인비는 지원되지 않고 따로 간병인을 구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라며 “병원비뿐 아니라 아프지 않았으면 들지 않았을 모든 것에 대한 지원은 없다. 그러나 정부나 기업에 이를 논하기엔 송구스러운 마음이 든다. 힘든 분들이 많음에도 병원비도 받지 못하는3·4 단계 피해자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병원비를 받을 때마다 죄책감이 든다”고 전했다.
의료비 지원이라고 모든 의료비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이나 피해자 가족, 유가족 모두 정신적 트라우마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전무하다.
신씨는 “의사 선생님께서 먼저 정신과 상담을 권했지만, 정부에서 정신과 의료비 지원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며 “결국 남편과 같이 사비를 들여 상담을 받았고 둘 다 우울감이 심각한 수준으로 높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1·2 단계 피해자들이 받는 의료비 지원이 반쪽에 불과하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 정부지원 실무를 맡은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관계자는 피해자 분류 단계에 대해 “연구기관에서 연구했고 종합판정을 기술원에서 정리, 환경보건위원회에서 최종심의를 해서 환자 단계가 확정됐다”며 “이를 나눈 정확한 근거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설명해 줄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정신과 진료비의 경우 “현재까지는 폐 손상과 관련된 분야에 대해서만 지원이 가능하다”며 “기타 질환은 가습기 살균제와의 연관성에 대한 추가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민수미 기자 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