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가습기살균제 집단사망사건과 정부의 책임
2012년9월13일자 경향신문 사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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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원인으로 수십명이 집단사망했다면 이는 ‘국가적으로’ 매우 심각하고 중대한 사안이다. 그것이 국민의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앞서는 국가의 존재 이유이다. 영·유아와 산모 등 52명의 목숨을 앗아간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의 이러한 역할에 진지한 질문을 던지게 한다.
엊그제 검찰이 가습기 살균제 사건 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지난달 말 시민단체가 가습기 살균제 업체들을 과실치사 혐의로 고발한 데 따른 것이다. 검찰은 공정거래위원회도 표시광고법 위반 혐의로 이들 업체를 고발해온 만큼 두 사건을 병합 수사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정부는 가습기 살균제가 심각한 피해의 원인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피해자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 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피해 보상은 피해자와 제조사 간의 법적 소송을 통해 해결하라며 공을 검찰로 넘긴 셈이다. 다행히 검찰이 “형사처벌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할 것”이라며 적극적인 수사 의지를 표명했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피해자 모임이 확인한 가습기 살균제 피해 규모는 174건에 이른다. 안타까운 것은 피해가 20·30대 가정에 몰려 있고, 막대한 치료비 때문에 고통을 겪으며, 이로 인해 가정이 파탄지경에 처했다는 점이다. 일부 피해자가 제조사에 대해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등 자구책을 쓰지만 이마저도 어려운 형편이다. 3000~5000원 하는 일회용품을 현금으로 사서 쓰고 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라 증거는 사라지고 피해만 고스란히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은 정부가 나서서 가해기업의 사과와 피해기금 마련 등의 대책을 마련하기를 요구하는 광화문 1인시위를 지난 5월부터 어제까지 80회째 벌이고 있는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화학물질 제품의 안전관리 실패가 가져온 끔찍한 사례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도 놀랍지만 더 큰 문제는 책임 소재조차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화학물질 관련 업무가 복지부·환경부·지경부·노동부 등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어서다. 유사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해 화학물질안전청과 같은 총괄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환경 건강 피해의 특수성을 고려해 기본적인 인과관계가 확인될 경우 선 보상 후 구상권 청구를 원칙으로 하는 환경피해보상제도도 검토할 만하다. 수많은 정부 부처가 관리하는 화학물질에 의한 집단사망 사건을 어떻게 제조사와 소비자의 문제로만 제쳐둘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