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연기'가 마을 덮쳐도 비상벨은 울리지 않았다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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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1 09:50
최소 12명 숨진 엘지화학 인도공장 가스 누출 사건 현지 보고서 분석
지난 5월7일 새벽 3시, 인도 동부 안드라프라데시주의 해안 도시 비샤카파트남에 있는 화학물질 탱크에서 하얀 연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연기 누출은 수십분간 이어졌고, 더 짙게 더 멀리 퍼져갔다. 급기야 공장 근처 마을은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연기가 깔렸다.
마을은 곧 지옥으로 변했다. 잠자던 주민 12명이 끝내 깨어나지 못했고, 수백명이 병원에 실려갔다. 병원에 실려간 주민 중에도 3명의 추가 사망자가 나와, 인도 정부가 스티렌 가스 노출과의 관련성을 조사하고 있다. 소와 돼지, 개 등 가축도 목숨을 잃었다. 삶의 터전이었던 공장이 하룻밤 새 사람들을 공격하는 화학무기로 변했다. 사고가 난 공장은 연간 매출 28조원의 세계적인 한국 회사 엘지(LG)화학이 인도에서 직접 운영하는 ‘엘지폴리머스 인디아’(이하 엘지폴리머스)였다.
사고 이후 인도 당국은 화학 전문가, 경찰, 정부 관료 등 전문가 9명으로 조사위원회를 꾸렸다. 조사위는 두달 가까운 조사 끝에 지난 6일 부록 포함 4천여쪽에 이르는 ‘사고 조사 보고서’를 펴냈다. 사고 당시 상황과 인명·물적 피해, 사고 원인, 제안 등이 두루 담겼다. <한겨레>가 국내 언론 가운데 처음으로 보고서를 심층 보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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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 최대 5㎞까지…막대한 인명 피해
엘지폴리머스에서는 일회용 커피 뚜껑 등을 만드는 데 쓰이는 폴리스티렌(PS) 등을 하루 500여톤 생산한다. 코로나19 봉쇄령으로 지난 3월 문을 닫았다가, 봉쇄 해제를 앞둔 5월초 공장을 다시 여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주민들이 마신 하얀 연기는 폴리스티렌을 만드는 원료(스티렌)가 높은 열을 받아 연기로 변해 새어 나온 것이었다. 조사위는 사고 당일 스티렌 818톤이 기화해 누출된 것으로 본다. 플라스틱 재료 800톤 이상이 연기로 변했고, 주민들이 이를 흡입했다.
사고 당시 상황은 어땠을까? 당시 상황을 모델링(ALOHA) 기법을 통해 조사한 결과, 사고 탱크에서 200m 떨어진 지점은 스티렌 농도가 최대 1만3700ppm, 최소 1030ppm으로 조사됐다. 600m 떨어진 지점은 최대 1590ppm, 최소 126ppm으로 추산됐다. 생명을 위협하는 급성 건강영향을 일으킬 수 있는 스티렌 농도 700ppm보다 최대 20배가량 높았다.
엘지화학 인도 공장의 스티렌 발암물질 누출 사고로 희생된 지역주민 15명 명단.(이 중 3명은 사망 원인 조사 중)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가스 농도가 짙어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레드존’은 사고 지점에서 최대 715m(최소 192m)로 추정됐다. 회복하기 어려운 건강상 피해를 받는 ‘오렌지존’은 최대 2100m(최소 588m), 불편함과 통증을 느끼는 옐로존은 최대 5640m(최소 1800m)로 추산됐다. 탱크에서 700여m 안에 있을 경우 숨질 가능성이 있고, 2㎞까지는 회복하기 힘든 건강상 피해를 입고, 5~6㎞ 떨어진 곳은 불쾌한 냄새를 맡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사고 당일 최소 12명에서 최대 15명이 숨졌다. 병원에 실려간 주민은 585명이나 됐고, 공장에서 반경 5㎞ 안에 있는 1만7천가구 주민 2만여명이 긴급 대피했다. 대피한 주민들은 스티렌 농도가 낮아진 10일에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동식물과 토양 오염도 심각하다. 사고 당일 소·돼지 등 가축 34마리가 폐사했다. 반경 5㎞ 이내 농작물은 오염이 의심돼, 인도 당국은 먹거나 팔지 말라고 권고했다. 오염 지역 내 9곳의 시료 분석 결과, 탱크 맞은편 땅의 스티렌 농도는 5950㎎/㎏이었고, 인근 마을 심토에서는 1215㎎/㎏으로 조사됐다. 농작지에서의 안전기준은 0.01㎎/㎏, 공업지역은 5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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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지, 비용 절감 힘쓰느라 유능한 인재 안 뽑아”
조사위 지적 중 눈에 띄는 대목은 예상치 못한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기술 인력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조사위는 엘지로부터 제출받은 명단을 분석해, 공장에 근무하는 인도인 엔지니어 22명 중 10년 이상 경력자가 한명도 없었다고 밝혔다. 17명은 경력이 거의 없는 연습생 수준이었고, 나머지 5명 중 가장 경력이 긴 이는 9년2개월차였다. 다른 4명은 3~7년의 경력이 있었다. 조사위는 “(이 정도 인력으로) 공장을 돌릴 수는 있지만 비상사태에 적절히 대응하긴 어렵다”며 “엘지폴리머스는 비용 절감에 힘쓰느라, 자격과 기술을 갖춘 인재를 채용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또 공장에 화학 석·박사 학위를 가진 직원이 거의 없고, 학사 학위 소지자들이 선임 엔지니어로서 주요 업무를 했다고 지적하면서, 이에 대해 “놀랐다”고 평가했다. 한 국내 화학회사 팀장은 “경력 10년 정도면 과장급인데, 그 이하 경력자들이 배치됐다면 베테랑들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그는 “엔지니어는 화학공장의 꽃이다. 이들의 능력에 따라 공장의 효율과 생산량이 결정되고, 사고 때 비상 대처 등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엘지화학은 이런 지적에 대해 “지속해서 인원을 늘려왔고 10년 이상 엔지니어도 상당수 있다”며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해 법적으로 소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7일 인도 엘지폴리머스 가스 누출로 주민이 키우는 소가 쓰러졌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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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투성이 공장, 결국 사고로 이어져
엘지폴리머스 공장은 주요 인력 부족 이외에도 사고가 일어날 만한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만든 지 50년 된 탱크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고, 내부 상태도 불량했다. 탱크 내부의 온도가 올라갈 때 이를 완화하는 억제제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직원 안전 교육도 미흡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 발생에 대비해 사이렌이 5개 있고, 이를 울릴 수 있는 수동 스위치가 36곳에 있었지만, 사고 당일 누구도 스위치를 누르지 않았다. 조사위는 비상 스위치를 사고 초반에 눌러 잠자는 주민들을 깨웠더라면 피해가 훨씬 줄었을 거라고 평가했다. 또 조사위는 화재나 폭발에 대비한 비상 계획은 있었지만, 가스 누출 시 비상 계획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결국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공장의 낡은 탱크에서 이상 반응이 일어나 탱크 내부 온도가 섭씨 153.7도까지 치솟았지만 억제되지 않았고, 유독성 가스가 누출되고 있음에도 비상벨은 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사고 보름 전인 4월25일 탱크 안 농도 상승 현상이 나타났으나, 회사는 이를 무시했다.
인도 정부가 지난 6일 공개한 사고 조사 보고서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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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지화학, 인도 사고 4시간 뒤 14년 만의 비전 선포
엘지폴리머스 인도 공장은 엘지화학이 1997년 인도 힌두스탄폴리머스를 인수해, 엘지화학 인도 법인의 100% 자회사로 설립했다. 한해 매출 2200억원 정도로, 엘지화학 전체 매출(28조원)의 1%가 채 되지 않는다. 엘지화학은 중국·인도 등 전세계 곳곳에 법인 40여곳이 있다.
공교롭게도 사고가 난 5월7일은 엘지화학이 14년 만에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과학을 인류의 삶에 연결합니다’라는 문구의 새 비전을 발표한 날이었다. 사고를 알고도 새 비전을 발표했다면 적절하지 않은 처사이고, 사고를 몰랐다면 그만큼 관리가 소홀했다는 뜻이다. 인도 사고 발생 시점인 새벽 3시께는 한국 시간으로 아침 6시 반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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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를 찾기 힘든 최악의 스티렌 사고
보고서는 1994년부터 2005년까지 전세계에서 발생한 스티렌 관련 사고 12건을 분석했다. 대만(4건), 미국(6건), 일본(1건), 중국(1건) 등이다. 대부분 탱크 폭발로 인한 사고였다. 조사위는 “엘지폴리머스의 스티렌 증기가 방출된 것은 독특하고 배타적인 사고”라고 밝혔다. 사상자 수도 상대적으로 많다. 기존 스티렌 사고 12건 가운데, 인명 피해가 가장 컸던 2004년 중국 장쑤성 사고 때도 사망자는 6명이었다.
이번 사고로 현지 법인장과 기술고문 등 한국인 2명이 과실치사, 독성물질 관리 소홀 등 혐의로 지난 8일 인도 경찰에 구속됐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환경운동연합 등 국내 시민단체는 “한국 본사가 100% 투자하고 이익을 가져가는 구조 속에서 사고가 발생했다”며 “한국 본사가 민형사상 책임을 분명히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엘지화학은 “신속하고 책임있는 사태 해결을 위해 종합 대책을 만들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최현준 기자 hao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