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일보] ‘안방의 세월호’…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절규
‘안방의 세월호’…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절규
광주·전남 피해 신고자만 364명
온가족이 신체·정신·경제적 피해
피해 인지 못하고 죽어가는 이들도
“가해 기업, 책임 다해 신뢰 회복해야”
가습기 살균제 피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난 지 12년째를 맞았지만 광주·전남을 비롯한 전국의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8일 오후 광주환경운동연합 1층 회의실에서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로 인한 광주·전남 피해자 모임이 열렸다.
가습기 살균제 사태는 지난 2011년 임산부와 영유아, 기저질환자 등을 비롯한 전국의 가습기 살균제 사용자들이 호흡기 질환을 호소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환경부가 가습기 살균제에 함유된 CMIT(클로로메칠이소치아졸리논)와 MIT(메칠이소치아졸리논) 성분의 인체 유해성을 인정했으나, 2021년 1심 재판부는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며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해 내년 1월 11일 2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전국 피해자 대표인 A씨는 3년 전 떠나보낸 집사람을 생각하며 울분을 토했다.
부인과 함께 학원을 운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렸던 그는 가습기 살균제를 사들고 귀가한 그날의 선택이 두고두고 후회스럽다고 한다.
만12년에 이르는 투병생활 중 아내는 중환자실만 16번을 드나들며 묵묵히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A씨는 “아내와 같은 중증 환자들은 생명을 담보로 외출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힘들며, 당사자뿐 아니라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의 고통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어머니를 병간호 하느라, 오랜 투병생활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 탓에 목표로 한 학업에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자식들과 아내에게 못내 미안함으로 남아있다”고 자책했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폐 이식수술을 받은 지 6년째가 된 B씨는 두터운 마스크를 착용한 채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그는 당시 서울의 여러 유명 병원을 찾았지만 원인 불명의 폐렴이라는 진단밖에는 받을 수 없었다.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임은 꿈에도 모른 채 수술대에 올랐으며, 이후 정부의 역학조사 발표를 통해 자신이 가습기 살균제의 피해자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피해구제법을 통해 피해 사실은 인정 받았지만, 옥시로부터의 배보상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B씨는 “피해를 입은 뒤부터는 살균제 등 화학제품을 살 때면 성분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며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는 시중에 나온 제품들이 못 미더워 손소독제를 직접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에 따르면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정부의 역학조사가 있기 전까지 전국에서 판매된 가습기 살균제는 약 1천만 병으로, 국민 5명 중 1명이 사용한 꼴이다.
현재 피해 신고자 7천859명 가운데 5천41명은 그나마 피해를 인정을 받았으나, 나머지 2천818명은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할 상황에 처해 있다.
센터는 피해 규모를 피해자 94만여 명, 사망자 2만여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지만, 피해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신고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가 아직까지 상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광주·전남 지역 피해 신고자는 364명이며, 28%에 해당하는 101명은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2017년부터 시행된 피해구제법에 의해 신고자 상당수가 기본적인 구제금을 지급 받았지만 폐암, 피부질환 등 아직 피해가 인정되지 않은 질환이 남아 있으며, 정신적·경제적 피해를 포함한 배보상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이번 사태의 피해자가 전국민인 만큼 가해 기업과 법원이 사안의 중요성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며 “가해 기업은 책임을 다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법원은 의미 있는 판결을 내려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