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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 조회 수 :3,091 | 댓글 :0 | 14-05-24 12:16

[응답하라1990] 두산 페놀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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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환경운동사의 큰 획을 그은 환경사건이자, 환경운동이 주요 시민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로 작용한 사건이 1991년 발생한 두산페놀사태입니다. 대기업의 무책임한 반환경행태, 대규모 피해발생, 시민들의 환경문제 각성과 지역별 환경단체 결성, 해당기업제품의 불매운동 성공 등 여러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입니다.

당시 환경보건에 대한 전문성과 관심의 부족으로 건강피해를 구체적으로 조사하고 관련성을 밝히는 역학조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한겨레신문 2014년  5월 24일자 토요판의 시리즈기사 응답하라1990의 한꼭지로 소개된 두산페놀사태 글을 살펴보세요. 

1991년 당시 대구로 서울로 뛰어다니며 활동하던 때가 새롭습니다. 페놀이란 생소한 물질의 위해성을 보여주기 위해 금붕어실험을 했던 기억도 나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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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형민의 응답하라 1990
(22) 두산 페놀 사태


1.jpg

두산전자 구미공장이 페놀 폐수를 방류하던 하수구. 이 하수구로 1990년 10월부터 6개월간 페놀 폐수 325t이 낙동강 상류인 옥계천으로 흘러갔다. <한겨레> 자료사진

유신 정권 때 감옥에 들어갔다가 21세기의 문턱에서 석방된 장기수를 만난 적이 있다. 그에게 출소 후 가장 큰 문화적 충격이 무엇인가를 물었더니 두 가지를 말했다. 첫째는 휴대전화. “내가 들어갈 때만 해도 동네에 전화 있는 집이 많지 않았어요. 그런데 나오고 보니 4000만이 전화기를 갖고 다니고, (휴대전화) 없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더라고요.”

하긴 그가 감옥에 갔을 즈음에만 해도 신학기가 되면 선생님들이 반 아이들의 집을 방문하여 부모님과 인사하는 ‘가정방문’ 제도가 있었다. 그 가정방문은 대개 전화가 있는 집이 한 동네의 연락책이 되어 그 집 아이를 중심으로 주변 아이들이 릴레이식으로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 가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한 반 70명 중 반수가 넘는 아이들의 집에 전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절에서 시간이 멈춰 있던 그가, 길에서 전철에서 시끄럽게 휴대전화로 통화를 해 대는 사람들과 갑자기 뒤섞이게 됐으니. 격세지감이라는 사자성어를 굵직하게 떠올릴 만도 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그럼 둘째는 뭘까?

“물을 사먹는 거요. 물을 콜라보다 비싸게 사먹다니. 도통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손에 손에 생수병 들고 다니는 거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1980년대에 물을 사먹는다는 것은
‘돈×랄’로 불리기 알맞은 처사
그러나 영남 지역 수도꼭지마다
악취나는 독성물질 콸콸 흐르자
사먹는 페트병 물 인정할 수밖에

회계학 의무교육은 그렇다 쳐도
‘돈 안되는 과’ 일방적 폐과와
비판적 학생들 가차없는 징계
중앙대학교 주인인 두산그룹은
대학가 ‘물’ 흐리고 있는가

“밥에서도 냄새가 납니다”

또 한 번 ‘하긴, 그렇겠다’라고 공감했다. 내가 대학생이던 1980년대의 끝자락에서조차 물을 사먹는다는 것은 이른바 ‘돈×랄’이라 불리기에 알맞은 얄궂은 처사였다. 당시에도 에비앙이니 뭐니 하는 비싼 물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1988년쯤 되면 국산 ‘생수’(공식 명칭인 ‘먹는 샘물’ 이전의 이름)도 시판되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물을 돈 주고 사먹는다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였다. 물 하나는 축복받은 ‘금수강산’에 대한 믿음이 굳건했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너희 물하고 우리 기름하고 바꾸자”며 부러워했다는 터무니없는 루머가 사실처럼 떠돌 정도였다. 학교에서 농구 한 뒤에 운동장 한편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로 벌컥벌컥 목을 축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고 “물을 끓여 먹자”고 선생님이 아무리 아우성쳐도 각 반의 당번들은 미지근한 보리차보다는 시원한 수돗물을 주전자에 잔뜩 채워 넣었다. 그 물을 대놓고 마신들 누구 하나 배탈 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장기수 말대로 음료수보다 비싼 값에 물을 사먹는다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88올림픽 때 외국인들의 방문에 대비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페트병에 담긴 ‘생수’ 판매를 허용했지만 정부도 물을 돈 받고 판다는 자체에 관대하지 못했던바, 올림픽 후 다시금 생수 판매를 규제했다. 하지만 일련의 수돗물 오염 사태는 상수도 불신을 초래했고 당국의 금지 반 묵인 반 속에 ‘생수’는 한국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되어갔다. 결국 1994년 3월 헌법재판소는 다음과 같은 판결로 생수 판매 규제가 위헌이라고 선언한다. 헌법재판소는 “생수의 국내 판매를 금지토록 규정하고 있는 보건사회부 고시가 헌법상 보장된 직업의 자유와 국민의 행복 추구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판시하면서 “국민이 수돗물의 질을 의심해 마시기를 꺼린다면 국가는 수돗물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이런 불안감이 단시일 내 해소되기 어렵다면 국민으로 하여금 다른 음료수를 선택해 마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책무다”라고 못박았다. 결국 정부는 1995년 공식적으로 ‘먹는 샘물’ 생산과 판매를 자유화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먹는 샘물로 돈을 벌고 싶었던 이들의 ‘직업적 자유’를 위한 노력도 큰 역할을 했겠다. 하지만 물을 사먹는다고 하면 흰 눈자위를 치뜨던 국민들조차 ‘수돗물의 질을 의심하고’ 페트병에 담긴 물에 관심을 돌리게 만들고, 헌법재판소도 그 현실을 인정하는 데 큰 구실을 했던 사건 하나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1991년 3월14일 구미공단 두산전자의 원료 저장 탱크와 공장을 연결하는 파이프에서 무색의 액체가 흘러나왔다. 페놀이라는 물질이었다. 살균제, 구강마취제, 독감 치료제 등의 성분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최초의 플라스틱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베이클라이트의 재료이며, 인쇄회로기판(PCB) 등의 기판을 만들 때 즐겨 사용되는 물질로서 기본적으로 유독물질이었다. 나치스가 유대인들을 대량 학살할 때 이 페놀을 사용했는데, 효율성 견지에서 볼 때 학살에 주로 사용된 독가스 치클론 B보다도 훨씬 더 효력이 좋았다고 한다. 이 괴물 같은 놈이 경상남북도민의 수원지인 낙동강으로 30톤이나 흘러든 것이다.

페놀 자체는 향긋한 냄새를 풍긴다. 이 페놀 섞인 물이 염소 소독을 하는 취수장으로 흘러들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염소와 페놀이 결합하면 클로로페놀이라는 물질이 형성되는데 이것이 매우 불쾌한 냄새를 유발하여 각 가정에서 이상 신고가 들어온 것이다. “밥에서도 냄새가 납니다.” “빨래에도 이상한 냄새가 배요!”

취수사업소 쪽은 냄새가 난다 하니 원인 불명의 부패물질이 유입된 것으로 짐작하고 염소를 대량으로 투입했다. 페놀은 애초에 취수사업소의 수질 검사 기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즉 취수사업소는 원인도 모른 채 일단 염소를 부어버린 것이다. 대량의 염소는 당연히 대량의 클로로페놀을 생산했다. 또 한 번 당연히 불쾌한 정도였던 악취는 코를 찌르는 심각함으로 바뀌었다. 그 물이 대구 시민들의 수도꼭지까지 다다른 것은 물론이었거니와 방류된 페놀은 낙동강 칠백리를 타고 온 영남 지역을 뒤집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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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철학과 3학년 김창인씨가 2014년 5월7일 대학을 그만두겠다는 기자회견을 열고 두산재단 문제를 고발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부동의 1위 OB맥주를 거꾸러뜨리다

누출된 페놀로 인해 수돗물의 페놀 수치가 0.11ppm까지 올라간 지역도 있었다. 이는 당시 허용치인 0.005ppm의 22배, 세계보건기구의 허용치인 0.001ppm의 110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페놀 대란’이었다. 대구·마산·창원·부산 등 낙동강에 물을 의지하는 모든 지역이 페놀 공포에 사로잡혔다. 일부 목욕탕은 휴업했고, 두부 등 페놀 수돗물로 만든 음식들도 폐기처분됐고 페놀 뉴스 충격으로 유산하거나 임신 중절을 한 여성들도 있었다.

당시 부산에서 생활하던 나도 페놀 공포의 체험자 중 한 명이었다.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서 차를 타고 다시 30분이나 걸어 약수터 물을 떠 오셨고 나는 연방 수돗물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페놀의 향기를 감지하려 애썼다. 생수가 불티나게 팔렸고 동네 슈퍼에는 ‘생수 있음’과 ‘생수 매진’의 팻말이 번갈아 매달렸다. 내 기억에 식탁에 노란색의 보리차가 아닌 맹물이 올라왔던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닌가 한다. 사람들이 수돗물을 끓인 보리차보다도 ‘생수’를 더 믿기 시작한 것이다.

야당인 평민당과 4개 민간 환경단체로 구성한 합동조사단은 문제의 진원지인 두산전자를 방문했다. 조사단은 페놀 원액 재고 관리가 엉망이었고, 누출 사실조차 제때 파악하지 못했으며, 그에 대한 안전장치나 경보장치도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더 괘씸한 것은 누출 이틀 후 두산전자가 그 사실을 발견하고도 21일까지 관계당국에 이를 통보하지 않아 사태를 걷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3월14일 ‘악취의 화이트데이’는 고의적인 방류가 아닌 과실로 밝혀졌고 정부의 다급한 수습책으로 웬만큼 가라앉나 싶었다. 하지만 사태는 그렇게 쉽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당시 두산전자는 30일의 영업 정지 처분을 받는데 “수출 전선에 이상이 있다”는 이유로 당국 스스로 20일 만에 영업 정지 처분을 풀어 버린 것이다. 사고는 항상 ‘설마’라는 말을 타고 온다. 설마 그 난리를 치르고서 별일이야 있겠느냐 하는 것이 당국의 생각이었겠지만 이 안이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조업을 재개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다시 2톤이나 되는 페놀이 낙동강으로 방류되는, ‘퐝당 시추에이션’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여론은 폭발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공해추방운동연합이 공동으로 두산그룹 빌딩 앞에서 두산그룹의 주력 생산품인 맥주를 깨부수면서 “맥주보다 깨끗한 물을 달라”고 벌인 시위는 열띤 호응을 얻었다. 학생들은 돌과 페인트를 들고 두산그룹 계열사 사무실을 습격했다. 프로야구 오비(OB) 베어스 팀도 애꿎게 욕을 들어먹었다. 일반 소비자뿐 아니라 슈퍼마켓연합회까지 나서서 두산그룹의 코카콜라와 오비맥주 보이콧을 선언한 가운데 수십년 동안 맥주업계 부동의 1위를 지켜왔던 두산그룹의 동양맥주(OB맥주)는 조선맥주의 크라운맥주한테 그 위치를 잠식당한다.

4월 한 달, 조선맥주는 전 직원이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간 가운데 417만 상자를 팔아치우며 시장 점유율을 10퍼센트 이상 끌어올렸다. 페놀 사태가 강타한 영남 지역의 점유율은 무려 75퍼센트에 이르렀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양맥주는 일시적인 현상이라며 반격의 의지를 불태웠지만 계속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역시 ‘물’이 매개가 된 결정타를 맞게 된다.

1993년 조선맥주가 “지하 수백 미터 암반수로 만든 맥주”라는 카피로 두산그룹의 아픈 곳을 정면으로 찌르면서 ‘하이트맥주’를 내놓은 것이다. 8 대 2로 시장 우위를 점하던 오비맥주는 ‘천연암반수’의 공격에 맥없이 주저앉았고 별안간 일어난 맥주 시장의 지각변동에 감격한 조선맥주는 아예 회사 이름까지 ‘하이트맥주’로 바꾸며 승전가를 부른다. ‘물’의 힘이었다. 그 물을 오염시켰던 ‘페놀’의 악몽이었다. 페놀 사건 이후 심심찮게 터지는 수돗물 오염 사례 속에서 생수 일반 판매의 문턱은 점차 낮아질 수밖에 없었고 페놀 공포를 경험한 국민들은 “물을 돈 주고 사먹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익숙하게 됐던 것이다.

사실 페놀 사태에 관한 한 두산전자는 좀 억울할 수도 있다. 사건이 터진 이후 모든 언론이 ‘방류’ 사건으로 명명했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그 비도덕성을 나무랐지만 실상 방류라기보다는 과실에 가까운 유출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페놀 325톤을 소량으로 강물에 흘려보내 왔다는 또 하나의 팩트는 그 억울함을 상쇄시킨다. 사태에 대응하는 방식도 안이했다. “뜻하지 않은” 페놀 유출 사고라는 표현의 어정쩡한 사과를 했다가 여론의 직격탄을 맞았고 “모든 사고 원인을 제거”했다고 공언했다가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페놀을 또 낙동강에 유출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문제는 단순한 실수만은 아니었다. 대기업의 환경에 대한 불감증과, 수백만의 수돗물을 막아 놓고도 “기업은 밉더라도 공장은 가동돼야 하며, 3억달러 이상 차질이 생길 것”이라면서 조업 재개에 앞장선 당국의 ‘돈이 먼저다’ 정신의 결합이었던 것이다. “돈 때문에 사람 먹을 물을 더럽히다니, 그것도 콜라니 맥주니, 물로 먹고사는 회사에서!”라는 비난 앞에서 두산그룹 회장은 물러나야 했고 수백억을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감수하며 국민 앞에 머리를 숙여야 했던 것이다.

그 뒤 두산그룹 컴퓨터를 켜면…

페놀의 악몽을 겪은 뒤 두산그룹은 오염 기업의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1994년에는 자그마치 환경처 선정 “94년 환경 모범 기업”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한다. 과장 승진 시험을 보려면 환경 과목을 공부해야 했고 회사에서 컴퓨터를 켜면 “환경보전 강령”이 먼저 떴다니 그 노력과 열의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이렇다. “두산그룹은 그날 이후 지금까지 물에 관한 한 한시도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은 때가 없다.” 아마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두산그룹한테 ‘물’이란 그 사사(社史)에서 뼈아프고 통렬한 단어였을 것이다.

그런데 페놀의 악몽으로부터 23년이 흐른 요즘, 나는 두산그룹이 또 하나의 ‘물’ 문제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바로 대학이라는 ‘물’이다. 오늘날 중앙대학교를 운영하는 두산그룹이 펼치는 대학 정책이 페놀만큼이나 강한 독성으로 대학이라는 강을 질식시키고 있다는 것은 단지 몇몇 사람들의 기우일까. 전 학생들에게 회계학을 의무적으로 가르치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지만 일방적으로 ‘돈 안 되는 과’들을 폐과시키고 거기에 비판적인 학생들에 대해 가차 없는 징계를 내리고 취업률을 기준으로 학과를 통폐합하는 ‘기업식 구조조정’을 대학가에 강요하는 일이 과연 낙동강을 타고 흐른 페놀보다는 무탈한 것일까.

페놀 사태 직후 “뜻하지 않은 사고” 운운의 무성의 때문에 격렬한 비난을 사고 오비맥주 수백병이 깨져 나가고 콜라 불매운동을 일으켰던 그때로 돌아가 이른바 ‘두산대학 1세대’인 전 중앙대학생 김창인씨의 자퇴 선언문을 겸허하게 읽어 봤으면 좋겠다. “대학은 세일즈하기 편한 상품을 생산하길 원했다. 하지만 대학은 기업이 아니고 나 또한 상품이 아니다. 난 결코 그들이 원하는 인간형이 되지 않을 것이다.” 환경이란 강물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다. 결국 사람을 지키는 것이고 우리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다. 두산그룹 스스로 말하되 “사람이 미래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의 미래가 ‘세일즈하기 편한 상품’이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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