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당 후보 머리에 꽃을

녹색당 후보 머리에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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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당 서형원 머리에 꽃을! [한겨레21, 2014.04.14 제1006호]
[기획] 경기도 과천에서 한국 최초 녹색당 시장 도전… 청년 생태주의자
1세대가 걸어온 ‘단독자’의 길, 생활정치 실험은 계속될 수 있을까

“서형워니 활짝 피라고, 꽃이 활짝 핐네.”

지난 4월1일, 경기도 과천 중앙공원과 중심상가 사잇길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꽃의 터널 사이에 늘어선 굴다리시장에 서형원 녹색당 과천시장 예비후보가 들어서자 상인들이 저마다 손을 잡았다. 비닐 지붕 아래서 채소를 파는 부부는 “녹색 사무실 잘되고”라고 물었고, 저쪽의 닭집 아저씨는 걸어와 “역풍을 조심…” 하며 진지한 조언을 했다. 슬며시 다가온 생선가게 할머니는 “서형워니 활짝 피라고, 꽃이 활짝 네” 하고 가게로 돌아갔다. 봄볕 받으며 벚꽃이 터지듯, 주변엔 웃음이 터졌다. 시장 옆 빌딩엔 ‘새싹이 움트듯’ ‘나무에 물오르듯’ ‘피어라 과천!’, 녹색당 과천시장 후보의 현수막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모두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와 함께 ‘불법’ 철거를 막아낸 굴다리시장 상인들은 이렇게 서형원을 환대했다. 서형원의 과천, 과천의 서형원이 한국 최초 녹색당 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녹색당보다 먼저 뛴 녹색정치인

하필이면 지구촌 청년들이 “머리에 꽃을” 꽂았던 즈음인 1968년에 태어났다. 그의 책 제목 <행복하려면, 녹색> 같은 글귀가 탯줄을 대는 해였다. 하필이면 1987년 대학에 들어갔다. 6월항쟁이 일어난 해였다. 그는 “대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직업적 활동가로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 이게 내 인생의 요약이에요”라고 말했다. 민중당, 환경운동연합, 초록정치연대, 시의원을 거쳤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런 그가 전직을 준비하고 있다. 직업적 활동가에서 직업적 정치인으로. 그는 “시장은 전업 정치인이 되는 것이고, 생각이 다른 사람도 품어야 하니까요”라고 설명했다. 그에겐 운동과 정치의 경계가 없다. 둘 다 사회를 바꾸는 일이다.

바야흐로 1990년대 초반, 녹색의 가치와 합법적 정치는 아직 낯선 것이었다. 환경운동은 운동가를 꿈꾸는 청년들 다수의 선택은 아니었다. 사회운동이 아닌 제도정치는 여전히 ‘불순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대학 시절 무렵부터 녹색을 중심으로 사고해온 청년생태주의 1세대라 할 만하다. 정치적으로는 거대 양당은 물론 진보정당과도 다른 길을 걸어왔다. 녹색당 창당 이전까지, 무소속 진보 서형원은 한국 정치의 예외적 존재였다. 어쩌면 그는 녹색당보다 먼저 온 녹색정치인이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68년 혁명의 슬로건은 이것이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여전히 그는 상상한다. 정치의 원리가 바뀌는 세상을.

1991~92년, 짧은 민중당 활동을 거쳤다. 그는 “압축적 견습 생활”이라고 돌이켰다. 당시 새로운 현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가장 열심히 주민과 함께 싸우고 있어서” 환경운동을 선택했다. 환경연합에 들어가자 ‘파견 전문가’가 되었다. 1994년 굴업도 핵폐기장, 97년 영흥도 화력발전소, 2001년 새만금 갯벌, 그가 환경연합 수습사원부터 정책국장까지 하며 ‘구른’ 곳이다. “섬에서 팩스 하나, 전화 하나 가지고 먹고 자고 하면서 주민과 신뢰를 쌓고 논리를 만들고 자료집을 냈죠.” 그렇게 섬사람으로 살았다. 대학 시절부터 그를 알아온 녹색당 하승수 대표는 “경험과 이론을 겸비했다”고 말했다. 덧붙이면 “기후변화 같은 지구적 논의가 시작되던 시점, 동아시아 녹색당이 탄생하고 연대하던 시절에 활동하는” 행운도 만났다. 서 후보는 “신혼여행이 첫 해외여행”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외국에 자주 가지는 않았어도 국제연대에서 얻은 것은 많았다. “현장을 책임져야 했다는 것이 중요해요. 국제회의를 하면 조직하고 입장과 논리를 만들고 연설도 하고.” 그의 이말삼초는 집약적 경험을 한 때였다.


‘무소속 10번’ 승리… 희망이자 상처

때로는 승리하고 때로는 패배했다. 갈수록 “한번 이겼다고 해도 이긴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지역 주민 스스로 다른 미래를 선택할 힘을 키우지 않는 한” 영원한 승리는 없었다. “뭘 하나 밀어내도 시장경제의 자본이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아요. 굴업도도 핵폐기장을 막았지만 나중에 재벌이 섬 전체에 골프장을 짓겠다고 해서 홍역을 치렀잖아요.” 그리하여 “주민의 자치 역량이 커져서 녹색 미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에게 녹색은 무엇보다 풀뿌리다.

1995년 과천을 만났다. 역시나 파견이었다. 무소속 시민후보가 과천시장에 출마하자 환경연합 상근자로 파견됐다. 선거운동을 하며 과천을 구석구석 알게 됐다. 그에겐 고향이 없었다. “수유리에서 태어나 신길동, 쌍문동, 문정동, 마포를 거치고 잠깐 의정부에 갔다가 석촌동에도 살고.” 그렇게 화원을 하는 부모를 따라 변두리를 옮겨다니며 살았다. 무엇보다 “거대한 센트럴파크(중앙공원)에 반해서” 과천에 살기로 결심했다. 1996년 결혼과 함께 과천에 살면서 파견지는 고향으로 변했다. 이렇게 68세대의 청년들처럼 고향이 없으면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과천 사람으로 19년을 살았다. “부림동 반지하에서 시작해서 9단지에서 애를 낳고, 중앙동에서 애 학교 보내기 시작하고 별양동 주택 살다가 지금은 7단지…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인가 집이에요.” 과천을 누비며 키운 딸이 중학교 3학년이 되었다.

지역과 중앙의 ‘이중생활’이 한동안 지속됐다. 환경연합에서 일하며 지역운동도 함께한 것이다. 2003년 3월, 환경연합 활동을 그만뒀다. 녹색정치준비모임에 상근하고 지역운동에 힘을 쏟기 위해서였다. 맑은내 방과후 학교 교사로, 마을신문 기자와 배달꾼으로 일했다. 당시 풀뿌리 역량이 모였던 ‘우리가 만들고 싶은 과천의 미래’와 생활정치모임이 동시에 구성돼 지방선거에도 대비했다. 2006년 과천시 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10번’ 서형원 후보가 됐다. 이 선거는 그에게 희망이자 상처였다. 그는 당선됐지만, 동료들은 낙선했다. 그렇게 녹색당 창당을 목표로 삼았던 초록정치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중앙에서 내려다보면 서형원은 무소속, 단독자로 보인다. 그러나 지역의 눈높이로 보면 그의 곁에는 언제나 촘촘한 풀뿌리가 있었다. 시의원을 하면서 열정의 온실, 비닐하우스촌도 만났다. 지난 3월29일, 서형원 후보와 함께 찾아간 비닐하우스촌 꿀벌마을에선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이 자라고 있었다. 한 비닐하우스에 들어서자 요리교실이 한창이었다. 아이들은 과일 퐁뒤를 만들고 있었다. 요리사가 꿈인 6학년 아이는 별모양 틀에 초콜릿을 부으며 짐짓 진지했고, 중앙동으로 이사간 5학년 세영이는 자전거와 지하철을 갈아타고 놀러왔다. 요리교실을 이끄는 어른들은 지역화폐모임 ‘과천품앗이’ 회원들이다. 붕붕 사람들이 “동네”라 부르는 비닐하우스촌과 “시내”라 부르는 과천 중심가는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다. 하지만 품앗이 회원들 중에는 시내에서 온 이들이 많고, 사람을 통해 과천 풀뿌리는 서로 이어져 있다. 붕붕도서관 주혜정 선생님은 “요리가 제일 인기고, 책이 제일 인기가 없다”며 웃었다. 아이들에게 “딴 데 가서 안 놀아?” 물으니 “놀 데가 없어요”라고 아이들은 답했다. 노는 날에 오히려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붕붕도서관은 주말에 문을 연다.

예산 읽어주는 남자, 기타 치는 후보

붕붕도서관은 과천 시내와 외곽을 연결하는 단단한 끈이다. 시의원 서형원의 활동이 끊어진 도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됐다. 2010년, 그의 선거운동은 꿀벌마을 공터에서 열린 촛불집회로 시작됐다. 서민과 중산층, 중심과 변두리, 동네와 계층이 다른 과천 시민들이 “집단적으로 대면하는” 첫 계기였다. 이렇게 만난 이들은 굉장히 진득한 사이가 됐다. 붕붕도서관은 이런 합작품이다. 2010년 선거가 끝나고 도서관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꿀벌마을 주민 문인순씨가 비닐하우스를 내놓았고, 시내에 사는 피아노 선생님 주혜정씨가 운영을 책임졌다. 성당 사람들이 도배를 하고, 중심상가 상인들은 보일러를 놓았다. 상인협동조합 사람들은 지금도 목요일이면 꿀벌마을에 무료급식 봉사를 온다. 반면에 문인순씨는 상인협동조합 반찬가게 ‘과천찬방’에서 일한다. 이렇게 풀뿌리가 연결되고 순환한다. 예전엔 “여기에 산다”고 말하지 않았던 주민들도 꿀벌마을 자치회를 만들어 서로를 돌보기 시작했다. 붕붕 아이들에게 서형원은 ‘아는 아저씨’다. 어느 날, 후보 명함을 돌리는데 한 아이가 지나며 말했다. “아저씨, 저도 붕붕이에요.” 그렇게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는 꼬마 자동차 붕붕처럼, 꽃 같은 아이들이 꿀벌마을에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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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형원의 길을 보여주는 사진들. 1995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 시절, 2000년 환경대학원 현장 조사를 나갔던 강화도 갯벌, 2001년 새만금 갯벌에서 환경운동연합 회원들과 함께한 모습(왼쪽부터).서형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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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꿀벌마을 촛불집회, 과천시민 소극장 공연 찬조 출연(왼쪽부터).서형원 제공

붕붕을 나와 미로 같은 길을 돌았다. 강아지 네댓 마리가 컹컹대는 집에 이르자 서 후보가 먼저 들어갔다. “어머니, 영숙이 어디 갔어요?” 개똥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문을 지나 들어간 집에는 약봉지가 가득했다. 창가 쪽에는 몸을 옆으로 돌리기도 힘든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신장 투석을 받고 당뇨 합병증도 있는 어머니도 엊그제 퇴원한 참이다. “반가워, 반가워.” 불편한 몸을 일으킨 어머니는 서 후보의 손을 쓰다듬으며 계속 말했다. “건강은 괜찮으세요.” 안부를 묻는 그의 손을 어머니는 “재미있고 좋고 착하지” 하며 쓰다듬었다. 그는 친구 영숙(가명)씨를 2007년에 만났다. 비닐하우스촌에서도 가장 어려운 집이었다. 사람 좋은 영숙씨는 미로 같은 동네를 알려주고 이웃들을 소개했다.

다시 좁은 길을 지나 다른 집으로 갔다. “어머니, 계세요?”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휠체어가 접혀 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해 누워 있는 할머니의 동생이 타는 휠체어다. 할머니는 아무리 괜찮다고 사양해도 커피를 내왔다. 비로소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상추 심고 했더니 허리가 아프네” 하신다. 서 후보가 “고추는 잘됐어요?” 하자 할머니는 “잘 말랐지. 빻아서 열 근 만들었어” 답한다. 이들은 휠체어를 통해 가까워졌다. “빵구 나서 한 달을 밖에 못 나갔어. 고쳐달란 말도 못하겠고. 미안해서.” 할머니는 예전을 돌이키며 말했다. 몇 해 전, 그가 들렀을 때 휠체어는 고장난 상태였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아무에게도 고쳐달라는 부탁을 못하고 있었다. “동사무소에서 공짜로 받았잖아. 미안해서.” 서 후보가 복지관에 연락해 바로 수리가 됐다. 할머니는 “지금은 말하면 고쳐줘”라고 말했다. 이제는 복지관 시스템이 바뀌어서 훨씬 편해졌다. 시의원 한 명이 신경을 쓰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불이 나서 사람이 타죽던 비닐하우스촌 집집마다 화재경보기가 설치됐다. 비가 쏟아지면 물난리가 나던 비닐하우스 앞뒤에는 모래주머니가 쌓였다. 서 후보는 마을을 나서며 “제가 정치를 해야 할 직관적인 이유를 만들어준 분들”이라며 “아무것도 못해도 그분들에게 필요한 한두 가지를 할 수 있다면 괜찮은 거잖아요”라고 말했다. 그가 원했던 배제된 장애인, 세입자, 청소년과 얼굴을 맞대는 정치는 그렇게 현실이 되었다. 매주 목요일 꿀벌마을에서 무료급식 봉사를 하는 과천상인협동조합 김정학 이사장은 “비닐하우스 주민들도 냄새가 역해서 꺼리는 집에 들어가 천연덕스럽게 커피를 얻어 마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건 꿀벌마을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과천동, 2006년 4.9%에서 2010년 16.9%로

민심은 표심으로 나타났다. 2006년 선거 때 18%(2460여 표)에서 2010년 27%(4600여 표)로 지지율이 올랐다. 과천 역대 최다 득표였다. 꿀벌마을이 포함된 토박이 중심의 과천동에서 약진이 두드러졌다. 2006년 선거에서 “전멸이었던” 과천동의 득표율이 4.9%에서 16.9%로 올랐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권이 다수가 돼 전반기 시의회 의장을 맡았다. 그는 스스로를 다른 사람의 변화를 자극하고 이끌어내는 촉진자로 여긴다. 의장이 되자 “의회가 시민 참여를 촉진하는 공간이 되도록” 했다. 활용도가 낮았던 시의회 1층을 북카페와 열린강좌실로 만들었다. 북카페에는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행정 자료와 정책용역 자료를 놓아두었다. 강좌실에서는 여성들이 스스로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그는 “다만 필요한 요소요소 하나하나에 돌을 던졌을 뿐”이라고 말했다. 꿀벌마을 노인들의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과천 시민의 ‘예산 읽어주는 남자’가 되었다. 2006년에는 황순식 의원(현 정의당)과 함께 주민참여예산 워크숍을 열었다. 생활 밀착형 예산을 주민에게 설명하는 자리였다.

‘예산 읽어주는 남자’는 ‘기타 치는 후보’였다. 그는 2006년, 중앙공원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유세를 했다. 과정도 즐거운 선거운동은 예컨대 이렇게 진행됐다. <행복의 나라로>를 부르고 나서 그는 “여러분이 앉아 계시는 벤치 위의 나무에 뿌리는 농약에 환경호르몬이 많아서 바꾸도록 했어요. 이렇게 생활을 바꾸는 것이 시의원이에요”라고 말했다. 유모차를 끌고 나무 아래를 지나던 엄마도, 벤치에 앉아 있던 노인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건 과천만의 선거가 아니에요.” 그는 출마의 의미를 그렇게 말했다. 녹색당이 집권한 도시, 영국 브라이턴앤드호브와 독일 프라이부르크를 다녀온 그는 과천을 녹색당의 동아시아 모델로 만들고 싶다. 서 후보는 “녹색당 당원 비율도 두 도시와 비슷하다”고 했다. 인구 27만 명의 브라이턴앤드호브에는 700명 당원이 있고, 인구 7만여 명의 과천에는 200명 당원이 있다. 과천은 인구가 적은 도시인데도 녹색당 당원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다.과천은 녹색당 실험에 최적화된 도시다.

그는 브라이턴앤드호브 녹색당을 높이 평가했다. “강고한 양당 체제를 뚫고 30년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기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는 여전히 인간의 힘과 사람의 변화를 믿는다. 땅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덕적도 여성들이 극렬하게 저항했던 이유는 자신이 갯벌과 핏줄로 연결돼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갯벌을 훼손하는 걸 자기 피부를 긁어내는 것으로 느끼는 거죠. 이 동네의 청년들이 과천과 그렇게 핏줄로 연결돼 있다고 느껴요.” 그래서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청년들이 집값 때문에 과천을 떠나지 않게 하는 일이다.

“과천만의 선거가 아니에요”

이런 부담을 안은 당선이 낙선보다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보다 창의적인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잖아요. ‘기호 10번이 무슨 당선이야’ 했던 것처럼요. 인간이 이뤄낸 변화는 대부분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상상 이상의 변화가 일어날 거예요. 주장은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말로 하면 재미가 없죠. 실제 집행하면 거기에 꽃을 달 수가 있어요. 현실이 훨씬 재미있어요. 실제 해보면 얼마나 멋있을까요?”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노래한 들국화의 <머리에 꽃을>은 이렇게 노래한다. “그건 정말 멋진 얘기야.” 물론 그런 기적이 현실이 되려면 시의회에서 ‘복식조’로 활동해온 황순식 정의당 과천시장 예비후보와 단일후보 경선을 치러야 하고, 새누리당 후보도 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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